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장사꾼의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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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장사꾼의 회고록’
  • 임병태 기자
  • 승인 2020.08.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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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볼라르가 만난 파리의 예술가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상과 화가들의 이야기 | 앙브루아즈 볼라르 지음 | 이세진 옮김 | 박재연 감수 | 현암사 | 512쪽

빛과 색의 예술이 찬란히 피어난 19세기 말 파리, 라피트 거리의 한 화랑에서는 미술사에 이름을 새길 화가들의 개인전이 연달아 열렸다. 이 화랑의 주인이 바로 당대 가장 유명한 미술상이었던 앙브루아즈 볼라르다. 그는 인상파 화가들과 미술 시장에 대한 글에서 꼭 언급되는 미술상이다.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화가들의 관학풍 미술이 대세이던 시절, 형태의 정확성보다 빛과 색을 중시하고 신화 속 장면이 아닌 실제 풍경을 그리던 인상파는 처음에 평론가와 대중들에게서 외면당했다. 하지만 볼라르는 많은 무명 화가들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개인전을 열어주었으며 국제 미술 시장에 선보임으로써 인상파를 널리 알렸다. 세잔, 르누아르, 드가 등 수많은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은 그는 당대 예술계의 한복판에 있었다.

이 책은 볼라르의 자서전 『어느 화상의 회고록(Souvenirs d’un marchand de tableaux)』의 완역판으로 당대 파리 미술계의 민낯을 담았다. 수많은 걸작을 남긴 위대한 화가들도 그 앞에서는 한 인간으로서 울고 웃고 질투하고 갈등하며 자신을 드러낸다. 그의 회고 속에서 화가들은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싸우고, 소설가, 시인들과 교류하며 영감을 주고받기도 한다. 뛰어난 예술 감각을 지닌 후원자이자 시대를 앞서가는 기획자, 이윤을 추구하는 냉철한 사업가였던 볼라르. 그가 약동하는 19세기 말~20세기 초 파리 예술계를 생생히 증언한다.

사과의 화가 세잔의 삶을 설명할 때면 꼭 불려 나오는 사람이 있다. 바로 미술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이다. 볼라르는 탕기 영감의 물감 가게에서 세잔의 그림을 보고 ‘복부를 정통으로 맞은 기분’이 들었다고 회상한다. 법학도였던 볼라르는 미술상으로서 일을 시작하자마자 세잔의 개인전을 기획했지만 이 무명 화가의 전시에 대한 평론가와 대중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수많은 야유와 비난을 받으면서도 볼라르는 꾸준히 세잔의 작품을 전시했고, 결국 세잔은 많은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며 거장으로 자리잡았다.

이처럼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위대한 화가들을 앞서 알아보는 감식안을 가졌다. 그는 마네의 사망 이후 그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사들였으며, 세잔과 같은 무명 화가들을 후원하며 친분을 다졌다. 1985년 반 고흐 전시, 1901년 피카소 전시, 1904년 마티스 전시 등 그가 주최한 많은 개인전은 안목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의 미술품 투자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그에게 돈뿐만 아니라 명성까지 가져다주었다. 볼라르는 프랑스를 넘어 국제 미술 시장의 중심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을 이끄는 사람이 되었다.

▲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세잔, 르누아르 작품의 모델을 서기도 했다. 115번이나 포즈를 취해줬더니 세잔은 겨우 “셔츠 앞쪽은 봐줄 만하게 나왔다”고 말했다. 피에르 보나르가 그린 ‘고양이를 안고 있는 볼라르’(1924년). 현암사 제공
▲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세잔, 르누아르 작품의 모델을 서기도 했다. 115번이나 포즈를 취해줬더니 세잔은 겨우 “셔츠 앞쪽은 봐줄 만하게 나왔다”고 말했다. 피에르 보나르가 그린 ‘고양이를 안고 있는 볼라르’(1924년). 현암사 제공

작품의 가치가 결정되는 과정은 시장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미술 시장에서 창작자와 수집가를 이어주는 미술상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크다. 아무리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낸다 한들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면 작품은 묻히고 만다. 그러나 예술사를 이야기할 때, 위대한 작품을 처음 알아보고 소개한 사람은 으레 화가들에게 가려지게 마련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현대에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지만 그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한 화상들의 존재는 잘 인식되지 않는다. 앙브루아즈 볼라르 또한 그렇다.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세잔이나 고흐, 마네, 마티스 같은 위대한 화가들을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장사꾼의 회고록’을 내고 싶다는 출판사의 요청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 미술상으로서의 그의 삶을 좇다 보면 그 시대의 미술계를 함께 지켜보게 된다. 가감 없이 기록한 초기에 인상파에 대한 비난들을 보면 그들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극명히 변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마네의 처남이 마네의 사망 후에 〈막시밀리안의 처형〉을 조각내어 처분하고, 뤽상부르 미술관이 고갱과 카유보트의 작품 기증을 거부했던 일화를 읽다 보면 그 가치를 아는 현대인들은 경악할 것이다. 볼라르의 실수로 그림의 이름이 잘못 붙을 때마다 관객과 평론가의 평가가 극명히 바뀌던 일화는 하나의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 폴 세잔이 그린 ‘볼라르의 초상’ 현암사 제공
▲ 폴 세잔이 그린 ‘볼라르의 초상’ 현암사 제공

볼라르의 회상 속에서 인물들은 생생히 살아 숨 쉰다. 회고록에 등장하는 예술가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고갱, 드가, 로댕, 르누아르, 마욜, 마티스, 세잔, 세뤼지에, 시냐크, 피카소 등 그 당시 활동하며 직접 만난 예술가들은 물론, 건너 들은 작가들의 평가까지 모두 담았다. 볼라르는 다른 화가의 부탁으로 드가에게 어떤 재료를 쓰는지 물었다가 핀잔을 듣고, 로댕이 작업실에서 작품들을 깨부수는 모습을 보며 놀란다. 볼라르를 찾은 수집가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세르비아의 전 국왕에게 왕권을 비판한 그림을 판매했다가 환불을 요청받고, 세잔의 작품을 놓쳐서 안타까워하는 미국의 설탕왕 해브메이어에게 다른 그림을 팔아치우기도 한다.

한편 볼라르는 이 책에 출판업자로서 판화집을 만들던 경험도 상세히 풀어놓는다. 유명한 화가들을 섭외해 판화 작품을 만드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출간 방식이었는데,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책들은 소장 가치가 매우 높았다. 그는 또한 이 회고록을 쓰기 전에 작가로서 르누아르, 드가, 세잔의 전기를 직접 집필했는데, 저명한 화가들에 대한 자신의 책이 평론가들에게 어떤 비난과 칭찬을 들었는지도 회고록에 거리끼지 않고 기록했다. 자신에 대한 평가조차 좋은 이야기와 나쁜 이야기를 가리지 않고 서술하는 태도는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모이던 파리의 예술계를 가감 없이 생생하게 묘사하는 데 일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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