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를 태운 공초, 영원한 자유를 누린 오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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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를 태운 공초, 영원한 자유를 누린 오상순
  • 이승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시인
  • 승인 2020.08.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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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말하다_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이승하 지음, 나남, 296쪽, 2020.06)

공초 오상순은 담배를 늘 피워 ‘꽁초’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는 것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시인이다. 그에 대해 조금 더 안다면 폐허 동인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폐허』 창간호에 「시대고와 그 희생」이라는 시사적인 글을 발표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라면 민족주의자였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평전의 저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오상순의 행적을 더듬어보면서 그의 실체를 밝히는 데 주력하였다.

오상순은 3ㆍ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에 유학을 하고 온 선각자였다. 경신학교를 졸업한 17세 때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 아오야마 학원을 거쳐 교토 도시샤 대학 종교철학과를 1917년에 졸업하였다. 귀국 후 기독교 전도사 생활을 했지만 금방 접고는 보성고보와 조선중앙불교학교에서 강사 생활을 몇 년 했다. 절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3년쯤 한 뒤에 불가에 귀의하지 않고 나와 중국을 세 차례 떠돌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비승비속으로 살면서 다방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다방에서 만난 그 당시 문화예술계의 온갖 인물들에게 그림과 글씨를 받아 『청동산맥』이라는 사인북을 200권 가까이 만들었다.

69세 나이로 죽을 때까지 그의 생애는 어머니를 일찍 여읜 것 말고는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것도 같다. 전혀 파란만장하지 않았고 큰일을 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 구상 같은 시인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어찌하여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평생 따랐던 것일까.

▲ 1922년 5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에스페란토 집회. 왼쪽 두 번째가 오상순 시인, 그 오른쪽 옆이 저우쭤런, 한 사람 건너 예로센코, 그 옆이 루쉰이다. (사진=나남출판 제공)
▲ 1922년 5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에스페란토 집회. 왼쪽 두 번째가 오상순 시인, 그 오른쪽 옆이 저우쭤런, 한 사람 건너 예로센코, 그 옆이 루쉰이다. (사진=나남출판 제공)

오상순은 일본과 중국 본토, 한국, 만주 지역을 왕래하며 각국의 지식인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베이징에 있는 저우쭤런의 집에 기거하면서 중국의 문호 루쉰, 러시아 출신 아나키스트 예로센코 등과 만났다. 루쉰의 동생인 저우쭤런의 일기, 조선총독부 조사 기록, 에스페란토 대회 후 루쉰, 저우쭤런 등과 찍은 사진 등을 보면 오상순은 에스페란토, 아나키즘 등 신문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와 바하이교 총재 캐나다인 아그네스 알렉산더 등과 어울렸고, 그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안내를 맡았던 이가 오상순이었다.

오상순은 이런 국제적인 안목을 갖고 있었기에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이나 「아시아의 여명」 「허무혼의 선언」 같은, 엄청난 시공을 배경으로 한 대작 장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1920년대 시사 연구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이들 시에 담긴 폭넓은 세계관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 시편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형이상학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평전의 특징은 오상순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다양한 사람들의 증언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입을 통해 오상순의 입체적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상순은 평범하지 않은 그의 생애처럼 독특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많이 남겼는데 저자는 오상순에 대한 지인들의 증언과 글, 인터뷰를 다방면으로 수집하여 이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중에서도 변영로, 서정주 등 동시대의 문인들과 구상 시인을 비롯해 이근배, 박호준 시인 등 오상순을 스승처럼 따랐던 후배 시인들의 경험담을 잘 찾아내어 책에 녹여냈다.

오상순의 매력은 그의 시가 갖고 있는 코즈모폴리턴적인 성격과 인물 자체의 천재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보성고보 영어교사 출신인 그는 해방정국과 제1공화국 시절에 접어들었을 때 얼마든지 출세 길을 달릴 수 있었는데 시인 이외에는 그 어떤 감투도, 직업도 가진 적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갔다. 그는 종교인이 아니었지만 불가의 스님보다는 현실에서 해탈한 도인에 가까웠다. 우주 원리를 탐구해 죽음의 번민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도를 깨치면 죽고 사는 게 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 오상순은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늘 있는 진여실상(眞如實相)의 존재’(129쪽)를 꿈꾸었다. 그는 살아생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단 한 권의 책도 내지 않았다. 재물과 지위, 아내와 자녀, 거처에 대한 욕심까지 모두 내려놓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평전은 오상순의 삶과 작품세계를 ‘자유’라는 키워드로 재해석했다. 실상사를 갖고 있던 법정스님이 ‘무소유’를 완벽하게 실천했던 것일까? 하지만 오상순은 20세기 100년을 통틀어 무소유를 완벽하게 실천한 유일무이한 인물이었다.

이 책에는 박윤희 박사의 이름이 여러 번 나온다. 박윤희 박사는 저자의 제자이다. 도일해서 한ㆍ중ㆍ일 3국을 넘나든 오상순의 문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뒤 바로 세상을 하직한 가슴 아픈 사연을 스승으로서 직접 밝히고 있다. 제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발표되지 못한 논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오상순의 삶과 문학정신을 제자는 논문으로 복원하였고, 스승은 이 평전으로 복원하였다.

▲ 명동백작 공초 오상순(1894.8.9~1963.6.3)
▲ 명동백작 공초 오상순(1894.8.9~1963.6.3)

일본 유학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생애 내내 단 한 편의 친일작품을 발표한 적이 없었던 것도 오상순이었다. 이런 시 정신을 바탕으로 그는 나라를 빼앗긴 절망을 딛고 일어서고자 했다. 절망의 폐허 위에서 다시 시작해보려는 열망을 버린 적이 없었다. 또한 시의 스케일이 엄청나게 컸다. 1920년대에 이런 시가 나왔다는 것은 실로 기적적인 일이다.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 「아시아의 여명」, 「허무혼의 선언」, 「어둠을 치는 자」 등은 당시의 안목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시였다.

그는 우주적 상상력으로 시를 품었다. 청정무애하고 광대무변한 우주의 원리를 노래한 시와 시인의 유리표박한 삶은 정확히 일치하였다. 공초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고, 일생을 부평초처럼 떠돌다가 생을 마감했으므로. 시와 삶이 일치되는 경우는 참으로 드문데, 오상순은 그것을 제대로 보여준 시인이었다.


이승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문학박사).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이며,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과 한국문예창작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었으며, 지훈문학상ㆍ시와시학상 작품상ㆍ가톨릭문학상ㆍ편운상ㆍ경기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사랑의 탐구》, 《뼈아픈 별을 찾아서》, 《감시와 처벌의 나날》,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예수ㆍ폭력》 등이, 산문집으로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등이,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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