김종철, 혹은 삶-생명을 옹호한 ‘유기적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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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혹은 삶-생명을 옹호한 ‘유기적 지식인’
  • 이명원·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 승인 2020.08.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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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의 에크리티시즘]

1991년 이래 격월간지 『녹색평론』의 발행인으로 생태문명으로의 근원적 전환을 촉구해왔던 비평가이자 사상가 김종철(1947-2020)이 남긴 지적 유산은 크다. 일차적으로 그는 역사적 상상력과 민중적 삶의 활기와 공동체성을 중시한 문학평론가이자 영문학자였다. 문학평론과 문학론에 해당되는 저작에는 『시와 역사적 상상력』(1978),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1999), 대지의 상상력(2019)이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문학작품을 읽을 때 무엇보다도 ‘역사적 상상력’을 중시하였고, 특히 지배계급이 아닌 ‘풀뿌리 민중들’의 집합적 감정과 연대, 그리고 저항의 문제를 중시했다. 그는 농민공동체를 포함한 토착적 ‘민중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출발해, 피압박 상황에 처해 있는 흑인이나 ‘제3세계’ 민중들의 식민주의와 산업문명에 대한 저항을 중시하였고, 이러한 관점에서 인류사에서 장구하게 지속되었던 ‘비근대성’의 문제를 작품을 통해 적극적으로 사유했다.

동시에 그는 공생공락(共生共樂)에 근거한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을 역설했던 비범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에콜로지에 기반한 문명전환의 문제를 다른 그의 저작이 가장 비대한 셈인데, 『간디의 물레』(1999), 『땅의 옹호』(2008), 『발언』(2016),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2019)가 이에 해당한다. 김종철이 역설하기 이전까지 한국에서의 에콜로지 담론은 사실상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고, 우리 사회 자체가 경제성장에 기반한 산업화를 발전주의라는 관점에서 무한긍정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또 군사독재의 장기화와 저항하는 민주화와 노동해방의 문제가 쟁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산업문명 자체가 초래하는 전지구적인 위기의 문제를 탐색하는 시야는 협소했다. 바로 이런 시점에 김종철은 생태사상가로서의 자신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이다.

한편, 그는 뛰어난 번역자이기도 했다. 번역작업을 통해 그는 근대적 ‘사상’과 ‘운동’과 ‘인식’의 생태문명으로의 급진적 전환을 촉구했다. 『오래된 미래』(1996)를 통해 서구식 개발주의의 폭력성을 강하게 환기시켰고,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2007)에서는 근대세계의 어둠을 거슬러 ‘좋은 삶’에 근원적 탐문을 촉진했다. 오키나와에서 활동하는 사상가 더글러스 러미스의 저작인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2011)와 간디의 철저한 평화헌법구상을 조명한 『간디의 ‘위험한’ 평화헌법』(2014)의 번역을 통해서는 자치와 자립에 기반한 마을 민주주의의 사상적 근거를 적극적으로 환기시켰다. 기본소득 문제와 관련한 탐구를 지속하면서 ‘화폐’ 문제에 대한 관심도 깊어졌는데, 『100% 돈이 세상을 살린다』(2013)를 번역한 것은 이런 까닭일 것이다. 생전의 마지막 번역은 『후지탄, 여자들의 나라』(2020)였는데, 생전에 완역을 끝내고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명민한 잡지 편집자이기도 했다. 1991년 이후 격월간 『녹색평론』은 단 한 번의 결호도 없이 통권 173호(2020. 7-8)를 발행했다. 거의 30년 동안 물론 편집자문위원들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단 한 사람의 사유와 열정이 응집되어 이 잡지가 발행되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173권의 편저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잡지는 한국의 잡지사에도 큰 변화를 초래했다. 종이의 고급화를 추구했던 다른 매체와 달리 처음부터 재생용지로 제작했다. 본문 속에는 단 한 장의 사진도 싣지 않았다. 문자가 내포하고 있는 고전적 경의의 뜻에서였을 것이다. 매 호마다 하나의 특집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 필자를 발굴하기 위해 전화와 직접 만남을 피하지 않았고, 실시간으로 스크린 하던 해외잡지의 주요한 글들을 역시 거의 실시간으로 번역하여 게재하는 일도 많았다. 생명-삶의 문제를 시적인 것과의 연관 속에서 사유하는 일도 멈추지 않아서, 매 호마다 몇몇 시인들의 시가 게재되었다. 
 

▲ 김종철 선생님
▲ 김종철 선생님

김종철은 이러한 지적 활동 외에도 시민 간의 우정과 교류, 연합의 문제도 매우 중시한 지식인이었다. 대학을 사직하고 녹색평론사가 서울로 옮겨온 이후에는 2004년부터 ‘이반 일리치를 읽는 시민모임’과 함께 시민 자주강좌를 10여 년 동안 지속했다. 근대문명의 어둠을 대응생산성(counter-productivity)이라는 개념으로 사유했던 이 지식인과 김종철은 어딘지 많이 닮아있었다. ‘김밥모임’(김종철 선생님과 함께 밥을 먹는 모임)도 2007년부터 2020년까지 지속되었다. 필자 역시 이 모임에서 김종철과의 막힘 없는 대화를 지속해 나갔는데, 그는 풀뿌리 민중의 삶과 고통의 문제를 한국문학이 짊어지지 않는 것이 근대 이후 문학의 가장 큰 문제점임을 지적하곤 했다. 2016년부터는 일본의 ‘오다 마코토(小田實)를 읽는 시민모임’과의 정례적인 <한·일 식견교류>도 진행해왔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녹색평론』 독자모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것 역시 다른 매체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시민적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의 한 양상이었던 것 같다. 2011년 일본에서 후쿠시마 재난이 벌어진 이후에는 그간 회의적이었던 녹색당의 창당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녹색당 전임강사’를 자처하면서, 제도정치 체제에서 녹색당의 원내진출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이렇게 보면, 김종철은 영문학을 전공한 비평가이자 사상가, 번역자이자 잡지 편집자, 시민운동가이자 정당운동가로서의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교육자로서의 교수 경력까지를 포괄하면, 그는 에콜로지에 기반한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을 총체적으로 역설했던 한 시대의 ‘유기적 지식인’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향후 김종철의 비평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다면적인 지적 실천과 활동을 총체성의 관점에서 검토하는 시각이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문학평론가에서 ‘유기적 지식인’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서 그에게 하나의 모델로서 작동하였던 요인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녹색평론』을 창간한 이후 그가 여러 지면에서 자신의 사상을 펼쳐나가는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이로 거론하고 있는 인물은 무위당 장일순이다. 동시에 장일순의 생명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해월 최시형의 동학사상 역시 에콜로지의 한국적 적용 및 확산의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듯싶다. 동학의 평등주의 사상과 함께 유무상자(有無相資) 이념에 기반한 공생공락(共生共樂)의 가치지향은 설사 그것의 완전한 현실적 실현은 어렵다고 할지라도 농민공동체는 물론 현대의 도시공간 안에서의 자치와 협동의 연대하는 시민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사상적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무위당의 한살림 운동과 원주지역에서의 신협운동 등을 통해서는 민중들의 자치와 자립을 가능케 하는 물질적 근거와 연합의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단서를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번에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와 『대지의 상상력』을 다시 읽어보면서, 내가 한 가지 단서를 얻게 된 것은 영문학자로서의 지적·사상적 탐구의 과정 속에서, 일종의 역할모델과 유사한 역할을 했던 지적 원천은 영국의 비평가 F. R. 리비스(1895-1978)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영국의 산업화에 시적으로 저항했던 윌리엄 블레이크를 가장 깊이 있게 음미했던 한국의 비평가였다. 아마도 이것이 『녹색평론』을 출간해가는 과정 속에서, 시를 통한 인간의 창조적 가능성을 환기하고자 했던 하나의 근거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서두에서 요약했던 것처럼 그가 비평가, 사상가, 번역가, 잡지편집자, 사회운동가 등의 여러 영역을 마다하지 않고,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을 필사적으로 촉구했던 것의 결과로써 ‘유기적 지식인’의 몫을 지속할 수 있었던 기원에는, 그 자신이 의식했던 그렇지 않았던 리비스의 비평적 활동에서 얻은 영감이 지적·사상적 원천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삶-생명 옹호자들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문학론집 『대지의 상상력』에는 「리비스의 비평과 공동체 이념」이라는 장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리비스를 논의하고 있는 김종철의 분석과 평가를 읽어가다 보면, 그것은 리비스뿐만 아니라 김종철 그 자신의 활동에 대한 평가라고 판단해도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가령 리비스는 1932년 이후 20년 동안 문학지 『검토(Scrutiny)』의 발행을 통해 영문학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김종철은 1991년 이래 거의 30년 동안 『녹색평론』의 발행을 통해 한국에서의 에콜로지 운동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다시 리비스에 대한 평가.

“리비스의 비평은 이미 초기부터 매우 근본적인 원칙에 입각해 있었다. 그 원칙은 산업문명의 논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이 문명의 역사적 불가피성을 긍정하는 대다수 지식인들의 입장과는 화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김종철의 비평 역시 초기부터 산업문명의 근대적 논리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을 강력하게 역설한 것이었는데, 이는 근대적 발전주의나 성장주의를 지고의 목표로 간주하는 지식인들에게 김종철의 비평과 사상은 화해하기 어려운 성격의 것이었다.
 
“리비스는 산업문명과 기술주의의 지배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는 시대 상황 속에서 ‘삶-생명의 가치’를 끝까지 수호하려는 비평가”라고 김종철은 평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김종철의 비평적·사상적 태도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명전환을 위해서는 “책임 있고 지성적인 지식인들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이면서도,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그러한 지식인들을 점점 더 용납하지 않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진단 역시 리비스의 당대적 인식일 뿐만이 아니라, 김종철의 명백한 현실 인식이기도 했다.
 
또한 “리비스가 보기에 가장 뜻있는 정치적 행동은, 모든 진정한 인간가치를 마침내 말살해버릴 것이 분명한 산업기술문명에 대하여 우리가 인간으로서 진실로 ‘책임감 있게, 그리고 지성적으로’ 반응하는 일”이라고 김종철은 쓰고 있는데, 이 역시 김종철 자신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의 기본적인 관점을 오히려 잘 드러내는 분석이다.
 
다음과 같은 문장 역시 ‘리비스’의 자리에 ‘김종철’을 넣어서 읽으면 더욱 명료하게 이해되는 진술이다.
 
“로렌스의 비평가로서의 업적을 논하는 어떤 에세이에서 리비스는 로렌스가 ‘온몸으로 서구문명에 저항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수량화될 수 없는 ‘삶’을 옹호하려 하였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대로 리비스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경우는, 시와 소설이 아니라 비평의 언어를 가지고 온몸으로 싸웠다.”

삶-생명의 철저한 옹호로서의 비평과 사상의 치열한 모색과 정력적인 실천이야말로, ‘유기적 지식인’으로서의 김종철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합당한 정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명원·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성균관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최일수 문학비평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후 문학평론가로 활동해왔다. <비평과전망> <내일을여는작가> <실천문학>의 주간을 역임했다. 지은 책에 <타는 혀>, <해독>, <파문>,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 <종언 이후>,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두섬: 저항의 양극, 한국과 오키나와> 등이 있다. 상상비평상, 성균문학상, 한국출판문화상(저술 부문)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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