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포기하지 않는 주체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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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포기하지 않는 주체의 윤리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08.0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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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그림자의 빛 | 김미현 지음 | 민음사 | 376쪽

'젠더'를 둘러싼 열두 가지 키워드를 통해 한국 문학의 흐름을 되비추었던 『젠더 프리즘』 이후 12년 만에 출간되는 동시대 작품 대상 평론집이다. 이 책은 주체의 윤리, 잠재성의 문학, 감정 동학과 긍정의 윤리, 세속화와 환속화, 장소와 비장소, 돌봄과 자기서사, 교차성과 억압의 복잡성, 포스트휴먼과 테크노페미니즘, 모성트러블과 모성의 확장 등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에 있는 주요한 개념을 바탕으로 2000년대 소설의 형질 변화를 조망한다.

지난 20년 동안 주목받은 한국 소설을 재편하는 저자의 프리즘은 ‘그림자’다. 그림자를 포기하지 않는 바틀비적 윤리를 통해 옹호되는 21세기 주체의 윤리, 그림자를 빼앗긴 이후에도 여전히 성실한 삶을 이어가는 여성들이 처한 지정학적 조건을 읽어 내는 교차성 페미니즘과 리부팅된 페미니즘, 한국 소설에 드리운 오래된 그림자를 되짚으며 살펴보는 문학의 정당한 실패들…한국 문학을 소환하는 그림자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 정면과 이면을 점검하는 일은 문학의 본질과 시대성에 대한 사유를 따라가는 일이기도 하다. 정오에도 그림자는 존재한다. 짧아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림자의 문학’이 위험에 빠질 때에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다고 착각할 때다. 급변하는 시대와 함께 수시로 형질을 바꾸어 온 2000년대 한국 소설을 바라보는 김미현의 ‘그림자 문학’은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보는 긍정의 문학론이자 긍지의 문학론이다. 1부 ‘21세기 주체의 윤리: 바틀비들의 배달 불능 편지’에서는 2000년대 소설을 ‘주체의 윤리’라는 측면에서 분석한다. 1부에서 가장 많이 소환되는 주체는 바틀비다. 바틀비는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으로, 그의 직업은 필경사다. 바틀비의 후예들로서 2000년대 한국 작가들은 ‘그러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을 하겠다는 강력한 주체성을 보여 준다. 21세기의 변화된 현실을 변화된 주체를 통해 보여 주는 비틀비들의 다양한 행보는 그림자의 그림자조차 소중히 간주하려는 그림자 문학의 윤리를 강변한다. 바틀비는 절대 자신의 그림자를 포기하지 않는 윤리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교차성은 한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이 젠더, 인종, 계급 등 다양한 측면이 상호교차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론으로, 한 사람에게 작용하는 지배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측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과 창발적 속성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여성이 받는 차별과 흑인이 받는 차별을 각각 분석한 후 취합하는 방식으로는 흑인 여성이 받는 차별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2부 ‘스틸(steal) 페미니즘과 스틸(still) 페미니즘의 교차성’에서는 스틸이 지닌 이중성을 강조한다. 빼앗겼어도(steal) 여전히(still) 그녀들이 그녀들로 존재할 수 있는 생존술을 분석, 페미니즘 문학의 하부 장르를 새롭게 조명해 본다. 이전의 하부 장르와 서로 대비되는 교차성을 통해 교차 이전과 교차 이후의 차이를 확인함으로써 ‘영원한 상실’을 이기는 ‘성실한 상실’을 확인할 수 있다.

3부에서는 오랜 시간 한국 소설을 대표해 왔던 작가들의 문제작을 중심으로 문학 자체를 생각함에 있어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의 경계를 살펴본다. 1부와 2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표한 지 오래된 텍스트들을 분석한 글들이 포함된 3부에서는 문학을 향한 질문이나 의문에 있어 여전히 유효한 질문과 그 해답에 이르는 길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흔히 한국 문학의 어두운 그림자를 논할 때에 꾸준히 제기될 수 있는 ‘이기적 유전자·위험한 함정·정치라는 유령·언어의 불가능성·낭만적 사랑’ 등의 부정적 개념들을 작가론 혹은 작품론 형식으로 정리해 본다. 문학을 문학이지 않게 하는 불안의 요소들을 통해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것들을 거꾸로 추적한다는 점에서 2000년대 문학의 형질 변화를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평론집에서 추구하는 ‘그림자의 문학’은 정오에도 그림자를 보려는 문학이다.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문학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평론집에서 다루는 모든 텍스트들은 ‘정오의 바깥’으로서의 그림자를 소환해 주는 텍스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 평론집의 제목이 ‘그림자의 빛’인 이유를 대변해 주는 텍스트들이기도 하다. ‘빛의 그림자’는 너무 절망적이다. 하지만 ‘그림자의 빛’은 모순 안에 내재하는 열린 가능성이고, 절망 속에서도 힘들게 작동하는 희망이다. ‘부정 속의 긍정’이 아니라 ‘부정 자체의 긍정’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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