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목들 사이 드러난 벼랑처럼 가파른 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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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목들 사이 드러난 벼랑처럼 가파른 협곡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0.07.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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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이야기]_충북 단양 충주호 장회나루

물결이 인다. 떠났던 배가 돌아온다. 그 뒤로 풍요로운 푸르름이 모든 부를 끌어 모아 일어서 있다. 이제 막 호흡을 배운 사람처럼 성급하게 훅훅 대며 새로운 공기를 마시고 싶다는 욕구를 게걸스럽게 채운다. 충주호는 크다. 충주, 제천, 단양 세 개의 고을에 걸쳐있다. 보통 내륙의 바다라 불리지만 여기 단양의 장회나루에서 바라보는 충주호는 협곡에 가깝다. 푸른 수목들 사이로 강철 같은 벼랑이 드러나 있고 구름은 벗어던진 왕관처럼 자유롭다. 호수는 제 머리위의 세계와 제 발밑 세계 사이를 젊은 낯빛으로 떠돌지만 표류하는 법이 없다. 이들을 단련시키는 상쾌한 바람 위로 태양의 열기가 뒤덮는다. 그들의 장엄한 건강 앞에서 나의 성급한 호흡은 회복하는 능력을 배운다. 

▲ 단양 장회나루. 옛날부터 구담봉과 옥순봉을 보기 위해 배를 띄우던 곳이다.
▲ 장회나루. 뒤쪽으로 펼쳐진 것이 제비봉이다.

나루로 향하는 길은 벼랑처럼 가파르다. “천천히 내려오세요. 천천히. 물이 많이 낮지요.” 호숫가 산들은 허연 배를 슬쩍 보여주고 있다. 충주호의 평상수위는 해발 140m정도지만 지금은 그보다 낮다. “2층과 3층이 좋아요.” 3층 갑판에 올라 출항을 기다린다. 나루터 맞은편 물가에 바위가 보인다. 강선대다. 대부분은 충주호 물에 잠겼고 지금은 윗부분만 조금 드러나 있다. 그 옆에 무덤 하나가 가물가물하다. 단양의 기녀 두향의 묘라 한다. 퇴계 이황은 1548년 48세 때 단양군수로 부임했다. 당시 그는 좀 불행했다. 부인이 세상을 뜨고 아들이 요절했으며 친형을 을사사화로 잃은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두향을 만났다. 18세의 두향은 아름다웠고, 거문고와 시문에 뛰어났으며, 매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때때로 두향은 퇴계와 함께 강선대에 올라 거문고를 탔다고 한다. 퇴계에게 두향은 위로였다. 안내방송이 시작된다. 출항이다. 딱딱한 땅을 오래 걷느라 고단하던 무릎은 물의 부드러운 흐름에 흔들리면서 완벽하게 행복해진다.

▲ 출항. 구담봉과 말목산 암벽 사이를 가르며 나아간다.
▲ 장회나루 앞으로 유람선이 귀항 중이다.

“에- 지금 왼편으로 보이는 것은 단양 8경 중 하나인 구담봉(龜潭峰)으로써...” 구담은 물속에 비친 바위가 거북 형태를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예부터 수많은 학자와 시인묵객이 그 절경을 찬미했는데 특히 퇴계는 ‘중국의 소상팔경이 이보다 나을 수는 없을 것’이라 극찬했다. 배는 흰 포말을 일으키며 구담봉을 거침없이 휘감고 달려 나간다. “에- 지금 보이는 것은 옥순봉(玉筍峰)으로..” 옥순은 비 갠 후 여러 개의 푸른 봉우리가 죽순처럼 솟았다는 뜻이다. 제천 땅에 속해있지만 제천 10경뿐 아니라 단양 8경에도 포함된다. 옛날부터 구담봉과 옥순봉을 보기 위해 배를 띄우던 곳이 단양의 장회나루다. 장회의 물길은 남한강 줄기에서도 급류가 심한 곳이라 노를 저어도 배가 잘 나아가지 않아 무진 애를 먹었지만 동력선은 힘이 세다. 

▲ 구담봉. 단양 8경중 하나로 물속에 비친 바위가 거북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 구담봉. 단양 8경중 하나로 물속에 비친 바위가 거북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 옥순봉. 비 갠 후 푸른 봉우리가 죽순처럼 솟았다는 뜻이다. 제천 10경이자 단양 8경이다.
▲ 옥순봉. 비 갠 후 푸른 봉우리가 죽순처럼 솟았다는 뜻이다. 제천 10경이자 단양 8경이다.

장회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영조 때 충북 음성에는 조륵이라는 구두쇠가 살았는데, 어느 날 장독에 앉은 파리가 장을 묻혀 달아나자 여기까지 쫓아왔단다. 물길 너머로 날아가는 파리를 망연히 바라보며 그는 ‘장이다, 장이 날아간다’고 외쳤다. 내 마음이 다 안타깝다. 조륵은 평생 구두쇠로 돈을 모았지만 나중에는 모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썼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나라에서는 그의 착한 행적을 기려 자인비(慈仁碑)를 세워 주었다. 자애롭고 인자한 사람이란 뜻이다. 자인비는 자린비가 되고, 시간이 흘러 오래된 비석에 옛 고(古)자가 붙었다. 자린고비다. 사람들은 그가 외치던 ‘장’이라는 말에서 이 지역을 ‘장회’라 불렀다고 한다.

▲ 충주호로 고향을 잃은 사람은 4만 여명. 지금은 충주호에 기대 사는 어부가 있다.
▲ 정오가 가까워 오자 어부의 배가 달린다.

옥순봉을 지나면서 제천 땅에 든다. 제천 땅에서 호수는 본격적으로 광대해진다. 뱃머리에 서서, 거대하고 푸른 세계를 잔뜩 껴안고 나아간다. 검은 새가 물수제비처럼 수면을 달리고, 어부가 물로부터 일용할 양식을 얻는 곳. 옛적엔 마을이고, 광장이고, 길이던 자리에 물이 들어찼고 약 4만여 명이 고향을 잃었다. 호수로 가슴을 열고 있는 기슭들을 지난다. 호숫가에는 숲이 무성한 언덕들, 호수를 바라보는 테라스를 가진 몇몇 집들, 물고기를 기다리는 낚싯대들이 있다. 어부의 배가 정오의 귀가를 위해 달린다. 바람에 귀는 먹먹해지고, 태양빛에 정수리와 어깨는 뜨겁게 단다. 배가 언덕으로 난 길 앞에 멈추자 배 주위로 새들이 모여든다. “곧 청풍나루에 도착합니다. 나루 위는 청풍문화재단지입니다. 충주호 건설 때 수몰될 것을 산 위로 이전한 것이지요.” 뱃머리를 떠나 조타실 옆 한 뼘 그늘에 선다. 붕. 부웅-. 배는 두 번의 기적을 울리며 청풍나루에 도착한다.

▲ 배가 언덕으로 난 길 앞에 멈추자 배 주위로 새들이 모여든다.
▲ 제천의 청풍나루. 산꼭대기 일대에 청풍문화재단지가 들어서 있다.
▲ 장회나루 전망대. 퇴계와 두향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10여분 뒤 장회나루로 돌아가는 뱃길은 고요하다. 옥순봉과 구담봉을 지나자 장회나루가 보인다. 나루 뒤편으로 제비봉이 우뚝하고, 물길 따라 말목산, 멀리 소백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 제 / 어느덧 술이 다하고 임마저 가는구나 /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두향이 퇴계와 이별할 때 쓴 시로 알려져 있다. 퇴계는 부임한지 9개월 만에 풍기군수로 떠났다. 퇴계가 떠나던 날 두향은 매화 화분 하나를 이별의 정표로 보냈다. 이후 두향은 관기 생활을 정리하고 강선대에 초막을 짓고 퇴계를 그리워하며 여생을 보냈다. 20여년이 지나 임종을 맞은 퇴계의 마지막 말은 ‘저 매화분에 물을 주어라’였다. 퇴계의 타계 이후 두향은 강선대에 올라 거문고로 초혼가를 탄 후 자결했다고도 하고 앉은 채로 숨을 딱 멈춰버렸다고도 한다. 그리고 유언대로 강선대 옆에 묻혔다. 그때부터 단양 기생들은 강선대에 오를 때마다 반드시 두향의 무덤에 술 한 잔을 올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지 이야기다. 퇴계와 두향이 동시대를 살았다는 증거조차 없다. 북소리가 들리는 심장을 단검으로 찢는 듯한 느낌이지만, 진실은 언제나 옳다. 장회나루 가파른 길을 오르다 돌아본다. 술 한 잔 없는 유람이었지만 어떠랴, 기약 없는 소상팔경 유람이 오늘만 하겠는가.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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