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공진회와 박람회를 통해 살펴본 식민권력의 욕망과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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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공진회와 박람회를 통해 살펴본 식민권력의 욕망과 이미지
  • 최병택 공주교육대학교·한국근현대사
  • 승인 2020.07.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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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말하다_ 『욕망의 전시장: 식민지 조선의 공진회와 박람회』 (최병택 지음, 서해문집, 236쪽, 2020.06)

조선총독부는 한일 강제 합방 5주년이 되는 1915년에 경복궁 일대에서 조선물산공진회라는 행사를 열었다. 공진회는 그 규모와 입장 관객 수에서 식민지 조선에서 열린 그 어떤 행사보다도 거창했다. 조선총독부는 이 행사가 일제의 지배에 그토록 저항적이었던 조선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제는 대한제국이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문명 진보’의 열매를 맛보게 할 능력이 없다고 규정하는 한편, 오직 일본 제국만이 조선을 선진 문명국으로 바꿔놓을 능력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일제는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인들이 공진회장에서 조선총독부 덕분에 조선인들이 누릴 수 있게 된 문명 진보의 실적을 목도하게 되면 더 이상 총독부의 지배를 거부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했던 까닭에 일제 당국은 조선물산공진회를 총독부의 기관지 노릇을 하던 매일신보를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전국 각지에서 관람단을 조직해 반강제적으로 조선인들을 공진회장으로 동원해 전시물을 감상하도록 독려했다.

▲ 공진회장
▲ 공진회장

조선물산공진회는 역사 교과서에서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사건이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구사한 지배 담론이 무엇인지 밝혀보고자 했던 연구자들로서는 매우 주목되는 분석 대상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 목적과 효과에 대해 학문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 행사에 대한 연구 결과물들을 일별하면 대개 조선총독부가 강제 합방 5년 만에 이룩한 성과를 선전하기 위해 공진회를 개최한 것이 분명하다는 데에는 대개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연구자들은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 일원에서 개최했다는 사실에 유독 관심을 두고 “공진회 개최의 목적은 조선 왕조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데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필자는 ‘다른 연구자들이 내놓은 분석 결과가 과연 타당한가?’ 하는 의문을 지니고 오래전부터 관련 사료를 면밀히 분석해 왔다. 그 결과 일제가 식민지배의 성과를 조선인들에게 과시하고자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했다고 하는 기존 연구자들의 분석 결과에 오류가 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이유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일제가 박람회라는 이름 대신 왜 ‘공진회’라는 명칭을 썼을까 하는 점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존의 연구자들은 ‘공진회’와 ‘박람회’라는 용어를 서로 구별하지 않았다. 공진회가 박람회와 완벽히 똑같은 행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당대 서구 열강이 앞다투어 개최했던 박람회와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공진회 사이의 수준 차이는 너무 커서 도저히 동일한 성격의 행사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 크리스탈팰리스
▲ 크리스탈팰리스

박람회는 첨단의 상품과 발명품을 전 세계에 알리는 행사로서 지금으로 따지면 올림픽 정도의 위상을 갖춘 행사였다. 박람회의 이미지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1851년 런던에서 열린 수정궁(크리스탈 팰리스) 대박람회는 그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이후에도 지역 명칭과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팀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파리 박람회 때에는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에펠탑이 만들어져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에디슨의 전구,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등 그 유명한 발명품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박람회를 통해 대중에게 선을 보였다.

이에 비해 조선물산공진회에 출품된 물건들은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묘목 몇 그루, 일본에서 건너온 쌀 품종, 전국 철도망 지도, 조선총독부 관제표에 불과해서 겉보기에도 그다지 대단할 것이 없었다. 조선 총독은 이러한 점을 시인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이 행사를 박람회라고 부르는 것은 불가하고 공진회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요컨대 공진회라는 것은 박람회와 같이 대단한 발명품을 보여주는 전시가 아니라 그에 수준이 못 미치는 하급의 전시 행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격이 낮은 행사를 일제가 왜 그토록 대대적으로 광고하고, 전국 각지에서 반강제적으로 관람객들을 끌어 모았던 것일까? 필자는 바로 이 지점에 문제의식을 두고 그 답을 구하고자 자료를 수집, 분석했으며, 그 결과를 담아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 조선물산공진회 포스터
▲ 조선물산공진회 포스터

필자의 생각으로는 사람들이 관객으로 동원된 전시의 장에는 권력(혹은 자본)이 장치해둔 고도의 담론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조선물산공진회가 지니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자 할 때,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그 ‘고도의 담론’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일제는 공진회와 박람회를 통해 자기중심적으로 권력과 피지배민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일제 당국을 ‘문명의 전파자’이자 ‘문명의 교사’로 설정하고, 조선인은 그 지도를 받아야 하는 ‘열등한 지위의 인간’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조선물산공진회는 출품된 물건들의 수준이 조악한 편이어서 출품작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힘’과 ‘권위’를 피지배인들에게 각인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 행사를 통해 조선인들이 조선총독부의 지배에 순응할 경우 도달하게 될 ‘문명의 수준’을 제시하고, ‘밝은 미래상’을 가시화하여 보여주고자 했다.

조선총독부의 어느 관료는 공진회야말로 “문명의 진보를 위해 조선총독부로부터 교육을 받아온 조선인들에게 중간고사와 같은 시험”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일제가 이 공진회라는 행사에 부여한 위상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조선인들이 선진 외국에 비해 열등하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 그리고 분발하여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갖게 하는 것, 조선총독부가 바로 그와 같은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교사’라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메시지가 이 행사 주최자들이 설정한 목적이었다.

필자는 이러한 생각에 이르러, 비로소 조선물산공진회가 왜 “함께 힘을 합쳐 앞으로 나아가자”라는 뜻이 담긴 ‘공진회’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또 일제가 스스로를 ‘문명의 교사’로 규정하고, 조선인들이 그 ‘지도’에 순응하는 착한 ‘모범생’이 되기를 기대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 엉터리 구경
▲ 엉터리 구경

당시 일제는 조선인 위에 군림하는 교사가 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촌부까지 끌고 와서 공진회 구경을 시켰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의 자가당착적인 욕망은 쉽사리 채워질 수 없었다. 조선인들은 보잘것없는 공진회장을 서성이며 자신들을 강제로 끌고 온 관리에게 욕설을 늘어놓거나, 집에 돌아갈 여비 걱정에 수군거리기만 했다. 어떤 문인은 이 공진회가 거짓으로 도배된 선전의 장이라는 사실을 수필 속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일제는 이와 같은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공진회를 통해 조선인들이 드디어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문명 전파의 교사’로 인정하기 시작했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이렇듯 공진회장은 동원된 관람객 앞에서 자기도취에 빠져 별 볼 일 없는 물건과 통계표를 자랑하기에 급급한 주최자, 그 관람객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장사치들의 욕망이 뒤섞인 한판의 연극 무대와 같았다.

▲ 조선박람회장
▲ 조선박람회장

필자는 조선물산공진회가 얼마나 대단한 행사였는지 묘사하고자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식민 권력이 가지고 있던 자기 이미지를 어떻게 표현했는가, 그리고 조선인들과 식민 당국 사이의 간극은 얼마나 컸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기 원했다. 본문 속에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리기 전 지방 각지에서 대대적으로 개최되었던 지방공진회, 조선물산공진회와 부업공진회, 1920년대의 조선박람회 등이 순차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필자로서는 그 각각의 행사 경과 혹은 전시물들의 ‘화려함’ 같은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다만 일제가 늘어놓은 전시 담론이 얼마나 조선인들에게 낯설고 모순된 것이었는지 묘사해보고자 했다. 부디 독자 여러분들도 이 책을 통해 기존의 연구 성과가 지닌 한계를 인지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식민 문제를 되돌아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최병택 공주교육대학교·한국근현대사

공주교육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의 임업, 의무교육, 하천개수, 박람회 등에 두루 관심을 두고 있다. 최근에는 미래지향적인 역사교육 방향을 두고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일제하 조선임야조사사업과 산림 정책》이 있으며, 함께 지은 책으로 《경성 리포트》, 《100년 전의 한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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