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혁명 시대, 민주주의 역사를 시민의 교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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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 시대, 민주주의 역사를 시민의 교양으로
  • 임병태 기자
  • 승인 2020.08.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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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민주주의 역사 공부 1, 2권 (4·19 혁명+5·18 민주화운동) | 한홍구 지음 | 창비 | 각 140쪽, 160쪽

4·19혁명 6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는 2020년, 대표적인 한국현대사 연구자이자 저술가 한홍구 교수가 대중을 위해 펴낸 교양 민주화운동사이다. 우리 민주화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을 각각 한권의 책에 담았다.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은 민주적 가치가 흔들릴 때 빛을 발하는 시민의 힘이다. 4·19에서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불모지에서 권력자를 몰아냈고, 5·18에서 압도적인 폭력에 굴하지 않았다. 승리와 패배는 엇갈렸지만, 두 사건 모두 후대의 민주화에 결정적인 영감을 제공했다. 민주주의야말로 행동을 필요로 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임을 이 사건들은 웅변한다.

다소 의아한 일이지만 지금까지는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을 기초부터 다룬 교양서가 별로 없었다. 민주화운동 관련 기관이나 학술 연구자들이 펴낸 사료집 혹은 학술서이거나, 현대사를 서술하면서 민주화운동을 소개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일반 독자들이 접하기에는 다소 무겁거나 사건을 제대로 알기에 불충분했다. 저자는 이번 4·19와 5·18을 시작으로 제주4,3, 6월 항쟁, 노동운동 등의 우리 민주화 역사를 대중에게 알리는 작업을 이어갈 생각이다. 역사의 주요 사건에서 지혜를 구하는 일이야말로 촛불혁명 시대의 민주주의를 가꾸고 성숙시키는 데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에서다.

▲ 민주주의 역사공부_사진1_4.19 당시 학생들 시위. (출처 4.19혁명 홈페이지)
▲ 4.19 당시 학생들 시위. (출처 4.19혁명 홈페이지)

5·18민주화운동은 당시 많은 젊은이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군대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을 학살하고 철저히 패배시킨 뒤 결국 권력을 거머쥔 사건. 그 학살의 주역이 1980년대 내내 권력자로 군림했기에 젊은이들이 광주의 기억에서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를 이루고 이후 부침 속에서도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진전시켜온 것은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부채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5·18민주화운동은 우리 민주화 역사에서 가장 장엄한 패배로 기록될 사건이다.

1979년 부마항쟁에 이어 10·26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살해당하자, 20년 가까이 한 사람에 의해 독점되었던 권력에 급격한 공백이 생겼다. 이 공백을 메우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 학생과 신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계엄군이 충돌했다.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났지만 계엄군의 강경한 태도에 대부분 사그라들었는데, 한곳에서 유독 끈질기게 저항이 이어졌다. 바로 광주였다. ‘왜 광주였나’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여러 연구가 있었으나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광주 시민들이 진압에 굴하지 않았고, 계엄군은 계속해서 더 큰 폭력을 광주에서 행사한 것만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시민들이 ‘각성’한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무고한 희생자들을 목격하며 직접 집회에 나선 시위대뿐 아니라 영문을 모른 채 계엄군에 쫓겨 도망가던 시민들까지 죽음을 불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5월 18일 공수부대의 만행은 민중항쟁으로, 민주화운동으로 변화해 갔”다.

광주의 시위대와 계엄군이 충돌한 5월 18일부터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점령되고 시민군이 사살, 체포된 5월 27일까지, 광주는 항쟁의 현장이자 ‘대동세상’이었다. 무자비한 국가폭력에 ‘이건 아니다’라며 저항하는 동시에,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자를 돌보며 혹여 있을지 모르는 일탈을 방지하기 위해 서로 독려하는 모습이 당시 증언과 사진 기록에 생생히 남아 있다. 특히 마지막 날 계엄군의 진입이 예고되었음에도 도청에 남기로 한 소수의 시민군들은 죽거나 죽느니만 못한 상황에 처할 것이 분명하지만 ‘무의미한’ 저항을 선택했다. 누군가는 남아야 한다며 도청을 지켰던 그들 덕분에 우리는 설사 당장은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해야 할 일을 함께 해나가야 함을 알게 되었고, 5·18민주화운동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다.

▲ 5.18 당시 전남도청 분수대 앞(5·18기념재단)
▲ 5.18 당시 전남도청 분수대 앞(5·18기념재단)

5·18은 시작부터 ‘기억과의 투쟁’이었다. 당시 계엄군은 광주를 봉쇄하면서 외부와의 소통을 일체 차단했고, 언론은 학살 현장을 전혀 다루지 않거나 폭동으로 왜곡했다. 절망감을 느낀 광주시민들은 언론사를 불태우고 왜곡보도에 항의하는 한편 외신을 통해 사건을 적극 알리려고 했다. 마지막 도청 항쟁 역시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해달라는 외침이었다. 이제는 당시 증언과 사진, 여러 문화 콘텐츠를 통해 어느 정도 실상이 밝혀졌지만, 광주의 기억 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북한군개입설을 비롯해 5·18민주화운동 보상을 둘러싸고 극우세력의 공격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학계와 법정에서 허위와 왜곡으로 판명되었으나 반공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왜곡 발언들은 모습을 바꿔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5·18의 진실을 더 분명히 밝히고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6~17년 촛불혁명을 거친 우리의 민주주의 실험은 아직 진행형이다. 민주주의에 ‘완성’은 없겠지만, 민주적 가치만큼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민주사회를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한층 높아진 민주주의 감수성에 걸맞은 문화와 제도, 의식을 갖추어나가는 데 우리의 행동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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