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꿈, 질료적 상상력과 초인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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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꿈, 질료적 상상력과 초인의 시학
  • 임병태 기자
  • 승인 2020.07.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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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물과 꿈: 질료에 관한 상상력 시론 |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 김병욱 옮김 | 이학사 | 332쪽

과학철학자이자 문학 비평가이며 시인인 저자 바슐라르는 학문적 이력 상으로는 과학철학자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지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그의 면모는 무수한 시와 문학작품들을 읽고 상상력의 역동성과 창조성에 대해 꿈꾸며 일구어낸 문학 연구가로서의 자취이다. 이성을 믿는 과학철학자로서 먼저 뚜렷한 업적을 남긴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성찰 과정에서 과학적 인식의 방해물로만 여겨져 온 인간의 정신 활동인 몽상, 즉 상상력의 활동과 그것의 가장 뛰어난 표현인 문학작품의 매력에 사로잡힌다.

과학적 이성에서 시적 상상력으로 탐구 영역을 옮겨 온 바슐라르는 항상 이성을 인간 정신의 중추로 간주하는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 반기를 들며 오랫동안 거짓과 오류의 원흉으로 낙인찍혀 폄하되어온 상상력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그리하여 상상력이 현실 세계의 변형과 변모를 가능하게 하는 놀라운 창조성을 지닌 것으로 새롭게 인식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책은 바슐라르가 『불의 정신분석』으로 문학 사상가로서 몽상 연구의 첫걸음을 내디딘 이후 질료에 관한 상상력에 더욱 집중해 자신의 독특한 문학 상상력 연구를 확장하고 꽃피운 저서다. 이 책에서 바슐라르는 모든 시학이 질료적 본질의 구성 요소들을 수용한다고 가정하고, 상상력의 여러 유형을 전통 철학과 고대 우주론에 영감을 불어넣은 근본적인 질료적 원소들로 표시하자고 제안한다. 따라서 시와 예술에 잠재되어 있는 인간의 상상력을 물, 불, 공기, 흙이라는 네 가지 질료에 따라 분류하며, 이런 분류를 통해서 시적 영혼을 가장 강력하게 하나의 부류로 묶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 물과 꿈_원서 표지

물, 불, 공기, 흙이라는 원초적인 질료에 입각해 인간의 상상력을 바라보는 바슐라르의 작업은 마치 고대의 연금술사를 연상시킨다. 연금술사에게 질료가 단순한 물리적 실재가 아니라 어떤 영혼을 갖춘 살아 있는 실체이듯이 바슐라르에게도 원초적 질료는 우리 외부의 자연에만 속하는 것(물질-질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자연에도 속하는 질료(영혼-질료), 즉 살아 있는 질료, 변화하는 질료, 변화의 힘을 가진 질료다.

몽상에 잠긴 인간은 이런 원초적 질료를 매개로 세계와 하나가 될 수 있고, 자신의 존재를 우주의 층위로 확장시켜 그 생생한 전체성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런 질료 덕에 몽상가는 실재를 넘어서는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으며 인간 조건을 넘어 초인(surhomme)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즉 바슐라르의 시 철학에서는 질료적 상상력을 통해서, 시와 예술을 통해서 인간 이상의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며, 그런 초인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질료적 상상력이요 시다.

바슐라르는 물의 질료적 상상력이 상상력의 특수한 한 유형임을 강조한다. 물은 불과 흙 사이에서 본질적으로, 존재론적으로 변모하는 과도적인 질료다. 물은 시인의 영혼에 강하게 결부되어 시적 영감을 고취시키는 질료다. 그에게 있어 물은 싹을 틔우고 샘을 솟아나게 하는 질료, 태어나고 불어나는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질료, 변화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질료다. 바슐라르는 깊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의 상상력을 물에 바치고, 생동하는 물의 이미지들이 어떻게 끝없이 몽상을 불러일으키며 시 작품에 생기를 부여하는지를 여러 시와 문학작품들을 통해 살핀다.

제1장 「맑은 물, 봄의 물, 흐르는 물. 나르시시즘의 객관적 조건. 사랑에 빠진 물」에서는 맑은 물, 덧없고 안이한 이미지들을 주는 반짝이는 물을 조명한다. 신화에서 이 물은 나르키소스의 이미지를 비춰주는 물, 이상화하는 나르시시즘을 탄생시키는 물이다. 바슐라르는 나르시시즘이 늘 신경증만 일으키는 것은 아니며, 미학 작품 및 문학작품에서도 그것이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개인적 존재의 나르시시즘은 이상을 위한 승화 작용을 통해 진정한 우주적 나르시시즘의 틀 속으로, 우주적 범미주의로 점차 편입된다. 여기서 바슐라르는 순백과 우아함의 이상을 연구하고 이를 백조 콤플렉스라고 명명하는데, 이 백조 은유 역시 우주적 차원으로 상승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제2장 「깊은 물-잠자는 물-죽은 물. 에드거 포의 몽상 속의 “무거운 물”」에서는 에드거 포의 메타 시학의 주된 줄기를 탐구한다. 포의 시학에서 물의 이미지는 죽음의 몽상이라는 포의 주된 몽상을 따라간다. 포의 작품에는 어머니를 위시하여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죽은 연인들에 대한 고통스러운 추억이 살아 있다. 바슐라르는 포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죽음의 원인이며, 물은 아름답고 충실한 죽음의 질료라고 지적한다. 원초적으로 맑은 모든 물이 포에게는 어두워져야만 하는 물, 어두운 고뇌를 흡수하게 되는 무거운 물이라고 말하며, 이 시인이 어떻게 모든 호수와 늪의 물로 인간적 슬픔의 ‘어머니-물’을, 우울의 질료를 만드는지 논한다.

▲ 물과 꿈_저자 가스통 바슐라르
▲ 물과 꿈_저자 가스통 바슐라르

제3장 「카론 콤플렉스. 오필리아 콤플렉스」에서는 화장을 하거나 땅 아래 매장하거나 강의 물살에 떠내려 보내거나 나무 꼭대기에 유기하는, 모든 시대에 사용되어온 장례법이 불, 흙, 물, 공기의 질료적 상상력과 분명한 연관이 있음을 논하며, 그 장례의 종류가 어떻든 모든 영혼은 카론의 배에 올라타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슐라르는 이런 죽음의 항해를 카론 콤플렉스라고 명명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죽음 속의 물이 ‘욕망된 원소’로 나타나는 이미지에 깃든 오필리아 콤플렉스를 분석하는데, 물속에서 죽기 위해 태어난 피조물 오필리아는 여성적 자살의 상징이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이때 젊고 아름다운 죽음, 마조히스트적 자살의 원소가 되는 물의 이미지를 살핀다.

제4장 「구성된 물들」에서 바슐라르는 질료적 4원소의 상상력이 다른 질료와도 결합되며, 특히 물은 다양한 질료의 결합을 예시하기에 적절한 원소라고 말한다. 물과 불의 결합을 고찰하기 위해 민간 전설과 신화의 예를 살피면서 『불의 정신분석』에서도 언급된 적 있는 불타는 알코올의 이미지에 깃든 호프만 콤플렉스를 논한다. 또한 바슐라르는 물과 흙의 결합이 창조적 상상력의 가장 강력한 주제들을 암시한다고 주장하며, 두 질료를 내밀하게 결합시키는 반죽 작업에서 작업자의 몽상을 지속시키는 물의 유기적 역할을 설명한다.

제5장 「모성적인 물과 여성적인 물」에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한하고 지속적인 사랑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감정에서 기원한 것이라는 보나파르트 부인의 주장을 바탕으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양식인 어머니 자연의 젖의 가치가 부여된 물의 이미지를 탐구한다. 그리고 물에 여성적 특성을 각인하는 또 다른 가치 부여인 연인으로서의 여성의 투사를 언급하며 이 이미지들이 강력하게 나타나는 노발리스의 작품을 분석한다.

제6장 「순수성과 정화. 물의 도덕」에서는 질료적 상상력이 순수한 질료를 찾게 되는 곳은 결국 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순수성에 대한 자연적 상징처럼 나타나는 물의 이미지와 물에 의한 정화 작용을 논한다. 바슐라르는 이런 정화가 단순히 위생상의 청결과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 질료적 상상력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그 예로 종교적인 의식에서 물을 뿌리는 행위로 나타나는 정화 작용을 제시한다. 나아가 맑은 물이 암시하는 정화의 꿈은 신선한 물이 암시하는 혁신의 꿈과 비교될 수 있다고 말하며 스스로에게 젊은 신선함을 부여하고 싶어 하는 청춘의 샘 콤플렉스에 대해 논한다.

제7장 「부드러운 물의 우월성」에서 바슐라르는 부드러운 물(민물)이야말로 진정한 신화적 물이라고 주장하며 바닷물에 대한 지상의 물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는 몽상가는 강의 전설적인 기원, 먼 곳에 있는 원천을 떠올리게 된다고 말하며 신화와 콩트의 예를 통해 몽상이 어떻게 보통의 물, 일상의 물을 무한한 바다보다 앞자리에 위치시키는지를 살핀다.

제8장 「난폭한 물」에서 바슐라르는 ‘세계는 나의 도발’이라는 쇼펜하우어의 관점에 기반하여 질료적 4원소가 도발의 상이한 네 유형, 분노의 네 유형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원소들에 대한 투쟁과 승리의 예를 고찰하기 위해 바람에 맞서 걷는 사람인 니체와 물살에 맞서 수영하는 사람인 스윈번이라는 두 명의 문학 영웅을 선택하여 살피고, 스윈번의 작품에 나타나는 난폭한 물에 대한 찬미와 물결에 의한 채찍질이라는 지배적인 이미지에 깃든 스윈번 콤플렉스를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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