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논문과 평론, 어느 것이 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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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논문과 평론, 어느 것이 나을까?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0.07.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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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에세이]

대학교수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마음에 안 드는 점이 많았다. 그래도 다른 직업에 비해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우니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독립선언서 서명 숫자인 서른 세 해를 버텼다. 마음에 안 드는 것 중 하나가 논문 심사 받는 것이었다. 돼먹지 않은 소리들을 늘어놓으면서 되느니 안 되느니... 나이를 좀 먹어 꼰대가 되다 보니 새파란 놈들한테 능욕 당한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경우 하나같이 그 심사평에 동의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낭패였다. 대학 교수가 하는 일이 그런 것이니 논문을 발표하지 않을 수도 없고, 한시바삐 이 광대 짓을 벗어나야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 논문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가 들기도 했다. 일단 논문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 한 번 보자. 먼저, 논문은 따진다. 각주 형식이 어떻고 참고문헌이 어떻고...논리 전개가 저떻고, 개념 규정이 어떻고, 기존 연구 동향 검토가 저떻고... 다 따져야 옳다. 어떤 주장을 하려면 이를 세세하게 논증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사람이 이미 말한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 다 찾아봐야 한다. (그래야 한다는 거지 안 그런 논문도 많다.)
 
그런 다음 학술지에 기고하면 심사에 들어간다. 심사자 중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사람이 많다. 악의적인 소리도 많다. 자기 논문 심사 과정에서 당한 화풀이를 하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거나 다른 학파(라기보다는 학계 패거리)에 속하면 여지없다. 어쨌든 수정 없이 단번에 통과되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 심사 과정에서 논문을 가다듬다 보면 조금씩 나아진다. 그 과정은 무척 고매하고 높은 수준의 지적 작업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고구마를 씻고 갈고 닦는다고 고구마가 아니게 되는가?
 
따지고 따지는 것은 얼핏 보아 지적 수준을 높이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 창의력을 죽이기도 한다. 창의적인 논문은 통과 안 될 가능성이 크다. 남이 예전에 하지 않은 말은 감히 하지 못한다. 지배적인 담론을 거스르는 말을 했다가는 여기서 칼 맞고 저기서 총 맞는다. 한 마디로 갈고 닦는데 정성을 기울이느라고 진정 무엇을 갈고 닦는지는 뒷전이다. 뻔한 소리에 각주 달고 어려운 말로 치장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학자는 창의적이기보다는 쫀쫀해야 대우 받는다. 수많은 정치학 논문들 중에서 한국 정치 발전에 정말로 기여한 논문이 얼마나 있을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논문들이 대부분이다. 수십 년의 한국 정치학사에서 학문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논문이나 저서가 무엇이 있는가? 없다. 물론 내 것은 빼고 말이다. 흐흐. 한 마디로, 깨끗하게 갈고 닦은 고구마들이다. 쫀쫀한 고구마들이다. 아니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갈고 닦기도 허접한 것들이 수없이 많다.
 
그래도 교수들은 논문을 써야 한다. 승진하고 재임용되고 월급 받아야 하니까. 그리고 이름을 알려야 하고 학계 패거리를 유지해야 하니까... 욕할 것도 없고 부러워할 것도 없다. 그냥 그런 삶이 있는 것이고, 그렇게 세상은 돌아간다.
 
교수 업적에서 논문 점수가 가장 중요한데 이 또한 잘못된 일이다. 대학은 연구 기관 이상으로 교육 기관이므로 교육 점수의 비중이 더 높아져야 하는데, 문제는 이를 계량화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손쉬운 방법으로 논문 점수에 가중치를 부여한다. 대학이 교수에게 논문 많이 쓰라고 독려하는 것 역시 점수 때문이다. 점수가 높아야 대학 순위가 올라가고 그래야 정부 지원도 많이 받기 때문이다. 모든 게 돈이다. 명예도 물론 조금 있다. 그러면 논문을 어떻게 많이 쓰게 만들까? 논문 당 돈을 많이 주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어차피 별 필요 없는 논문들이니까 돈 안 받으면 쓰기 싫다. 승진이나 재임용이 걸리지 않으면 더더구나 그렇다. (이건 정치학 중심의 얘기니까 안 그렇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으리라 본다.)
 
학술 논문에 비하여 평론은 덜 쫀쫀한 대신 글재주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는 평론을 못 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서 그까짓 평론은 수준이 낮아서 안 쓴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신 포도는 딸 필요가 없는 것이다. 평론은 쫀쫀하게 따지고 따지기보다 비교적 제 생각을 자유로이 늘어놓는다. 그래서 창의성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말이지, 실제로 창의적인 평론이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나오는지 의문이다.
 
또 평론은 깊이 따지기보다는 제 생각을 자유로이 늘어놓기 때문에 학술논문보다 시류에 더 민감하다. 평론가들은 인기에 영합하려는 경향이 학자보다 더 클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학자들에게는, 주로 교수니까, 정해진 월급이 들어가지만, 평론가에게는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큰 차이는 학술 논문에는 연구비가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연구비를 잘 받기 위해 위에서 말한 대로 안전한 길을 택한다. 학자로 살아남는 데에는 창의성보다 기존 질서에 대한 충성이 더 중요하다. 
 
그 반면 평론은 튀는 것이 더 이익일 수 있다. 독자의 이목을 끌어야 하고 상업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제목도 마구 이상하게 붙인다. 그렇다고 평론이 잘 팔린다는 보장은 없다. 거기에도 권위가 있다. 공자, 노자 이런 거 쓰면 기본은 보장된다. 시류에 맞게 "정의란 무엇이 아닌가" 이런 거 써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한마디로 얄팍하다. 얄팍하지 않고 묵직한 평론도 쓸 수 있겠지만 그러면 잘 안 팔린다. 심사 통과되지 않는 학술 논문과 비슷한 운명에 처한다. 그래서 평론은 시류에 영합하고 얄팍하게, 그리고 글재주 있게 써야 한다. 그러다 운 좋으면 상당한 명예와 약간의 부를 거머쥘 수도 있다. 쫀쫀한 논문과 얄팍한 평론. 제3의 길은 없을까?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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