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수도 한성의 대표적인 인문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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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수도 한성의 대표적인 인문지리지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08.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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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한경지략: 19세기 서울의 풍경과 풍속 | 유본예 지음 | 장지연 옮김 | 아카넷 | 632쪽

『한경지략』은 실학자 유득공의 아들로 19세기 전반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유본예(1777∼1842)가 1830년에 수도 한성의 인문지리를 저술한 책으로 19세기 서울의 역사와 건물, 명소, 풍속 등을 그려낸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서울 지리지이다. 당대 서울 주민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서술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후 한성만을 다룬 지리지가 새로 편찬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일찌감치 그 사료적 가치를 평가받았다.

유본예는 한경지략에서 1394년 한양 정도부터 1830년대까지 약 440년간 서울의 자연경관과 궁궐·종묘와 사직·관아 등 주요 기관, 성곽·개천·시전 등 도시시설, 사적과 명승, 마을과 풍속, 인물과 고사 등을 19개 분야 약 500개 항목으로 나눠 서술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 창덕궁 등 궁궐과 종묘, 창덕궁 중건의 배경, 경희궁 창건 등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실었고, 저자가 살았던 18∼19세기에 관한 내용을 상당 부분 담았다.

이 책은 지리지로서 다루어야 하는 서울의 여러 장소를 주제별로 다루면서도, 서울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놀이문화와 여러 유명인의 사적을 간직한 동네, 크고 작은 물길과 맛있는 우물 같은 구체적인 정보들도 담았다. 한양 곳곳의 공간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묘사적인 전개방식과 미시적인 정보는 이 책의 현장성과 당대성을 잘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서울의 옛 모습을 추적할 때면 어디서나 가장 기본적인 자료로 활용해 왔다.

한편 이 책은 지극히 유본예 개인의 관심에 편중된 개인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선대에 대한 기억과 서울 사람이라는 유본예의 정체성은 이 책을 저술한 근간이었다.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한양은 19세기의 한양 전체가 아니라, 유본예가 취사선택한 한양이었다. 그러나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당대의 현실에 한발 더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사료적 가치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한경지략』의 체계는 대상의 좌표를 먼저 설명하고(천문), 간략한 역사와 한성의 지역적 범위를 설명한(연혁) 후에 서울의 전체적인 자연 지세를 설명하는 형승이 이어지고, 그다음으로 성곽, 궁궐, 단유 등의 인문 환경을 설명하고 있다. 형승 이후는 도시의 곳곳을 주제별로 훑고 가는 셈이다. 공간을 상상하며, 혹은 공간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묘사적인 전개방식과 장소별로 일상의 풍속을 소개한다.

가령 서울은 이곳을 거쳐 간 위대한 인물들의 후손이 대대로 거주하는 장소로 소개된다. 이정귀(李廷龜)의 후손이 거주하는 관동, 조말생(趙末生)의 후손이 사는 타락동, 이경여(李敬輿)의 봉사손이 거주하는 남산동, 한명회(韓明澮)의 자손이 거주하는 난정리문동,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이 거주하는 누국동, 서성(徐渻)의 후손이 거주하는 약전현, 이재(李縡)의 후손들이 거주하는 아현 등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유본예는 한양을 더욱 세분화하여 타락동은 동촌 사람들이 노니는 곳이라든가 인왕산 아래 누국동은 여항 서리들이 주로 사는 곳이라는 설명처럼 지역별로 거주하는 사람의 특성을 꼽기도 하였으며, 훈련원 배추와 왕십리 미나리, 북둔의 복숭아, 시전 편목에서 남쪽은 술을 잘 빚고 북쪽은 떡을 잘 만들어 ‘남주북병’이라고 한다는 등의 특산물을 언급한다. 이는 그가 한양이라는 지역을 세분하고 그 특색을 구별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처럼 미시적이며 생활에 밀착된 지식은 서문에서 유본예가 강조했던, 원주민이어야 제대로 기술할 수 있다고 자부한, 바로 그 정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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