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군왕은 주역을 통해 신하와 소통하고 민생을 돌봤다
상태바
조선의 군왕은 주역을 통해 신하와 소통하고 민생을 돌봤다
  • 임병태 기자
  • 승인 2020.08.09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간소개]

■ 주역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조선의 왕들, 주역으로 앞날을 경계하다 | 박영규 지음 | 씽크스마트 | 208쪽

조선의 근간을 세웠던 유교儒敎, 그리고 그 유교의 중심에는 ‘사서삼경’이라 불리는 일곱 권의 책이 있다.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삼경’은 《시경》, 《서경》, 《역경》을 가리킨다. 유교 교육에서 가장 핵심적인 서적인 이 일곱 권의 책은, 많은 시간이 지난 현대에 이르러서도 진리를 찾기 위한 이들이 즐겨 탐독하고 있다.

그중에서 《역경》이란 《주역周易》을 가리킨다. 동양철학의 종주이자 왕조시대 군왕들의 제왕학 교과서였던 《주역》은 조선의 명군인 정조가 무려 ‘사서삼경의 모본母本’이라고까지 칭송하며 늘 옆에 두고 읽었을 정도였다. 역대 중국 황제들은 물론이고 조선 임금들 또한 항시 손닿는 곳에 《주역》을 두고 필요할 때마다 그 지혜를 빌렸다.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주역과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주역을 쉽게 소개하는 책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주역의 연원과 역사적 의미 등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고, 64괘의 핵심 메시지도 총망라되어 있다. 조선시대 군왕과 신하들이 국정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인용한 주역의 괘사나 단사, 상사, 효사 등만 제대로 읽어도 주역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과 원리를 충분히 배울 수 있다. 조선의 군왕과 신하들 가운데는 주역의 대가들이 즐비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그들의 주역 해석은 정치적인 사건과 정책, 제도, 백성들의 민원, 학문적 논쟁 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주역 해설서보다 현장감과 박진감이 넘친다. 그래서 추상적인 단어들로 구성된 주역 텍스트를 직접 읽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주역을 배울 수 있다.

《주역》은 어떤 책이기에 수많은 왕들이 그토록 아끼고 곱씹었던 것일까? 《주역》은 글자 그대로 주周나라 시대의 역易, 즉 변화에 관한 책이다. 삼라만상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없으며 우주의 운행과 함께 늘 변한다는 것이 주역의 기본 원리다. 《주역》의 괘는 총 64괘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괘 모양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기 때문에 그 원리만 파악하면 쉽게 깨우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괘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내는 능력이다. 상상력을 발휘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읽어내야 한다. 그래서 《주역》 공부는 절반은 수학 공부이고 나머지 절반은 인문학 공부라고들 한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많은 군왕들이 그토록 《주역》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 책은 총 16장으로 구성된다. 1장 '정조, 주역으로 소통하다', 2장 '이순신의 주역과 선조의 주역', 3장 '숙종, 주역으로 세력 균형을 꾀하다', 4장 '영조, 주역으로 탕평을 이루다', 5장 '세조, 주역으로 자신의 업보를 돌아보다', 6장 '정종, 주역으로 마음을 비우다', 7장 '성종, 주역으로 앞날을 경계하다', 8장 '연산군, 주역의 경고에 귀를 닫다', 9장 '중종, 주역으로 간신을 멀리하다', 10장 '광해, 주역으로 중립을 이루다', 11장 '인조, 주역으로 굴복하다', 12장 '효종, 주역으로 북벌을 꿈꾸다', 13장 '현종, 주역으로 예송을 논하다', 14장 '태종, 주역으로 왕권을 강화하다', 15장 '세종, 주역으로 조정을 놀라게 하다', 16장 '경종, 주역으로도 지우지 못한 당파 싸움의 그늘'로 나뉜다.

옛 에피소드들이 인상적이다. 정조와 영조, 숙종, 세조 등 조선의 모든 군왕은 《주역》을 통해 신하들과 소통하면서 민생을 돌봤다. 왕은 물론이고 학문을 갈고 닦은 문무관들이라면 누구랄 것도 없이 《주역》으로 자신의 점괘를 꼽아보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순신 장군 또한 《주역》으로 점을 쳤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전쟁을 앞두고 점을 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오지만, 어째서인지 이 같은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환국정치의 달인으로 알려진 숙종의 경우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세력 균형을 꾀하는 과정에서 《주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서인의 세력이 커지면 판을 뒤집어 남인을 등용했고, 이 과정에서 남인의 세력이 기세등등해지면 또다시 판을 뒤집어 서인을 중용했다. 이 과정에서 송시열의 아들 송기태가 숙종에게 탄원서를 올리자, 숙종은 《주역》의 지수사괘地水師卦 상육 효사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한다. ‘대군大君 유명有命 개국승가開國承家 소인물용小人勿用, 큰 위업을 달성한 임금에게는 명이 있으니 나라를 열고 집안을 이어가는 데 소인을 쓰지 말라’는 뜻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량이 좁은 소인을 곁에 두지 말아야 하니, 그래서 ‘소인물용’이라 한 것이다. 숙종은 《주역》을 통해 송기태의 아버지인 서인 송시열을 뛰어난 선비로 치켜세우고 그와 대립했던 윤휴와 남인을 소인으로 규정했다.

그런가 하면 집권 초기부터 탕평책을 추진했던 영조 또한 《주역》을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어갔다. 1736년 11월 17일 《영조실록》을 보면 탕평책에는 찬성하지만 부작용을 우려하는 이덕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1728년 이인좌의 난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탕평책을 추진하려는 영조가 《주역》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하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내용이 나온다.

이덕수는 천화동인괘 상전에 나오는 ‘천여화天與火 동인同人 군자이君子以 유족類族 변물辨物, 하늘과 불이 동인이니 군자는 이로써 무리를 모으고 사물을 분별한다’는 문구를 인용하면서, 탕평이라는 명분으로 옳고 그름, 군자와 소인에 대한 분별마저 흐릿해져서는 안 된다며 이를 경계한다. 이에 영조는 동인괘 육이 효사에 대한 주해 가운데 한 구절로 보이는 ‘동인우종同人于宗 인도야吝道也, 끼리끼리 모이니 인색하다’는 문구를 인용한다. 당파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폐쇄적인 집단을 형성하면 서로 허물을 덮어주고 소속되지 않은 이는 무조건 비방하고 배척한다는 의미다. 즉 영조는 《주역》의 문구를 인용하여 이덕수에게 당파 싸움의 폐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주역》이 무조건 올바른 방식으로만 인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1636년, 병자호란에 패배한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했고, 당시 임금이었던 인조 또한 ‘삼전도의 굴욕’을 맛보아야만 했다. 추후 청나라 태종이 사망했을 때 인조는 대제학 이식을 통해 사면령을 내리는 교서를 발표한다.

여기서 《주역》이 인용된 방식을 보면 앞서 언급했던 사례들과는 달리 청나라 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설괘전說卦傳에 나오는 ‘제출호진帝出乎震’이라는 문구로는 청나라의 황제가 동쪽에서 일어나 천하를 통일했다는 의미를, 손괘에 나오는 ‘중손이신명重巽以申命’이라는 문구로는 조선의 군주가 청나라 황제의 명령을 고분고분 잘 따르니 별문제 없이 황제국과 신하국으로서의 두 나라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부분을 통해서는 《주역》이 인용되는 다양한 사례를 살펴볼 수 있음과 동시에 군주의 무능한 리더십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와 관련한 역사적 교훈까지 얻을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