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들을 수 있어야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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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들을 수 있어야 강의
  • 손봉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고신대 석좌교수
  • 승인 2020.08.02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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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칼럼]

19세기 영국 성공회 라일(J. C. Ryle) 주교는 유명한 설교자요 학자였다. 한번은 웨일즈 탄광촌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는데,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한 광부가 다른 광부에게 말했다. “저분은 주교일 수 없어. 주교가 어떻게 내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설교를 해?”

최근까지도 심오하고 창조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은 어렵게 말하고 어렵게 쓴다고 알려졌다. 서양 철학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판되었을 때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좀 더 쉽게 써야 하겠다고 해서 내놓은 것이 “형이상학 서설”인데 “순주이성비판”보다 더 어렵다는 반응을 받았다. 러셀은 헤겔 철학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다 했지만, 그의 “정신 현상학”이나 “법철학”은 불후의 걸작이다. 비트겐스타인은 자신의 “논리철학 논고”를 러셀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불평했다. 이해하기 어렵기는 하이데거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새로운 사상을 표현하자니 용어를 새로 만들거나 있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고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으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사실이 악용되는 것이 문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는 어렵게 써도 내용이 심오했지만 헤겔은 어렵게만 쓰면 심오한 줄 알고 심오하지는 않으면서 어렵게만 썼다”는 식으로 헤겔에 대해서 비아냥거렸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한때 한국에도 그런 풍토가 있었다. 위대한 사상가들은 난해하기 때문에 어렵게 말하고 쓰는 것으로 뛰어난 학자인 척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쓰고 강의하는 사람들을 피상적이라고 무시하기까지 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철학분야에는 그런 풍토가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상당 기간 철학개론은 대학에서 교양필수 과목이었다. 그런데 전임 철학 교수들이 교양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위신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고 갓 석사 학위를 받은 젊은 시간강사들에게 개론 과목을 맡겼다. 이해도, 경험도 부족한 강사들이 저자 스스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써 놓은 교과서를 가지고 자신도 모르는 소리를 떠들어 댄 것이다. 그러니 신입생들에게 철학이란 완전히 하나의 아브라카다브라(abracadabra – 이해할 수 없는 주술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사도, 학생도 철학이란 의례 그런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그런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따라서 개선하려는 노력도 전혀 없었다. 그런 철학개론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졸업하여 국가와 사회의 중요한 결정을 하는 지도자들이 되었을 때 철학에 대한 그들의 인상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헛소리”였다. 교양과목의 지위를 잃은 것은 당연하다.
    
철학이든 잡담이든 말과 글은 다른 사람이 듣고 읽기 위한 것이다. 무슨 소린지 모르는 말과 글은 소통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므로 말도 글도 아닌 헛소리다. 칸트, 헤겔 등 위대한 사상가들은 어렵게 썼지만 그래도 옛날에는 그들을 이해하고 그 가치를 발견해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준 고마운 학자들이 있었기에 인류문화에 크게 공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창조적이고 심오한 사상가들도 별로 없거니와 다른 사람의 어려운 글을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로 평가할 사명감과 인내력을 가진 학자들도 찾아보기 힘 든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리 심오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과 글은 쓰레기가 되기 쉽다.

앞으로 대학 강의 대부분이 전파 매체를 통하여 이뤄질 것이라 한다. 이미 캠퍼스도, 교실도 없는 미네르바대학 출신은 세계 최고 대학 출신보다 더 인기 있는 인재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 비대면 강의는 대면 강의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고 집약적이 될 수밖에 없고 예나 부연 설명이 줄어질 것이다. 질의응답도 아마 상당히 제한적일 것이다. 전반적으로 대면 강의보다 이해하기가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강사는 조금이라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청중의 눈높이에 맞추지 않으면 아무리 내용이 풍부해도 소용없는 강의가 되고 말 것이다. 

듣고 읽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려면 상당한 경험과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는 말을 자신이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칸트나 헤겔 같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이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광부도 알아들을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었던 라일 주교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도 인기 있는 설교자였다. 알아들을 수 있어야 배울 수 있다. 알아들을 수 있어야 강의다.


손봉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고신대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다.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현재 고신대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기아대책 이사장이며, 나눔국민운동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현대정신과 기독교적 지성』, 『오늘을 위한 철학』, 『기독교적 관점에서』, 『꼬집어 본 세상』, 『윗물은 더러워도』, 『별수 없는 인간』, 『나는 누구인가』, 『건강한 가정』, 『고통받는 인간』, 『고상한 이기주의』, 『기독교와 복음』, 『울림 열림 어울림』, 『사도신경 강해』, 『생각을 담아 세상을 보라』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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