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한 실학자 이덕리가 설계한 조선 수호의 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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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한 실학자 이덕리가 설계한 조선 수호의 비책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08.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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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상두지: 비운의 실학자, 조선의 국방 청사진을 그리다 | 이덕리 지음 | 정민·강진선·민선홍 외 옮김 | 휴머니스트 | 264쪽

『상두지』는 살아서는 연좌제로 귀양 가고, 죽어서는 정약용으로 오인된 비운의 실학자 이덕리 필생의 역작으로 근대 이전 조선의 국방 시스템과 안보 인프라를 구체적으로 설계한 보기 드문 실학적 저작이다. 국방 인프라 조성과 무기 체계 정비에 대한 실용적 비전을 담은 거의 유일한 전근대 저술인 『상두지』는 조선 후기의 지리와 기후, 경제와 군사 정보에 관한 폭넓은 식견을 바탕으로 당시 주류 군사 전략의 한계를 날카롭게 꼬집고, 18세기 조선의 안보 현실에 맞춘 새로운 국방 정책의 틀을 대담히 제시한다.

기존의 국방 관련 서적들이 병법서면 병법, 진법서면 진법에 관해서만 기록했다면, 『상두지』는 한 사람이 전부 집필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분야의 묘안을 상세히 설명하고, 그 실행 방안을 단계별로 정리했다. 평시와 전시 각각의 방어 체제와 무기 체계를 정밀하게 논하면서 조선을 수호할 국방 기조의 정형을 새로 짜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자 한 것이다.

두 차례의 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이 끝나고 전란 없이 지낸 지 약 200년, 당쟁에만 골몰한 조정과 안일에 빠진 벼슬아치들을 대신해 불운한 실학자 이덕리가 절박한 충심으로 국가에 닥쳐올 전란을 대비한다. 이덕리는 국제적인 차(茶) 무역을 통한 군비 재원 마련부터 둔전 조성, 병력 수급, 방어 시설 건설, 군사 전략·전술, 무기 제조법과 사용법까지 조선을 수호할 다채로운 제도와 방책을 『상두지』 한 권에 짜임새 있게 정리했다. 다산 정약용이 감복하여 자신의 저술에 인용했을 정도로 『상두지』는 치밀한 통찰과 기발한 상상, 폭넓은 원용을 자랑한다.

▲ 그동안 정약용의 저서로 잘못 알려졌던 상두지의 저자가 이덕리라는 사실을 밝혀낸 정민 교수
▲ 그동안 정약용의 저서로 잘못 알려졌던 상두지의 저자가 이덕리라는 사실을 밝혀낸 정민 교수

이덕리가 국방 개혁의 시작점으로 꼽은 둔전(屯田) 조성에 관한 내용을 예로 들면, 『상두지』는 그저 ‘둔전이 좋으니 만들어야 한다.’라는 당위적인 주장에 그치지 않는다. 역대 중국의 둔전 제도를 살피고, 조선에서 둔전을 운용할 방안으로 둔전 설치 지역과 규모, 둔전용 토지를 사들일 재원 마련책, 산간 지대의 수리 시설 설치 방안, 둔졸의 모집 대상과 운용비 마련 및 급료 지급 방식까지 빠짐없이 서술했다. 어중간한 견문으로는 넘볼 수 없는 수준의 자세한 방책을 제안함으로써 실제로[實] 쓸모있는[用] ‘실용’의 미덕을 오롯이 실현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상두지』는 군사 요충지에 무슨 성(城)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이 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전술로 병사들을 다루어야 하는지, 각각의 전술에 알맞은 무기를 어떻게 만들고 사용해야 하는지 차례차례 설명한다. 마지막에는 변방의 이민족이나 농민군과의 공성전에 시도되었던 각종 전법, 그리고 무기 생산을 위한 제철과 제련에 관한 내용까지 종합했다. 이런 점에서 『상두지』는 전근대 시기 국방 시스템의 총체적 혁신안을 내보인 희소한 저작으로, 그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포루(포를 설치하여 쏠 수 있도록 견고하게 만든 시설물) 외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상두지』 본문에 설명된 포루의 외형을 유추해볼 수 있다.
▲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포루(포를 설치하여 쏠 수 있도록 견고하게 만든 시설물) 외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상두지』 본문에 설명된 포루의 외형을 유추해볼 수 있다.

『상두지』는 조선의 안보 현실을 고려한 정책 방향 설정과 자신의 국방 구상안을 실현할 재원 마련 방법과 같은 거시적 담론도 과감히 제기한다. 조선 초기, 기병전 중심으로 짜였던 군제와 전술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조총 앞에 무력화되며 보병 중심 운용으로 대폭 수정되었다. 하지만 명나라 군대가 후금에 대패하고, 조선 역시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며 북방의 기마병이 주적으로 자리하면서 기병 전술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었다. 이덕리는 이처럼 국방 전략의 변수로 작용하는 상황 변화를 면밀히 읽어내 각종 군사적 조건에 최적화된 방어 체제와 이를 뒷받침할 특성화된 무기 체계를 갖출 것을 건의했다. 특히 병자호란 당시 황해도와 평안도의 곧고 평탄한 도로를 타고 후금의 기병이 빠르게 남하한 데 반해, 조선의 방어 체계는 산성 위주여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역사적 사실을 조목조목 반영했다.

이덕리가 자신의 구상안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국제적인 차(茶) 무역을 제의한 부분은 『상두지』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이덕리는 한 해 1만 근의 차 생산에 5천 냥의 비용을 들여, 포장·운송 및 인건비와 창고 물류비용을 제하고도 1년에 순수익으로 8만 냥 이상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해마다 생산량을 늘려 100만 근의 차를 채취하면 1년에 800만 냥을 얻게 된다고 했다. 가난한 백성의 생계에도 도움이 되고 국가는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게 되므로, 이를 국방비용으로 지출하면 그야말로 국방 재정의 기반을 일거에 바꿀 수 있는 획기적인 기획이 아니겠느냐고 역설했다. 하지만 이덕리의 제안은 안타깝게도 조선 사회에서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못한 채 잊히고 말았다. 오히려 130여 년이 지난 1925년 식민지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이 가능성을 재조명했고, 1940년 태평양전쟁 당시 보성 차밭에서 4만 개의 떡차를 생산해 몽골 전장에 납품하기도 했다. 조선에 들어온 지 몇 십 년도 되지 않은 일본인들이 금방 알아챌 만큼 조선의 차가 지닌 잠재적 부가가치가 높았기에, 이덕리의 주장이 공론에 그치고 만 역사는 더 씁쓸히 다가온다.

▲ 『화룡경』에 실린 화룡권지비거. 수레 위에 동물상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 화포를 숨기고 있는 점이 『상두지』 속 주작포차와 유사하다.
▲ 『화룡경』에 실린 화룡권지비거. 수레 위에 동물상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 화포를 숨기고 있는 점이 『상두지』 속 주작포차와 유사하다.

18세기 조선의 안보 현실에 맞춤한 실용적 국방 담론으로 국방 안보 시스템을 개혁하고 병장기 운용 체계를 쇄신하여 장차의 국가적 환난을 대비하자는 충절과 신의에서 발아한 이덕리의 『상두지』는 이제껏 정약용의 저술로 잘못 알려져 왔다. 유배된 죄인이라는 신분을 고려해 자신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감췄기에 살아생전 그의 뜻을 알아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덕리 사후 10년 즈음, 정약용이 『상두지』를 손에 넣게 된다. 정약용은 『상두지』를 읽고 난 뒤 그 꼼꼼한 주장에 감복하여 자신의 저술에 세 차례나 인용함으로써 세상에 이덕리의 이름과 이 책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렸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상두지』가 도리어 정약용의 저작으로 잘못 알려졌고, 이덕리가 세상을 뜬 지 22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의 존재는 망각의 저편에 묻혀 있었다. 조선 말기의 문신 김윤식은 자신의 시문집 『운양집』에 “근세에 정다산이 『상두지』를 지어, 관서의 직로에 성을 쌓고 보루를 설치하고자 했다. 내가 일찍이 그 정확한 논의에 감복했었다.”고 쓴 바 있다. 『상두지』 저자에 대한 이와 같은 오인은 조선 최고의 실학 사상가 정약용만큼이나 이덕리가 경륜과 실력을 갖춘 위대한 실학자였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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