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도 통섭을 통한 중국 불교의 귀숙(歸宿), 『육조단경(六祖壇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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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불도 통섭을 통한 중국 불교의 귀숙(歸宿), 『육조단경(六祖壇經)』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7.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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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8강>_ 원광대학교 김진무 박사의 「유불도 통섭을 통한 중국 불교의 귀숙(歸宿), <육조단경>」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8강 김진무 박사(원광대 강사)의 강연을 발췌·요약해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김진무 박사는 불성(佛性)을 “궁극적이고, 일반적인 인성ㆍ심성을 초월한 것으로 설정”하는 대신 “우리가 만나는 일반적인 사람들 그대로의 인성과 심성의 각도로부터” 논함으로써 가히 ‘혁명’이라 할 불교의 변화를 낳은 저술인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대해서 그 사상적 특질과 의의를 소개한다. 즉 불교 “종파들의 가장 분명한 사상적 차별”이 “불성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구분된다”고 할 때 『육조단경』은 ‘명심견성(明心見性)’으로 ‘불성’을 이해함에 따라 “선종 성립의 표지”가 되었다고 말한다. 결국 『육조단경』이란 “기본적으로 불성과 반야(般若)의 철저한 화해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그 최종적인 결론”은 ‘돈오(頓悟)’로 이어지는데, 이는 ‘유불도 삼교의 사상적 통섭’을 거친 불교의 중국화를 상징한다고 이야기한다.

▲ 지난 6월 27일, 김진무 박사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8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6월 27일, 김진무 박사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8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서언

인도에서 발원(發源)하고 서역(西域)에서 발전한 불교가 문화적 습속이 다른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 중국 본토의 사상과 문화와의 충돌과 융합 과정을 통하여 중국적 변용을 이루기 시작하며, 최종적으로는 본래의 인도 불교와는 상당한 차별상을 보이는 중국적 변용에 성공한다. 이러한 중국적 변용의 대표적인 저술이 바로 『육조단경』(이하 『단경』)이라고 할 수 있어 흔히 불교가 중국화를 이룬 표지(標識)라고 말한다. 『단경』의 ‘단(壇)’은 이른바 ‘제단(祭壇)’으로부터 다양한 의미가 확장될 수 있지만, 불교적 의미로는 ‘계단(戒壇)’의 의미를 갖는다. 또한 ‘경(經)’은 이른바 ‘부처님의 말씀[佛語]’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의미를 확장시키면, 인도로부터 발생하여 전래된 불교가 드디어 중국인으로서의 ‘불(佛)’이 나타나 수계(受戒)를 주며, 새로운 교의(敎義) 체계로서 민중을 제도한다는 의도가 책의 제목에 담겨 있는 것이다.

『단경』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상당히 중요한 전적이며, 또한 역사적으로 중대한 사상적 작용을 해왔다. 흔히 중국 학계에서는 『단경』을 ‘육조혁명(六祖革命)’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선종 이전의 기타 종파에서 ‘불성’을 보다 궁극적이고, 일반적인 인성ㆍ심성을 초월한 것으로 설정한 것과는 달리 『단경』에서는 우리가 만나는 일반적인 사람들 그대로의 인성과 심성의 각도로부터 ‘불성’을 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은 바로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을 분기시키는 작용을 하고, 그에 따라 『단경』은 조사선의 ‘종전(宗典)’으로 평가받게 된다.

2. 『육조단경』의 사상적 특질

1) 『단경』의 편자와 판본

현재 전해지는 『단경』의 판본은 대체로 20여 종이 넘게 있지만,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4종이 가장 대표적이다.

⑴ 돈황본(敦煌本): 온전한 제목은 『남종돈교최상대승마하반야바라밀경육조혜능대사어소주대범사시법단경(南宗頓敎最上大乘摩訶般若波羅蜜經六祖惠能大師於韶州大梵寺施法壇經)』이다. 근대에 돈황(敦煌)에서 발견되었다.

⑵ 혜흔본(惠昕本): 『육조단경(六祖壇經)』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며, 서문(序文)에 당말(唐末) 혹은 송초(宋初)에 활동한 승려 혜흔(惠昕)이 편찬한 내용이 쓰여 있어 ‘혜흔본’이라고 한다.

⑶ 설숭본(契嵩本): 온전한 제목은 『육조대사법보단경조계원본(六祖大師法寶壇經曹溪原本)』으로 이 판본은 대략 1056년에 완성되었으며, 송대(宋代) 유명한 고승 설숭(契嵩)이 편찬하였다.

⑷ 종보본(宗寶本): 제목은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이며, 이 판본은 원(元) 세조(世祖) 28년(1291)에 종보(宗寶) 선사에 의해 완성되었다.

『단경』과 관련한 저자와 편자의 문제는 상당히 복잡하며, 이는 선종사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다양한 판본에 있어서 자구(字句)의 출입에 따라 세세한 부분에 대한 사상은 어느 정도 차이가 나타나지만, 핵심적인 사상, 즉 ‘불성’과 ‘돈오’, ‘정혜등학’, ‘무념(無念)ㆍ무상(無相)ㆍ무주(無住)’의 삼무(三無)와 관련된 사상에 있어서는 거의 모든 판본에 있어서 일치한다.

2) 불성론(佛性論)과 돈오(頓悟)

‘불성(佛性)’과 ‘반야(般若)’는 중국 불교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수많은 학파와 종파들이 명멸하지만, 최종적으로 사상적으로 천태종(天台宗)과 화엄종(華嚴宗), 선종(禪宗)이 가장 대표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종파들의 가장 분명한 사상적 차별은 바로 ‘불성’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천태종에서는 ‘성구론(性具論)’, 화엄종에서는 ‘성기론(性起論)’, 선종에서는 ‘명심견성(明心見性)’으로 ‘불성’에 대한 이해를 나눌 수 있다. 그 가운데 선종에서는 바로 『단경』으로부터 ‘명심견성’의 기치가 세워졌다고 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단경』을 선종 성립의 표지라고 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경』에서는 ‘불성’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단경』에서는 ‘불(佛)’을 ‘자성(自性)’으로 설정하고, 또한 ‘자기의 마음[自心]’을 ‘불성(佛性)’으로 등치(等値)하고 있으며, 나아가 점차 ‘인간의 성품’과 ‘세상 사람들의 성품’으로 확대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선종(禪宗)에서 ‘자성’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바로 신회(神會) 선사이다. 그는 ‘견불성(見佛性)’을 제창하면서 그를 다시 직접적으로 ‘자성’이라는 용어로 귀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는 제법(諸法)에 ‘자성’이 없음을 여실하게 보는 지혜라는 ‘반야(般若)’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러나 이는 실상론(實相論)으로부터 출발하여 본다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논리이다. 불교에서는 간혹 그 역의 논리가 성립하는데, 반야에서 ‘자성’을 부정하는 것은 바로 이 세계는 모두 ‘연기(緣起)된 상태’이기 때문에 독자적 존재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역으로 말하여 ‘자성’이 ‘비어 있음[空]’을 강조하여 ‘자성’을 찾으라는 논리가 또한 성립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단경』에서는 바로 ‘자성반야(自性般若)’를 특히 강조하고 있다.

『단경』에서는 이렇게 ‘불성’을 ‘자심’과 ‘자성’ 등으로 귀결시키고, 그에 대한 깨달음인 ‘돈오(頓悟)’에 대한 설명들이 나타난다. 본래 정교(政敎)에는 돈(頓)ㆍ점(漸)의 구분이 없으며, 다만 인성에 이(利)ㆍ둔(鈍)이 있을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점수(漸修)하며, 깨달은 사람은 돈수(頓修)한다. 만약 스스로 본심을 깨달아 스스로의 본성을 본다면, 바로 차별이 없을 것이다.

본래 불법과 ‘깨달음[悟]’에는 ‘돈ㆍ점’이 없지만, 사람에는 ‘예리함[利]ㆍ둔함[鈍]’이 있어 ‘돈ㆍ점’이 나타남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점수’하며 깨달은 사람은 ‘돈수’한다는 말로부터 본다면, ‘점수’보다는 ‘돈오’를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돈오’의 강조는 사실상 ‘불성’과 ‘반야’의 관계성을 통하여 도출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단경』에서는 도입으로부터 철저하게 ‘반야’에 입각하여 설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하는데, 최종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반야삼매(般若三昧)’로 귀결시키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지혜로써 관조하면 안과 밖을 밝게 통하여 비춤으로써 자기의 본심을 깨달을 수 있다. 만약 자기의 본심을 깨달으면 바로 해탈하는 것이고, 해탈하면 바로 ‘반야삼매’라고 할 수 있다. ‘반야삼매’는 바로 ‘무념’이다. ‘무념’이란 무엇인가? 만약 일체법(一切法)을 보면서 마음에 집착하거나 오염되지 않는다면 ‘무념’이라 한다. 모든 곳에 두루 미쳐 있으나 모든 곳에 집착하지 않아 다만 본심이 청정하여, 육식(六識)이 육문(六門)에서 벗어나게 되며, 육진(六塵)에 물들지도 집착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반야삼매’이고, 자재해탈(自在解脫)이며, 이를 무념행(無念行)이라 한다. 만약 모든 사물에 헤아리고 떠올림이 없다면 생각[念]을 끊은 것이 되고, 그렇다면 이는 바로 법박(法縛)이며 변견(邊見)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분명하게 『단경』은 기본적으로 불성과 반야의 철저한 화해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또한 그 최종적인 결론은 바로 ‘돈오’임을 알 수 있다.

3) 정혜등학(定慧等學)

『단경』에서 ‘돈오’를 중시하고 있음은 바로 이른바 ‘정혜등학’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불교에서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가장 강조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정혜’는 수행에 있어서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단경』은 다음과 같이 ‘정혜’를 규정하고 있다.

나의 이 법문은 정혜(定慧)를 근본으로 한다. 대중들은 미혹하여 정(定)과 혜(慧)가 다르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정’과 ‘혜’는 하나의 체(體)로서 둘이 아닌 것이다. ‘정’은 ‘혜’의 체(體)이고, ‘혜’는 ‘정’의 용(用)이다. ‘혜’에 나아갈 때 ‘정’이 ‘혜’ 가운데에 있으며, ‘정’에 나아갈 때 ‘혜’는 ‘정’ 가운데에 있다. 만약 이 뜻을 깨닫는다면, ‘정’과 ‘혜’를 평등하게 배우는 것[定慧等學]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정’이 먼저 있어 그 후에 ‘혜’가 발휘된다거나 혹은 먼저 ‘혜’가 발휘된 후에 ‘정’이 나타나니 각각 다르다.”라고 말하지 말라. 이러한 견해를 갖는다면 법에 바로 두 가지 ‘상(相)’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돈오’를 최초로 제창한 도생(道生)은 “돈(頓)이라 하는 것은, 이치를 나눌 수 없음[理不可分]을 밝힌 것이고, ‘오(悟)’는 지극히 비춤[極照]을 말한다. 불이(不二)의 깨달음으로 나눌 수 없는 이치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치[理]와 지혜[智]가 함께 아우러짐을 돈오라고 한다.”라고 개념적 정의를 내린다. “이치[理]와 지혜[智]가 함께 아우러짐[理智兼釋]”은 바로 “이(理)”(즉 대상[所], 境)와 “지(智)”(즉 주체[能], 根)가 ‘희석’되어 하나가 된 상태로 우주법계가 ‘무이(無二)’의 상태에 이른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만약 ‘선정발혜(先定發慧)’ㆍ‘선혜발정(先慧發定)’을 주장한다면, 정ㆍ혜가 각별(各別)하다는 입장이 되는 것이고, “이러한 견해를 갖는다면 법에 바로 두 가지 ‘상(相)’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돈오’의 입장과는 정면으로 모순된다. 따라서 『단경』에서는 ‘돈오’에 입각하여 ‘정혜등학’을 표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무념(無念)ㆍ무상(無相)ㆍ무주(無住)

『단경』에서 ‘불성’과 ‘반야’를 논하고, 또한 ‘돈오’를 중시하여 ‘정혜등학’을 세웠다면, 그에 대한 수행론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수행론은 바로 『단경』에서 ‘법요(法要)’로서 설하는 이른바 ‘삼무(三無)’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분명히 『단경』의 핵심적인 사상은 혜능 선사 선법의 ‘종ㆍ체ㆍ본’인 바로 무념ㆍ무상ㆍ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단경』에서는 우선, ‘무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념이란 생각함[念]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不念]이다.

‘무념’은 생각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생각함에 있어서”라는 것은 바로 생각이라는 작용을 긍정하고 있음을 말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대상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없다[無]는 것은 무엇이 없다는 것인가? 생각한다[念]는 것은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은 이상(二相)의 모든 번뇌에 끄달림을 떠난 것이고, 생각은 진여본성(眞如本性)을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즉, 진(眞)ㆍ속(俗)의 ‘이상’과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을 ‘없다’고 하며, 그를 모두 떠나 진여본성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단경』에서는 바로 이러한 무념을 통하여 ‘반야삼매(般若三昧)’를 깨닫는다고 설한다. 바로 무념을 통하여 반야삼매를 깨달을 수 있으며, 그러한 경계가 ‘자재해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단경』에서는 어리석은 중생들이 다시 무념까지도 집착할 것을 경계한다.

반야란 바로 제법에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성품[自性]이 비었음[空]을 여실하게 보는 지혜를 말한다. 하지만 그 지혜조차도 또한 그 자성은 비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끊임없는 공관(空觀)의 실천만이 남게 된다. 다시 말하여, 무념을 세운 까닭은 바로 유념(有念)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위한 것으로, 실제적으로는 무념까지도 ‘없게[無]’해야만 되는 것임을 말한다.

『단경』에서는 ‘무념’에 이어서 ‘무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상’이란 상(相)에 있어서 상을 떠난 것이다.

이로부터 무상은 무념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집착의 대상으로서의 ‘상(相)’을, 다른 하나는 ‘실상무상(實相無相)’으로서의 ‘상’, 즉 진여본성(眞如本性)을 말한다. 앞에서 무념의 설명에 인용했던 “없다[無]는 것은 무엇이 없다는 것인가? 생각한다[念]는 것은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은 이상(二相)의 모든 번뇌에 끄달림을 떠난 것이고, 생각은 진여본성(眞如本性)을 생각하는 것이다.”라는 것과 동일한 논리를 ‘무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에 따라 『단경』에서는 “다만 모든 상을 떠나는 것이 바로 무상이고, 다만 상을 떠날 수 있어야 성체(性體)가 청정(淸淨)하다. 이것이 바로 무상을 체로 삼는 것이다.”라고 설한다.

그다음으로 『단경』에서는 ‘무주’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주는 사람의 본성이 됨이다. 염념(念念)에 머물지 않고, 전념(前念)ㆍ금념(今念)ㆍ후념(後念)이 염념에 상속(相續)하여 단절이 없는 것이다. 만약 일념(一念)에 단절이 있다면, 법신(法身)은 곧 색신(色身)을 떠나게 된다. 염념 가운데 일체법에 머묾이 없다. 만약 일념이 머문다면, 염념이 바로 머묾으로, 계박(繫縛)이라고 부른다. 모든 법에서 염념이 머물지 않는다면, 바로 무박(無縛)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주를 본(本)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이다.

‘무주’는 ‘무념’ㆍ‘무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끊임없이 상속되어 발생하는 염념에 어떤 한 순간도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 역시 앞에서 반야공관에 따른 것이다. 『단경』에서 설하는 무념ㆍ무상ㆍ무주는 서로 커다란 차별이 없으며, 그 셋이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무념ㆍ무상ㆍ무주는 바로 『단경』에서 설하는 수행론이면서 한편으로는 궁극적인 경지라고 할 수도 있다.

『단경』의 사상적 특질은 바로 ‘불성’과 ‘반야’의 관계성을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마음으로 재구성했다는 데에 있다. 물론 그 가운데 ‘돈오’라고 하는 중요한 기제(機制)를 개입시키고 있는데, 여기에는 위진(魏晋)과 남북조(南北朝)의 교체기에 ‘불성’과 ‘반야’의 관계성으로부터 ‘돈오’를 도출한 도생(道生)의 작용이 절대적이었다. 사실상 『단경』의 ‘자성’과 ‘자심’으로서의 불성과 ‘정혜등학’, ‘무념ㆍ무상ㆍ무주’의 삼무, ‘무수무증’ 등은 모두 ‘돈오’라는 개념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지며, ‘무상계(無相戒)’와 ‘무상참회(無相懺悔)’ 등도 역시 ‘돈오’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단경』의 사상은 결국 지금 이 자리가 모두 진리라고 하는 ‘당하즉시(當下卽是)’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당하즉시’는 바로 ‘돈오’를 이룬 경지에서만 실현되는 경계(境界)이다. 이렇게 ‘당하즉시’가 논증된다면, 지금 이 자리는 바로 ‘극락정토(極樂淨土)’가 되니, 이러한 사유로부터 후기 조사선에서 ‘유심정토(唯心淨土)’가 출현하였다고 하겠다.

3. 유불도 통섭과 중국 불교의 귀숙

본 논문의 제목을 “유불도 통섭과 중국 불교의 귀숙, 『육조단경』”이라고 했는데, 과연 어떤 점으로부터 이러한 제목이 가능한 것인가?

이 점은 중국 불교의 전래 과정으로부터 논할 수 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서한(西漢) 무제(武帝)에 의하여 서역과의 교통로인 이른바 ‘실크로드’가 개척됨으로써 서역 상인들이 중국에 왕래하면서 자연스럽게 전래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황권(皇權)에 의하여 민중에 ‘이식(移植)’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선진(先秦) 시기로부터 형성된 중국인들의 방어 의식인 이하론(夷夏論)에 입각하여 오랑캐[夷]의 저급한 문화가 화하민족[夏]의 문화를 침범하지 않게 막는다는 ‘이하지방(夷夏之防)’의 의식(意識)이 외래 종교 사상인 불교를 받아들임에 결정적인 장벽으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권에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민중에 ‘이식’시키려고 한 것은 바로 통치 이념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하겠다.

중국 불교는 초기의 역경(譯經)에서부터 국가사업으로 보호를 받으며 서서히 중국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가 있었으니, 바로 ‘이하론’의 해결이었다. 초기 중국 불교인들은 불교 사상이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사상과 서로 융합할 수 있으며, 통치에 도움이 됨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결국 성공적이어서 남북조(南北朝) 시기에는 불교가 중국의 통치 이념과 사상계를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불조(佛祖)의 출신은 여전히 인도이고, 인도는 중국인들의 안목에 ‘화하(華夏)’에 속한 것은 분명 아닌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삼무일종(三武一宗)’의 폐불(廢佛)이 모두 ‘이하론’에 근거하여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단경』이 출현하고, 조사선이 중국 불교의 주류가 된 이후에는 ‘이하론’에 입각한 불교의 배척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송대(宋代)로부터 청말(淸末)에 이르기까지 유가의 ‘이학(理學)’이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면서 불교가 쇠퇴하였지만, 이른바 ‘멸불(滅佛)’의 사태는 더 이상 출현하지 않았다. 이러한 작용은 바로 『단경』에 이미 중국인으로서 ‘부처’가 출현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단경』에서 육조 혜능이 ‘부처’라는 말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육조의 법어를 모은 책을 ‘경(經)’이라고 칭명하였을 뿐이다.

『단경』의 특징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바로 ‘유불도 삼교의 사상적 통섭’이다.

앞에서 『단경』의 ‘불성론’은 다른 종파에서와 같이 속된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상위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늘 접하는 “세인(世人)”의 심성(心性)과 인성(人性)으로부터 자성(自性)을 논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유가, 특히 맹자(孟子)의 사상과 상당히 유사한 틀을 보이고 있다. 맹자는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자신’을 반성해보아 성실하면 즐거움이 더없이 크고, 힘써 너그럽게 행하면 인(仁)을 구하는 길이 더없이 가깝다.”라고 하여 이른바 ‘만물비아(萬物備我)’의 입장을 보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에 비추어 반성한다면, 즉 ‘반구제기(反求諸己)’한다면 ‘성현(聖賢)’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틀은 바로 제법의 담지체(擔持體)로서의 ‘자성’과 상당히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단경』에서 궁극적인 경지와 수행론으로 제시한 ‘무념ㆍ무상ㆍ무주’의 삼무는 바로 도가의 ‘무물(無物)ㆍ무정(無情)ㆍ무대(無待)’의 삼무와 상당히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도가, 특히 『장자(莊子)』에서는 “천지와 ‘나’는 함께 생겨났으며, 만물과 ‘나’는 하나가 된다.”라고 하여 우리의 존재는 본래 그대로 ‘도’와 합치되는 상태이기 때문에 ‘천지와 나는 함께 태어남’이요, ‘만물과 나는 하나가 됨’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물역(物役; 물의 부림)’과 ‘정루(情累; 정에 얽매임)’가 있어 그 ‘도’와 도치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본래 온전한 ‘도’를 회복하려면 ‘물을 잊고[忘物]’, ‘정을 잊으며[忘情]’, 도치된 ‘자신조차도 잊어야 한다[忘己]’라고 하였다. 이를 흔히 장자의 ‘삼망(三忘)’으로 말한다. 또한 이러한 ‘삼망’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망물’에 대하여 ‘무물(無物)’이고, ‘망정’에 대하여 ‘무정(無情)’이며, ‘망기’에 있어서는 마땅히 ‘무기(無己)’라고 하겠지만, 궁극적 경지를 실현한 ‘지인(至人)’은 어떠한 조건[待]도 필요치 않고 자연에 그대로 합치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무대(無待)’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장자의 ‘삼무’와 『단경』의 ‘삼무’는 그 형식에 있어서 매우 유사하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단경』에는 유가와 도가의 사유 양식이 교묘하게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형식 논리가 같을 뿐이지 결코 사상적 내용이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 유사성은 바로 유가와 도가에서 보다 쉽게 받아들이게 하는 효용성이 있음은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단경』의 유불도 삼교의 통섭은 중국 불교의 전래 초기로부터 진행된 유불도 삼교 관계를 총체적으로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단경』이 유불도 통섭의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4. 결어

『단경』의 사상을 논할 때, 전체적인 하나의 정체(整體)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중심에는 바로 ‘돈오’가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단경』은 하나의 이야기책으로 읽힐 정도로 흥미로운 고사들이 있으며, 나아가 상당히 교묘하게 편제되어 있다. 지금도 『단경』에서 제시하는 선사상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에는 주저함이 있다. 사실상 『단경』은 독자의 수준에 따라 나름대로 얻음이 있도록 편제되어 있다.

『단경』은 조사선뿐만 아니라 시(詩)를 포함한 문학(文學), 회화(繪畵), 서예(書藝), 심지어 정치, 사회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 등의 불교에 있어서도 깊고 폭넓은 영향을 미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단경』은 현재도 중국 지식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10대 고전(古典)’에 선정될 정도로 중국 전통의 문화와 사상을 가득 함유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마오쩌둥(毛澤東)은 항상 『단경』을 애독하여 각종 회의에서 자주 『단경』에 나타나는 구절을 인용하였으며, ‘노동 인민의 불경(佛經)’으로 극찬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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