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가르치는 데 평생을 바친 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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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가르치는 데 평생을 바친 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
  •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서양사
  • 승인 2020.07.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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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가 말하다_ 『비코 자서전: 지성사의 숨은 거인』 (잠바티스타 비코 지음, 조한욱 옮김, 교유서가, 272쪽, 2020.06)

이탈리아 사상가 잠바티스타 비코는 흔히 “시대를 앞서 태어난 고독한 천재”라고 불려왔다. 그 이유는 사상사의 계보에서 벽지로 알려져 있던 나폴리에서 계몽주의의 전성기인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그의 저작이 거의 잊혔다가 19세기에 들어서야 조금씩 조명을 받기 시작하더니 오늘날에는 수없이 많은 학문 분야에서 영감을 고취시키는 선구적인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학문 분야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학자들이 비코가 그들의 학문에 끼친 영향을 논문을 통해 밝히고 있다. 간략하게 그 학문 분야들을 개관만 하더라도 신화학, 언어학, 지식사회학, 구조주의 인류학, 사회이론, 마르크시즘, 법학, 경제학, 실용주의 철학, 교육학, 수학 등에 달한다. 더구나 그것은 비코의 지대한 영향을 오래전부터 밝혀 왔던 역사학이나 철학이나 특히 시에 관한 문학 이론 분야는 논외로 한 결과이다. 그뿐 아니라 비코에게 영향을 주었던 수많은 선현과 비코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학문적 시도도 일일이 손으로 꼽기 힘들 정도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호라티우스, 베르길리우스, 타키투스, 단테, 마키아벨리, 피치노, 피코, 베이컨, 데카르트, 스피노자, 보댕, 그로티우스, 푸펜도르프 등등 그 목록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서양지성사를 이루고 있다.

▲ 잠바티스타 비코.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 잠바티스타 비코.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러한 사실은 비코의 독서 방식에 관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해준다. 즉, 그렇듯 방대한 독서의 분량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책을 읽는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수동적으로 지식을 흡수하기만 하는 독서가가 아니었다. 그는 비판적인 독서를 통해 자신이 읽은 저자들의 사유 체계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을 논박하며 극복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들로부터 받아들일 것을 선별한 뒤 그런 점들을 종합하여 자신 고유의 정신세계를 만들어갔던 것이다. 당대의 명망 높은 철학자 칼로프레세가 고대의 에피쿠로스에 빗대 비코를 “스스로를 가르친 사람”(autodidascalo)이라고 불렀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였다.

『자서전』은 비코의 독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 고대로부터의 작가들의 책을 읽어가며 무엇을 그들로부터 배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그들과 노선을 달리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그 가르침들을 어떻게 연결시켰는지 그 과정에 대해 생생한 자의식을 갖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스스로를 가르친 사람”을 영어로는 “autodidact”라고 하는데, 여러 면으로 비코에게 큰 영감을 얻은 에드워드 사이드는 비코의 이러한 면모에도 감동받아 그것을 설명하는 뛰어난 논문을 썼던 것이다.

▲ 나폴리에 있는 비코의 생가 - 여기에서 "비코가 태어났다"고 밝히고 있는 패석
▲ 나폴리에 있는 비코의 생가 - 여기에서 "비코가 태어났다"고 밝히고 있는 패석

나는 비코 사상의 집약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을 원전으로부터 번역하여 작년 말에 출간한 바 있다(아카넷, 948쪽, 2019.11). 『비코 자서전』의 번역 과정을 생생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인들조차 읽기 어려워하는 『새로운 학문』의 번역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개하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서양학자들은 언어의 측면에서 기본적으로 서양학자들에 비해 뒤처진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을 갖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일찍부터 외국의 문물을 번역하며 받아들인 일본 학자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 우리가 일본인 학자들보다 몇십 년 뒤졌다는 이야기는 학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오가곤 했다.

그런데 『새로운 학문』의 원전 번역을 하면서 당연히 오래전에 일본어 중역으로 동문선에서 출간되었던 판본을 참고했다. 원래의 일역본은 교토 대학교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특히 조르다노 브루노의 철학을 전공한 시미즈 주니치와 교토 산업대학교에서 중세 이탈리아 문학과 크로체의 철학을 전공한 요네야마 요시아키가 공동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하지만 참고를 하면 할수록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속출했다. 오역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고 그것이 일본어 중역 과정의 잘못이라고 보이지는 않았다. 이후 나폴리의 학회에서 만나 존경심까지 가지며 교분을 쌓게 된 우에무라 타다오 도쿄 외국어대 명예교수가 새롭게 번역하여 보내준 번역본도 참조했다. 일본어를 모르기에 주변 분들에게 민폐를 끼쳐가며 도움을 얻었던 것이다. 그 새로운 번역에는 많은 잘못이 교정되었지만 여전히 내게는 오역으로 보이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물론 저의 해석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는 유효하다. 그렇지만 학자로서 나의 자존감이 살아나기 시작했고, 일본 학자들이 그렇게까지 오르지 못할 정도의 태산은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두 종의 영어 번역본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예일대학교의 로망스어 전공 명예교수였던 토머스 고다드 버긴과 일리노이대학교의 철학 전공 명예교수였던 맥스 해럴드 피쉬가 공동으로 1948년에 출간한 영어 번역본은 비코의 번역을 넘어 번역 자체의 전범으로 꼽히기까지 했는데, 그 책에서도 내게는 확실한 오류로 보이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999년 러트거스 대학교 이탈리아어과의 데이비드 마쉬 교수가 새로 출간한 영어 번역본도 읽기는 많이 편해졌지만 그러한 오류에서 확실하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영어 번역본만 읽었더라면 그 이해가 가지 않는 오류들조차 사실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골머리를 앓았을 일이다.

독일어 번역본의 경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제는 미국의 노트르담 대학교에 있는 철학자 비토리오 회슬레가 헤겔 연구의 권위자인 크리스토프 예르만과 함께 2009년에 공동으로 출간한 독일어 번역본의 경우에도 의미가 모호할 경우에는 버긴과 피쉬의 영역 번역을 본뜬 것처럼 보이는 부분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점차 자신감이 들면서, 비코의 『새로운 학문』의 원전 번역에 관한 한 나의 번역이 최신의 번역이니 모든 번역본 중에서 가장 오류가 적고 가장 충실한 최선의 책을 만들자는 의지가 발동하면서 번역 작업을 끝냈다.

그러한 열정이 『비코 자서전』의 번역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어는 물론 영어와 독일어와 일본어의 참조할 수 있는 모든 판본을 보며 충실하게 역주를 달았다. 독자는 물론 앞으로 비코를 연구할 분들을 위해서였다. 『새로운 학문』을 읽은 많은 분들이 독해의 어려움을 토로하곤 하였다. 나름대로는 기회가 닿는 대로 그 책의 의미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는 강연에 나가기도 했고, 개별적으로 소통하게 된 분들에게는 그 책을 읽는 방법이나 순서에 대해 조언도 했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더 본질적으로 비코의 생애와 사상을 알려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것이 『자서전』의 번역에 속도를 더하게 된 이유이다. 『자서전』을 읽는다면 비코가 어떻게 『새로운 학문』이라는 대작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 물론 출판에 얽혀있는 비사까지도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자의 개인적인 주변 환경이나 성장 과정에 더해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어느 정도 알게 된다면 『새로운 학문』의 의미나 중요성이 다소나마 친밀하게 다가오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비코가 줄리아의 가정교사로 9년을 보냈던 바톨라에 있는 성의 모습
▲ 비코가 줄리아의 가정교사로 9년을 보냈던 바톨라에 있는 성의 모습

부록으로 달은 시 「절망한 자의 사랑」을 통해서는 세계의 비코 학계에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 시는 이탈리아에서도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질에 관하여』에 나타나는 에피쿠로스 철학을 반영한 작품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한다. 비코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높이 받아들인 적이 결코 없다. 그런데 그 철학을 위해 장편의 시를 썼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본다. 오히려 그 시에는 영주의 딸 줄리아와 25세 청년 비코의 슬픈 연정이 반영되었다고 본다. 신분의 차이 때문에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슬픈 사연이다. 게다가 비코는 같은 신분의 귀족과 결혼한 줄리아의 결혼식에 영주의 종신으로서 축시까지 써서 헌정해야 했기에 더 슬픈 이야기이다. 하지만 요즘의 이탈리아 지방 자치단체에서 상업과 관광의 번영을 위해 그 슬픈 이야기를 이용하듯 단지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주 넓은 의미에서 비코가 완성시킨 민중 중심의 역사관의 밑그림이 되었다고 보기에 그 시를 『자서전』에 부록으로 추가한 것이다.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서양사

▲ 2005년 나폴리대학교에서 열렸던 국제 비코 학술대회 "비코와 동양"의 발표장 앞
▲ 2005년 나폴리대학교에서 열렸던 국제 비코 학술대회 "비코와 동양"의 발표장 앞

서강대학교 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텍사스주립대학교에서 「미슐레의 비코를 위하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로 문화사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주로 문화사와 관련된 책을 옮기고 집필했다. 문화사를 대표하는 역사학자지만 본질적으로는 비코 연구자라고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다. 옮긴 책은 비코의 『새로운 학문』, 피터 게이의 『바이마르 문화』, 린 헌트가 편저한 『문화로 본 새로운 역사』, 피터 버크의 『문화사란 무엇인가?』 외 다수가 있으며, 쓴 책으로는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 『서양 지성과의 만남』, 『역사에 비친 우리의 초상』, 『내 곁의 세계사』, 『마키아벨리를 위한 변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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