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련씨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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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련씨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갔는가?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0.07.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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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19)_〈均如傳〉을 지은 혁련정(赫連挺)(중)

밀이 아니었다면 인류 식생활은 굉장히 곤란했을 것이고, 아마 지금처럼 다양한 밀가루 제품은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는 면류의 백미는 라면이다. 어쩌다 라면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일본에서 만든 맛있는 ‘라멘’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더 맛있는 ‘라면’이라는 이름으로 팔리는데, 이 말은 ‘국수’를 가리키는 중앙아시아 유목민 투르크족의 말 ‘라그만(lagman)’에서 비롯된 것이다.

(Kazakh: lağman; Uzbek: lagʻmon; Uyghur: lengmen; Kyrgyz: lagman) 사람은 부단히 이동하고 이동의 물결 따라 말과 문화도 더불어 간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밀농사가 아시아 쪽으로 동진하여 국수문화를 꽃피우게 되는데 지금은 혹서의 땅, 투르판(중국 신강성 위구르자치주 내)이 그곳이다. 거기 <서유기>에 등장하는 화염산이 있다.
 
경순왕계의 경주 김씨인 총장이 한참을 자신의 본관에 얽힌 이야기를 하다가 뜻밖에도 신라김씨의 조상이 흉노족 아니냐며 문무왕 비문에 새겨진 ‘투후(秺侯)’라는 관직이 그 증거라 했다. 공학전공의 총장이 그를 어찌 아느냐 하니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다. “살면서 이것저것 주워듣다 알게 되었습니다.” 겸손한 그의 말을 들으며 인문학자인 나는 분발해야겠다는 욕심을 낼 뿐이었다. 그리고 본 칼럼 <말로 푸는 역사 기행>에서 김씨의 출자 문제를 다뤄봐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보다 먼저 <균여전>의 편찬자 혁련정(赫連挺)의 성씨인 赫連에 대하여. 부계는 련제씨이나 모계가 선비족이라는 이유로 왕족집단 련제부에 의해 소외당한 흉노 철불부(鐵弗部)는 처음에는 탁발씨(선비족)에 부촉해 살았다. 한편 암암리에 부견(符堅)의 나라 전진(前秦)과도 손을 잡았다. 나는 철불(鐵弗) 또는 철벌(鐵伐)이라는 말이 ‘서자’라는 뜻을 담고 있을 것이라 추정했다. 그러나 철불발발(鐵弗勃勃)이 大夏天王을 자처하며 철불이라는 자신의 성을 부끄럽게 여겨(치성철불耻(恥)姓鐵弗) 혁련으로 개성(改姓)을 하며 스스로 “휘혁여천연(徽與天, 아름다운 붉은 빛이 하늘과 이어졌다)”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혁련은 흉노말의 음차어가 아니다. 그렇지만 흉노는 선조인 모돈 선우가 한족 황실의 여인을 부인으로 삼은 탓에 그 자손들이 劉氏姓을 물려받아 사용했다. 그러나 이는 자신 혹은 직계황족들에게만 해당되고, 지서(支庶)는 철벌(鐵伐)이라 부르도록 했다. 그 이유를 말하기를, “강예여철, 다감벌인(剛銳如鐵, 皆堪伐人)”이라 했다. 즉 자기 부중이 강하고 날카로워서 모든 사람이 다 적을 베어 쓰러뜨릴 능력이 있다는 의미를 담은 성이 鐵伐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의 족원(族源)에 대한 과장과 견강부회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하국(大夏國)은 2대 혁련창(赫連昌)을 거쳐 3대 혁련정(赫連定)에 이르러 멸망함으로써 불과 3대 25년(407~431) 간의 단명 왕조에 그쳤지만 중국 북방의 이민족으로서 한대(漢代) 이후 가장 강력한 북방 민족의 하나였다. 혁련가(赫連家)는 차후 대성(大姓)으로 존재하며 선비와 거란이 세운 국가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혁련정(赫連挺)이 고려 조정에 벼슬아치로 임명되고 『균여전』을 쓸 만큼의 文才를 지녔다면 그와 그의 집안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고려인으로 살아왔다고 보아야 한다. 그의 윗대와 후대에 대한 기록물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그의 선대가 어쩌다 고려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지금으로서는 아마도 거란국의 일원이었던 혁련족이 아마도 시류의 변화에 따라 발해의 구성원이 되었다가 발해의 멸망과 함께 고려로 흡수되는 과정에서 고려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견해가 아닌가 한다. 혁련정(赫連挺)은 『高麗史』에 두 번 그 이름이 등장한다.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高麗史)

丙戌년에 혁련정을 遼에 보내어 方物을 바치고 崔善緯는 新正을 賀하였다.(『高麗史』 11卷 世家11 肅宗1년(1100)條)

庚子년에 畢光贊으로 檢校太子太師 上護軍을 삼고 赫連挺으로 長樂殿學士 判諸學院事를 삼았다.(『高麗史』 12卷 世家12 睿宗1년(1105)條)

짧기는 하지만 혁련정이 요(遼; 916/936~1125)에 사신으로 보내졌다는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 관리 다시 말해 고려인 혁련정이 흉노족 혁련가의 계보에 속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혁련가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보인다. <세종실록> 61권과 <중종실록> 101권에 요동(遼東) 백호(百戶)/천호(千戶) 혁련(赫連)이 등장한다.

▲ 조선왕조실록
▲ 조선왕조실록

1. 세종실록 62권, 세종 15년 11월 26일 을사 2번째 기사 / 김중저를 보내어 배준 등을 호송하게 하고 그와 관련된 상세한 내용을 적어 요동에 보내다.

사역원 판관(司譯院判官) 김중저(金仲渚)를 보내어 흠차 지휘(欽差指揮) 배준(裴俊) 등을 호송(護送)하게 하였다. 요동(遼東)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아뢰기를, "의정부에서 장계(狀啓)하기를,...도착하여, 백호 혁련(赫連) 등을 보내어 달려가 보고하게 하고, 17일에 다시 저곳에 가서 인구(人口)들을 독촉하여 모으고, 모피·의복·양미(糧米) 등 물품을 갖추어 두고 돌아왔습니다....

2. 중종실록 36권, 중종 14년 8월 18일 기묘 2번째 기사 / 귀화한 사람들을 가려서 사복으로 임명하는 일을 정부에 의논하도록 명하다

귀화한 사람들을 가려서 사복(司僕)으로 임명하는 일을 정부에 의논하도록 명하여 분부하기를,

"이장곤·최한홍(崔漢洪)의 묶어두자는 말이 옳은 듯하나, 나의 생각에는 이류(異類, 귀화인)들을 서울에 많이 있게 함은 불가하다고 여긴다. 이류는 진(晉)나라 때의 폐단을 경계삼아야 하니, 묶어놓자는 것이 가한 듯하지만 퍼지게 된다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 또 한홍이 말한 말값을 주자는 일은 지당하니, 비록 한때에 다 주지는 못하더라도 말로 주든지 면포(綿布)로 주든지 충당해 줌이 가할 듯하다. 제도(諸道)의 목장에 말이 적지 않아 늙어서 죽게 되거나 쓸데없는 것이 또한 적지 않은데, 만일 군졸들에게 나누어준다면 스스로 숙마(熟馬)를 만들어 쓰게 될 것이니 편리한지를 병조에 물으라."

이류(異類)는 귀화인을 가리킨다. 그리고 혁련씨는 여러 귀화집단 중의 하나였다. 문제는 이런 귀화한 이들이 조선 중종대까지 한양에서 많이 활보하고 다녔는데, 언제 쯤 혁련씨라는 성씨가 사라졌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으로서는 영 알 수가 없다.
 
한편 흉노어의 음차일 족명 鐵弗의 고대음을 재구성하면 아마도 /tebu/에 가까운 음가를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재구음은 북위를 세운 선비족의 ethnonym(종족명) 탁발부(拓跋部)나 독발부(禿髮部)의 음가와 흡사하다. 이름으로 보아 이들은 순록유목민이었다. 야쿠트어(=사카어)로 순록은 타부(tabu)다. 바이칼 호수 주변에 살고 있는 늑대족 부리야트(Buryat)의 말로는 사카(Saka)가 순록이다. 예로부터 凍土 툰드라는 순록유목민들의 터전이었다. 
 
위진남북조 시절 실크로드를 따라 온 외국인들에게 북서의 중국인은 타부가치(Tabugachi, 순록치기)였다. 그 이전에는 Sereca(비단장수)였고, 거란족이 북방의 지배자였을 때는 Kithay라고 불렸다. 러시아인들은 Cathay라고 불렀다. 이렇듯 땅의 주인이 어떤 족속이냐에 따라 국명이 변전하는 일을 우리는 흔하게 본다.

국명의 근간이 된 족명 중 엑소님(exonym, 타칭)은 동식물의 이름이 차용된 경우가 많다. 유목민의 경우 기르는 가축이나 들짐승으로 족명을 삼는 건 흔한 일이었다. Yakut(야크족), Solon(황서랑(黃鼠狼 즉 족제비족), Buryat(늑대족) 등이 그러하다. 일종의 낮춰보기, 비하의 의도에서다. 인간 불평등의 사고방식이 엿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민족을 야만인, 오랑캐로 지칭하는 건 자신들은 우월하고, 상대는 열등하다는 의식이 배어있는 명백한 인종 쇼비니즘(chauvinism)이다.   

한자 족명에 ‘OO虜’라 표기된 것은 다 그 대상을 얕잡아 부르는 것이다. 색두로, 목양로, 자로, 포한로 등 족명이 다채롭다. 자로(資虜)는 흉노의 별종으로 ‘資’는 ‘노예, 종’을 가리키는 흉노어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 흉노사회에서도 차별이 있음을 이미 말했다. 선비족 출신녀와 흉노 련제씨 남자 사이의 소생을 철불(tebu) 즉 ‘순록치기’라 눈 흘기고, 전쟁포로나 노예를 ‘資’라 부르며 그 집단을 ‘자로’ 즉 종놈, 포로놈들이라고 막 대했다. 인간사회는 어디서나 불평등하다.
 
흉노 철불부는 좌현왕 거비(去卑)와 선비 여인 사이의 소생에서 비롯된 집단이다. 去卑는 동한(東漢)의 도료장군(度辽將軍) 유진백(劉進伯)의 후손으로 유진백이 匈奴 북벌에 나섰다가 사로잡혀, 그곳에서 흉노여인과의 사이에 시리(尸利)를 나았다. 去卑는 바로 이 尸利의 아들 오리(烏利)의 아들이다. 그런데 거비 사후 후계 자리를 놓고 갈등이 드러났다. 큰 아들 유맹(劉猛)이 뒤를 이어 좌현왕 노릇을 하면서 晉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암살되자 또 다른 아들 유고승원(劉誥升爰)이 조카를 누르고 계속해 좌현왕으로서 철불부의 수령 역할을 했다. 그러자 유맹의 아들 유부륜(劉副侖)은 따르는 부중 사람들을 이끌고 선비탁발부에 의탁하면서 독고부(獨孤部)의 시조가 되었다. 사내들의 일생은 필연적으로 힘겨루기에 명운이 달려있다.
 
서위(西魏)의 선비족 대도독 대사마 독고신은 장녀를 북주 명제 우문육에게 시집보냈다. 넷째딸은 당국공 이병과 혼인시켰다. 이들 사이에서 난 자식이 당 고조 이연이다. 그러니까 이연은 적어도 선비족의 피가 절반은 섞인 것이다.
 
대사공 양충의 아들로 수나라를 세운 양건의 정실부인이 되었다가 후일 양건이 수나라를 세운 뒤 문헌황후로 추존된 독고가라(獨孤伽羅) 역시 선비족 여인이다. 주목할 것은 獨孤氏가 탁발선비 정권에 들어가 劉氏로 성바꾸기(개성)를 했다는 것이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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