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대, ‘온라인 강의’가 던져준 고민과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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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시대, ‘온라인 강의’가 던져준 고민과 단상
  • 정대성 부산대·서양현대사
  • 승인 2020.07.27 1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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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2020년 1학기가 거의 끝나간다. 남은 것은 짧아진 방학밖에 없지만, 긴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얼마나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는지, 정도의 차이만 있지 대학 성원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으리라. 하지만 이 유례없는 시간을 어쨌든 큰 문제없이 마쳐 다행이라는 마음 너머로 적잖은 생각과 걱정이 밀려든다.

‘코로나19의 탄생’은 기원전(BC)과 기원후(AD)를 가른 것과 같은 역사적 기념비가 될 듯하다. 아니 이미 되었다. 다만, 예수 탄생의 의미가 나중에 인지되고 역사적인 분기점이 되었다면, 코로나바이러스는 태어나자마자 이미 불멸의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부터 세상은 코로나19 이전(BC)과 이후(AC)로 나뉠 것이라고 당연시한다. 

대학 풍속도 역시 그렇다. 사이버 대학만이 아니라 모든 대학에서 온라인으로만 가르치고 배우는 길이 열렸다. 물론, 등록금 반환 요구 등을 겪은 대학으로서는 사정이 허락한다면 ‘대면수업’부터 권고할 수 있겠지만, 학생들의 셈법도 간단치는 않다. 원격수업의 질 운운하며 등록금을 돌려달라더니, 교양과목은 오히려 온라인수업을 선호한다니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가르치는 쪽도 그렇다. 처음에는 당황의 연속이었다. 컴맹인 분들은 더했고, 강의 녹화법과 실시간 화상수업 기술을 배우느라 진땀깨나 흘렸다. 강의 준비 시간이 몇 배나 든다고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학기가 끝나갈 즈음 다른 목소리도 들린다. 라이브 강의에 필요한 기술도 시행착오를 거치며 거의 터득했고, 연구실에 편하게 앉아서 강의하니 나쁘지 않다. 카메라에 혼잣말하는 면벽 수도승의 느낌을 넘어 장점이 눈에 보인다. 대세가 온라인이라는데, 그 대열에 들어선 느낌도 나쁘지 않다. 

대학에서 온라인 원격수업의 보편화는 양날의 검이다. 대학별 강의의 특권적 성격이 약화되고 교육 기회가 확대되며 교육의 양과 질이 보편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국내 대학과 대학교육이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온라인 강의 시스템이 구축되고 인터넷망으로 연결된 이상, 해외 명문대학이 세계적인 석학의 온라인 강의를 앞세워 치고 들어올 수도 있을 것이다. 대면 실험이나 실습이 필요하지 않은 인문학이 더 타격을 받으리라는 진단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대학의 장기적 비용 절감과 수업의 편의성이라는 유혹과 매력을 무시하기 어렵다. 카페에서나 침대에서 온라인 수업을 누리는 학생들은 이미 ‘뉴노멀’에 가깝다. 물리적 제약이 적으니 편의성이 뛰어나고, 강의에 유용한 관련 ‘기술’도 계속해서 발전할 것이다.

사실, 코로나19의 폭발 속에 대면수업이 불가능해지자 대학이 맨 먼저 발 벗고 나선 부분도 ‘기술적인 시스템’ 구축이었다. 처음엔 혼선과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동분서주한 결과 화상 라이브 강의 시스템은 결국 정착되었다. 대학으로서는 우선순위가 분명했겠지만 이 과정에서 차별이 존재했다. 무엇보다 강의실이 사라진 비전임 교수와 학생들은 최신 기기든 수업공간이든 알아서 각자도생해야 했다. 이런 상황은 온라인 강의라는 새로운 시스템의 구축 및 운용과 관련해서 차후로도 반드시 짚어야 할 부분을 보여준다. 

여하튼 대학들은 다음 학기도 온라인 강의를 영위할 시스템을 탄탄히 갖추기 시작했다. 교육부가 온라인 강의 비율의 제한을 대학 자율로 파격 완화함으로써 추진력도 달았다. 그렇지만 기술적・구조적 문제가 다 해결된다 해도 ‘대학에서 온라인 강의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번 학기 강의를 온라인으로 하며 처음 느낀 점은 ‘낯섦’이었다. 기술적 어려움도 있었지만, 얼굴도 마주하지 않고 컴퓨터 화면에다 얘기하는 것이 참으로 어색했다. 다양한 소통과 피드백을 시도해보았지만 피상적이었다. 학생들 숫자가 많은 과목은 그런 구색조차 맞추기 어려웠다. 일 방향적이고 그래서 일방적인 강의로 흘러가며 계속 낯설고 소외감을 느꼈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세상’이 아니었다. 강의 도중 학생들의 반응과 호응, 눈빛과 표정을 보며 즉흥적으로 분위기를 바꾸거나 때론 썰렁한 농담으로 주위를 환기시키는 일도 시도하기 어려웠다. 적응의 문제가 아니었다. 온라인 강의를 위한 기술을 습득하고 강의에 전혀 문제가 없는 상황이 지속되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지식만 전달하는 온라인 창고로 굳어질 소지가 큰 ‘낯선 세상’이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코로나19 이전부터 대학들이 간간이 영위한 온라인 강의들이 얼마나 문제였는지가 생생히 드러났고, 순전히 경비 절감의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이 더 명백해졌다. 또한 소수의 인원이 참여한다면 모를까 현실 온라인 강의는 피드백이나 토론 같이 기존 강의의 질을 높이는 방향에 역행하는 점도 분명해졌다. 마찬가지로 석학이나 유명인사의 온라인 강의만으로는 대학 강의를 대체할 수 없다. 사실 그런 류의 ‘명강의’는 더더욱 일 방향적인 배움이다. 지금도 유튜브에는 유명 강연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런 강의는 본질상 혼자 하는 명저 읽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떤 공간 속에서 눈빛과 호흡을 주고받는 소통과 교류의 장으로서의 강의와는 다른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면 강의는 정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 학기 동안 점점 무르익어 가는 ‘관계 맺기’의 과정이기도 하다. 첫 시간의 다소 쑥스러운 인사에서부터 시작해, 배움을 매개로 한 소통과 교류를 통해 차츰 쌓여가는 친밀과 신뢰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얼굴을 보고 숨소리를 들으며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며 맺어가는 관계가 강의라면, 온라인 수업은 그런 세계를 벗어나는 일이다. 편리함을 얻지만, 감정과 느낌이 묻어나는 참 공부의 본령을 앗아가는 일인 것이다. 코로나19의 시대, 이 예외적인 위기의 시대에 피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온라인 강의에 알게 모르게 젖어가는 우리를 다시금 돌아봐야 한다. 살아 숨 쉬며 부대끼는 소통과 배움이야말로 ‘호모 아카데미쿠스’라는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삶으로 아는 세상, 인간이 더불어 사는 세상이므로.


정대성 부산대·서양현대사

현재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있으며, 독일 빌레펠트대학에서 68혁명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를린자유대학과 훔볼트대학 등에서 수학하며 여러 신문에 통신원으로 글을 썼다. 68혁명을 비롯한 서양현대사의 여러 쟁점을 연구하고 있으며, 고전과 문학, 영화와 음악을 아우르며 역사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공부와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는 독일에서 출간된 『Der Kampf gegen das Presse-Imperium: Die Anti-Springer-Kampagne der 68er-Bewegung(언론제국에 맞선 투쟁: 68운동의 반슈프링어 캠페인)』을 비롯해 『68혁명, 상상력이 빚은 저항의 역사』, 『철학, 혁명을 말하다: 68혁명 50주년』(공저), 『1968년: 저항과 체제 비판의 역동성』(공저)이, 역서로는 『68운동: 독일, 서유럽, 미국』과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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