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종복배’의 정치학…피지배 집단의 하부정치, 그리고 ‘정치적 전율’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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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종복배’의 정치학…피지배 집단의 하부정치, 그리고 ‘정치적 전율’의 순간
  • 임병태 기자
  • 승인 2020.07.26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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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 은닉 대본 | 제임스 C. 스콧 지음 | 전상인 옮김 | 후마니타스 | 456쪽

독창적인 헤게모니 이론에 기반해, 형태가 매우 다양하고, 눈에 잘 띄지도 않으며, 스스로 이름조차 갖지 못하는, 피지배계급의 생생한 하부정치를 다룬 역작이다.

인간사회에서 권력만큼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것도 없다. 정도나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 지배와 복종 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바로 권력과 지배의 문제이다. 저자가 보기에 권력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지배가 늘 성공적이거나 안정적이지도 않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지배의 관계는 동시에 저항의 관계”라는 사실, 즉 저항 없는 지배는 없다는 명제이다. 저항은 눈에 보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든 늘 존재한다는 점이다. 또한 ‘강자와 약자 사이의 공적인 기록만으로는 권력관계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주목하고 강조하는 것은 권력관계의 “표면 아래에 숨어 있는 그 무엇”인 ‘은닉 대본’이다. 은닉 대본은 권력자의 직접적 감시 범위를 피해 장외나 막후에서 형성되는 언어나 몸짓, 관행 등으로서, 지배 권력에 대한 비판과 반대 그리고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역사상 모든 피지배계급은 각자의 고된 시련을 바탕으로 나름의 은닉 대본을 생산하고 지배계급으로부터 이를 지켜 왔다. 지배와 저항을 동전의 양면처럼 이해하는 저자는 지배 권력의 은닉 대본보다 피지배 집단의 은닉 대본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이런 종류의 저항은 지금까지 “감히 스스로 이름조차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고, 기존의 사회과학이 무지했거나 외면해 온 정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새롭게 제시되는 ‘하부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는 한층 넓어진다. 저자에게 지금까지의 사회과학은 자유민주주의처럼 비교적 공개된 정치, 아니면 항의나 시위, 반란 등 언론의 헤드라인을 소란스레 장식하는 비일상적 정치 현상을 다루기 일쑤였다. 반면에 저자는 “적외선처럼, 스펙트럼의 가시적 범위를 넘어서” 있는 하부정치는, 쉽게 눈에 드러나는 정치적 행위의, 잘 드러나지 않는 문화적·구조적 기반(그는 이를 산업의 인프라스트럭처에 빗댄다)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근무시간 이후 선술집이나 카바레 등 비공식적인 장소에서 힘없는 자들끼리 나누는 소문이나 남 얘기, 험담, 설화, 노래, 몸짓, 농담, 극 무대 등을 권력에 대한 비난을 암암리에 풍자하는 매개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 저자_ James C. Scott
▲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 저자_ James C. Scott

대개 익명성 뒤에 숨거나 그런 행위에 대한 악의 없는 생각 뒤에 숨어서 권력을 넌지시 비판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불복종을 은폐하는 이와 같은 방식들은, 농민과 노예를 비롯한 피지배 집단들이 자신의 노동, 생산물, 자산을 통째 빼앗기는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성과를 위장하는 방식과도 비슷하다. 남의 토지에 대한 불법 침입, 늑장 대응, 좀도둑질, 시치미 떼기, 도주 등의 형태를 띤 불복종 또한 힘없는 자들의 하부정치에 포함된다. 모든 권력관계의 이면에는 하부정치의 “‘미시적’ 밀고 당기기” 과정이 작동하고 있으며, 권력 균형에 대한 사려 깊은 자각에서 비롯한 전술적 선택의 결과라는 점에서 피지배 집단이 지배에 맞서는 저항 양식으로서 ‘하부정치’는 그 자체로 ‘예술’의 경지라고 할 만하다.

드물게도 은닉 대본과 공식 대본의 경계가 결정적으로 사라지는 ‘광기의 순간’이 존재한다. 저자는 “은닉 대본이 처음 공개적으로 선언될 때 미치는 격렬한 정치적 충격”을 “정치적 전율(電慄)”(political electricity)이라 불렀다. 그는 전근대사회에서 발생한 수많은 농민반란과 민중 반란(예컨대 독일 농민전쟁, 영국 내전,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등)에서 이와 같은 정치적 전율의 순간을 읽어 낼 뿐만 아니라, 1960년대 미국 흑인 사회의 민권운동, 1980년 폴란드 자유노조의 출범, 1988년 칠레 피노체트 독재의 종식, 1988년 소련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캠페인, 그리고 1989년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정부의 붕괴 등 현대사를 대표하는 극적인 순간들 또한 하부정치의 공개적 대폭발로 예증한다. 이처럼 기존 헤게모니 이론을 통해 봤을 때는 ‘과격한 혁명’과 ‘비굴한 침묵’이라는 양 극단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평면적인 역사가, 스콧의 분석을 거침으로써 풍성하고 연속된 결을 부여받는다.

특수한 사례에서 길어낸 연구가 보편적인 호소력을 얻기까지는, 추상적 이론에 매몰되지 않고 현장에 바탕을 둔 이야기의 가치를 충분히 활용하는 저자의 연구 기조가 잘 드러나는 저작이다. 권력, 계급,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빈곤, 저항 등의 추상적 개념을 다루면서도 그 내용이 우리에게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와 닿는 것은, “정치학의 추상적 개념을 현실 세계로 끌어와 실제 인간들에게 적용해 보는 것의 재미와 가치”를 추구해 온 결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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