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문학연구회’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그들의 의의와 행적을 재평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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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문학연구회’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그들의 의의와 행적을 재평가하다
  •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 승인 2020.08.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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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외국문학연구회와 《해외문학》』 (김욱동 지음, 소명출판, 524쪽, 2020.06)

▲ 해외문학연구회 송년회 (1930) 뒷줄 왼쪽부터 정인섭, 한사람 건너 김진섭, 한사람 건너 장기제, 앞줄 왼쪽 두번째부터 김상용 김온 정규창 이선근 이하윤, 그 옆은 미상
▲ 외국문학연구회 송년회 (1930) 뒷줄 왼쪽부터 정인섭, 한사람 건너 김진섭, 한사람 건너 장기제, 앞줄 왼쪽 두번째부터 김상용 김온 정규창 이선근 이하윤, 그 옆은 미상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는 격언은 문학과 사상 등 인간의 모든 정신 영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문학도 자국의 울타리에 갇혀 있으면 순수한 형태를 보존하면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러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어떤 식물과 동물의 경우 순종교배보다는 잡종교배가 더 건강한 후손을 낳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문화권의 문학도 다른 문화권의 문학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그 도전에 응전할 때 더욱 발전할 수 있다.

나는 그동안 외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국문학에 늘 자의식을 느껴 왔다. 외국문학, 그중에서도 영문학을 연구하되 늘 국문학을 의식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영문학과 국문학 사이에 놓인 담에 올라앉아 양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눈여겨보려고 애썼다. 물론 국문학자 중에는 그러한 나의 행동에 눈을 흘기기 일쑤였다. 그러나 나는 외국문학을 전공하는 것이 어디까지나 국문학 연구를 튼튼히 하기 위한 것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고, 그러한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 해외문학 창간호
▲ 해외문학 창간호

그런데 나보다 반세기 넘게 앞서 일제 강점기 식민지 종주국의 수도요 서구 문물의 교도보라고 할 도쿄에서 외국문학을 전공하던 조선인 유학생들도 외국문학 연구가 어디까지 국문학 연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20년대 중반 그들은 ‘외국문학연구회’라는 모임을 설립하고 그 기관지로 《해외문학》을 간행했다. 연구회 회원들은 이 잡지의 창간호 권두사에서 “무릇 신문학의 창설은 외국문학 수입으로 그 기록을 비롯한다. 우리가 외국문학을 연구하는 것은 결코 외국문학 연구 그것만이 목적이 아니요, 첫째에 우리 문학의 건설, 둘째로 세계문학의 호상 범위를 넓히는 데 있다”고 천명했다. 실제로 일본에서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일본 근대문학의 집을 짓는 데 이바지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외국문학 전공자였다. 한국의 경우도 크게 예외가 아니어서 근대적 의미의 학문과 문학의 기초를 닦은 사람들 중에는 무애 양주동(梁柱東)과 황순원(黃順元) 또는 최재서(崔載瑞)처럼 외국문학 전공자들이 많았다.

나는 외국문학연구회와 《해외문학》이라는 책에서 20대 초반의 식민지 지식인들이 한국문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지 밝히는 데 주력했다. 이 책은 1920년대 중엽 외국문학연구회가 탄생한 역사적·지적 배경을 먼저 탐색한다. 식민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1919년의 독립만세운동과 1923년 일본을 강타한 간토(關東) 대지진은 젊은 조선 지식인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촉매 역할을 했다. 와세다(早稻田)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던 우촌(牛村) 전진한(錢鎭漢)을 중심으로 그들은 ‘한빛회’라는 비밀결사단체를 결성했다. 뒷날 ‘노동자의 대변인’ 또는 ‘노동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정부 수립 때 초대 사회부장관을 역임했다. 한빛회는 도쿄와 그 근처 조선인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① 정치와 경제, ② 과학과 기술, ③ 어학과 문학 등 세 분야의 하부 조직을 만들었다.

외국문학연구회는 바로 어학과 문학을 담당하는 한빛회의 세 번째 하부 조직으로 결성됐다. 이 연구회 회원들은 주로 와세다대학과 호세이(法政)대학에 재학 중인 유학생들이 주축이 됐다. 와세다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던 정인섭(鄭寅燮), 같은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하다 사학과로 전과한 이선근(李瑄根), 호세이대학에서 영문학과 불문학을 전공하던 이하윤(異河潤) 세 사람이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이 세 사람 외에 창립에 적극 가담한 유학생으로는 호세이대학 독문과의 김진섭(金晉燮), 같은 대학 불문과의 손우성(孫宇聲), 와세다대학 불문과의 이헌구(李軒求),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의 김명엽(金明燁), 도쿄외국어대학 러시아 문학과의 김준엽(金俊燁) 등이 있었다.

외국문학연구회 회원들은 딜레탕트적인 외국문학 전공에서 벗어나 명실공히 자국문학을 위한 실천적인 운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첫째, 그들은 외국문학 작품을 번역하되 일본어나 중국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한국어로 옮기는 중역 방식을 배제하고 원문에서 직접 번역하는 직역 방식을 채택했다. 그들은 중역을 ‘유령(幽靈) 번역’이라고 매도하면서 자국문학의 발전에 적잖이 저해가 된다고 판단했다. 둘째, 연구회 회원들은 외국문학을 국내에 소개하되 어디까지나 일본 학자들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이해하여 소개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외국문학을 어떤 매개나 간섭 없이 주체적으로 직접 받아들이려고 했다. 셋째, 연구회 회원들은 외국문학 연구를 발판 삼아 문예 창작에도 눈을 돌렸다. 예를 들어 김진섭은 이양하(李陽河)와 피천득(皮千得)과 함께 한국 수필문학의 세 봉우리 중 하나를 차지할 만큼 이 분야에서 크게 활약했다. 이하윤과 김광섭(金珖燮) 등이 시인으로 활약했는가 하면, 정인섭과 이헌구 등은 비평가로 활약했다.

이 밖에도 나는 이 책에서 해외문학이 간행된 뒤 외국문학연구회와 양주동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번역 논쟁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외국문학을 전공하면서도 국문학에 관심을 두던 양주동은 연구회 회원들의 번역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특히 경문체(硬文體)와 축자역(逐字譯)을 둘러싼 것이었고, 이에 대한 연구회 회원들의 반론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한국 번역사에서 화려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이 번역 논쟁은 지금도 번역가들이나 번역 연가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만큼 중요하다.

더구나 1930년대 초엽 외국문학연구회 회원들이 조선의 작가들과 벌인 일련의 문학 논쟁도 자못 중요하다. 이 무렵 식민지 조선 문단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주의 기치를 높이 쳐들고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부르짖던 카프문학 계열의 진영과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며 순수문학을 주창하던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구회 회원들은 양비론적 입장에서 대척 관계에 있던 이 두 문학 진영 모두를 비판하면서 중립적 입장에 서 있었다. 민족주의 문학 쪽에서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지만, 프로문학 쪽에서는 연구회에 대한 비판이 격렬했다. 연구회 쪽에서는 정인섭과 이헌구가, 프로문학 쪽에서는 송영(宋影)과 임화(林和) 등이 논쟁에 나섰다. 이 논쟁 또한 양주동과의 번역 논쟁과 마찬가지로 한국 문학의 위상을 한 단계 향상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외국문학연구회 회원들이 활약할 무렵 그들의 나이는 겨우 20대 초반에서 중반에 지나지 않았다. 요즈음의 젊은이들과 비교해 보면 ‘지적 거인’처럼 느껴진다. 물론 식민지 상황에서 일찍 철이 들고 조숙한 탓도 있지만 20대 청년들의 활동이라고는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일제의 식민지 굴레에 벗어난 뒤 조국의 문화 창달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 여간 놀랍지 않다. 해방 후 그들은 언론계, 학계, 문화계에서 그야말로 눈부시게 활약했다. 만약 그들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한국의 문학과 문화는 지금처럼 그렇게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고, 비록 발전했다 해도 그 시기는 훨씬 뒤로 늦추어졌을 것이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 미시시피대학교에서 영문학 문학석사 학위를,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영문학 문학박사를 받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서구 이론을 국내 학계와 문단에 소개하는 한편, 이러한 방법론을 바탕으로 한국문학과 문화 현상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목을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교수이며 울산과학기술원(UNIST)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번역의 미로』, 『소설가 서재필』, 『오역의 문화』, 『번역과 한국의 근대』, 『시인은 숲을 지킨다』, 『문학을 위한 변명』, 『지구촌 시대의 문학』, 『적색에서 녹색으로』, 『부조리의 포도주와 무관심의 빵』, 『문학이 미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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