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명예와 성, 일석삼조(一石三鳥)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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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명예와 성, 일석삼조(一石三鳥)의 꿈
  • 조은영 편집기획위원/원광대·미술사
  • 승인 2020.07.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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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사색]

최근 발생한 일련의 “권력형 성범죄” 혹은 “성추행 의혹” 사건으로 온 나라가 격론에 휩싸여서 안타깝다. 권력과 명예를 지닌 지자체장과 정계 인사들을 둘러싼 유사한 사건이 벌써 몇 번째다. 그 때마다 각 정당, 시민단체, 언론은 물론이고 각계 인사들도 국민의 표심과 여론, 인권 사이에서 계산하고 입장표명을 하면서 열띤 공방을 야기한다.

반면에 정작 여성인권과 미투운동을 옹호한다던 정부 주무 부처인 여성가족부와 여성 정치인들은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자신들 존재의 무용론이 제기되자 뒷북 대응으로 ‘2차 가해방지’ 운운하여 ‘선택적 인권보호’라는 날선 비판을 받고 있다. 사건 발생 시마다 당사자의 공과가 가늠되고 진보-보수 진영에 따라 정치적 편싸움이 더해지면서,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조차 구분이 힘들 지경이다. 특히 민주화나 인권운동에 앞장선 이들이 연루되면서, 친(親)여권에서는 여론을 의식하며 입장을 번복하니 사회지도층의 성인지 감수성 수준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러한 국내 양상은 1991년 미국의 클래런스 토머스-아니타 힐 케이스를 연상시킨다.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아프리카계 미국인 연방대법원 대법관이 된 C. 토머스는 인준청문회에서 후에 법학 교수가 된 A. 힐에 대한 성희롱 의혹을 부인했고, 각계각층의 격론 끝에 상원에서 52 대 48로 인준되었다. 주목할 점은 기득권 세력에 오래 대항해온 두 주변 공조세력, 곧 백인권력에 대한 흑인/유색인 인권운동과 남성권력에 대한 여성 인권운동이 뜻밖에 상호이익이 상충하는 처지에 놓였고, 인종차별 철폐운동이 여성운동의 당면문제보다 우선시되는 쪽으로 정리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희롱으로 불거진 흑인과 여성 인권운동 간의 싸움은 결국 ‘상처뿐인 권력’을 얻었고, 명예는 잃었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유사한 사건은 워싱턴 D.C.에서 미국 국립기관 재직 시에도 있었다. 이웃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의 여성 인턴들에 대한 ‘캐주얼’한 행동들이 일련의 소문을 낳더니,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로 터졌다. 그런데 ‘모니카 게이트’가 1997년 빌 클린턴 탄핵의 발단이 되자, 소문 속 ‘피해 여성들’은 르윈스키와 달리 쌍방합의가 아니었음에도 침묵했다. 여성인권이냐, 진보진영이냐는 난감한 선택 앞에서 이전 조지 H. W. 부시 대통령 같은 보수정권의 복귀를 두려워한 정치적 계산도 한몫했던 듯하다. 그럼에도 결국 침묵했던 대중은 2001년 차기 정권을 아들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돌려줬지만 말이다.

‘쌍방합의’일지라도 직장 내 권력형 성관계는 비난받았고, 성추행은 금기였다. 그 엄격성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다. 재직하던 국립기관에서 유일한 한국 여자임을 의식하며 ‘조신하게’ 지내던 어느 날, 한 남자 직원이 뒤에서 내 머리카락을 살짝 만지고 도망갔는데 멀리서 목격한 남자 상사가 당일로 그를 해직시켰다. 한국의 성차별과 성희롱 문화에 익숙했던 내게 그곳은 별천지였다. 그 정도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딸 같아서” 한 행동이고, 온갖 이유로 피해자 탓을 하는 2차 가해가 난무하는 현재는 또 다른 요지경 속인 셈이다. 이전에 쓴 <미투 운동과 교수권력>이라는 글에서도 논했지만, 성범죄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과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우리의 갈 길은 요원하다.

남성권력처럼 여성권력도 쟁점화 될 때가 올 것이다. 물가에서 장난삼아 던진 ‘여자’ 아이의 돌에 ‘남자’ 개구리가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 ‘여성’ 고인의 공과 함께 과를 거론하면 부관참시나 무례함으로 매도될 수도 있다. 즉 특정 ‘성’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가해자 대 사회적 약자인 피해자의 문제이다. 권력과 명예를 성취한 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곧 자신을 존경하는 것과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별개이고 내가 좋다고 상대도 좋은 것이 아니건만 권력과 명예에 성까지 아우른 일석삼조를 꿈꾸다가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상황이 안타깝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이 맴돈다. “부질없다, 부질없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조은영 편집기획위원/원광대·미술사

미국 델라웨어대학(Universityof Delaware)에서 미술사석사와 철학박사 취득, 국립 스미소니언박물관 Fellow와 국제학술자문위원, 미국 국립인문진흥재단(NEH) Fellow, 중국 연변대학 객좌교수, 일본 동지사대학 국제대학원 객원강의교수 등을 역임하고, 현대미술사학회 회장과 미술사학연구회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원광대 조형예술디자인대학 미술과 교수로 원광대 국제교류처장과 한국문화교육센터장, 전라북도 문화예술진흥위원,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 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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