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시’란 무엇인가?…근대시 형성과 한문맥(漢文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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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시’란 무엇인가?…근대시 형성과 한문맥(漢文脈)
  • 정기인 서울과학기술대학교·국문학
  • 승인 2020.07.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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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한국 근대시의 형성과 한문맥의 재구성』 (정기인 지음,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384쪽, 2020.05)

이 책은 ‘한국 근대시’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근대는 현대와 연속적인 특성을 보인 시기로, ‘한국 근대시’는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은 현대시의 본질적인 특성이 무엇이며 이는 어느 시기부터 그 본질적 특성을 보이기 시작했느냐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근대 사회의 특성은 학자에 따라 자본주의, 합리성, 개인주의 등등이 주요한 특성으로 지적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근대시의 특성은, 개인의 발견, 공동문어가 아닌 민족어의 사용, 노래와의 분리, 자유시형의 확립 등으로 주장되었다.

이러한 주장들을 수용해서 반복하기보다는, 일단 소위 ‘근대’라고 하는 시기의 시들을 귀납적으로 살펴보고 싶었다. 일제강점기 시들이 실린 잡지와 신문들을 읽어나가다 보니, 매우 특이한 현상이 눈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근대시’라고 하는 국문시들 옆에 한시들도 같이 실려 있었고 그 양도 국문시에 못지않게 많았다. 그런데 누구도 이 ‘근대’ 한시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가 대표적인 근대 시인이라고 부르는 최남선, 이광수, 김억, 김소월은 한시를 썼거나, 번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관심은 매우 소략했다. 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면, 동료들은 한시는 ‘여기’였을 뿐이고 ‘근대시’에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고 했다. 아니, 어떻게 읽어보고 검토해보지도 않고 이것이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근대시’란 한문이 아닌 한국어로 쓰인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한국어로 쓴 시가 한시와 긴밀한 연관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면? 이것이야말로 내 박사논문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한시를 배우고, 이들의 국문시와 한시, 그리고 시론을 읽어나가다 보니, 이들의 시와 글에 한시적인 특성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국문시의 선구자들은 모두 어린 시절 한학 학습으로 글공부를 시작했고, 이들이 처음 읽은 ‘시’는 한시였다. 이후 (일본어로 번역된) 서구시를 학습하기도 했지만, 이들이 쓴 초창기 시는 한시를 국문시로 실험해본 것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시의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또, 이들은 인생 내내 한시를 읽고 번역하였고,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시경, 논어, 맹자에 나온 개념들을 원용해서 설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발견하고는, ‘한국 근대시’란 무엇인가를 이러한 한시, 한문적 특성과의 연관성 속에서 보고 싶어서 적용한 개념이 바로 ‘한문맥’이다. 한문전통이 아니라 한문의 맥락이라는 다소 낯선 개념어를 선택한 이유는, 이들이 강하게 영향을 받은 것은 조선의 한문전통뿐 아니라 당대 일본의 한문과 중국의 근대 한문 서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개념으로 살펴보니, 한국 근대시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최남선과 이광수, 조선 최초 서구시 번역집과 근대시집을 상재했고 또 동시에 최초의 근대 시론가라고 할 수 있는 김억, 민요시의 선구자이자 ‘국민시인’인 김소월의 시와 시론이 모두 한문맥의 커다란 영향 아래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최남선과 이광수
▲ 최남선과 이광수

최남선은 ‘입지(立志)’나 ‘성(誠)’과 같이 한문맥의 존숭받는 개념을 사용하고 과거의 권위를 공개적으로 이용하면서 계몽의 논리를 펼친다. 그는 어수와 구수의 정형을 인식하면서 어수를 고정한 채 4행씩 2연이나 8행씩 2연 구성으로 대부분의 국문시를 쓴다. 그는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 그리고 “서자(逝者)로서의 물”이라는 한문맥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국문시를 창작했다.

이광수는 표면적으로는 기존 한문맥과의 단절을 주장했지만, 근본적으로 ‘사(士)’의 이념을 지속했다. 그는 ‘확이충지(擴而充之)’ 등의 한문맥의 개념을 그대로 사용했지만, 이들의 권위를 공개적으로 이용하지는 않는다. 또 기존 한문맥에서 배척당한 ‘정(情)’을 주장했지만, 실상 그 논리는 기존의 ‘양성(養性)’의 내용이었다.

즉 최남선은 적극적으로 한문맥을 다른 문맥들과 병치하면서 다른 문맥들을 한문맥을 바탕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다면, 이광수는 표면적으로는 한문맥을 거부하였지만, 그 거부의 논리 속에는 한문맥이 계기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한시 형식을 차용한 언문풍월을 쓰고, ‘송(頌)’, ‘송(送)’, ‘악부시(樂府詩)’ 등 한시 형식을 국문시로 실험했다.

김억은 개성적인 문학을 옹호하며 언어 자체의 심미성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문이재도론을 벗어나며, 서구 낭만주의적 문학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천리(天理)’나 ‘사무사(思無邪)’와 같이 한문맥에서 존숭받는 개념을 전유하며 논증했다. 김억은 개인적인 서간에는 한시를 써서 지인들에게 보내며, 한시의 형식을 그대로 국문시로 전유해서 썼고, 한시를 번역하는 것이 낙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800여 편에 달하는 한시 번역을 하면서 이것이 어떻게 하면 조선(어)에 적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여, 한시에 강력한 영향을 받은 ‘조선적 근대시’ 형식인 격조시형을 창안했다. 김억은 근체시의 언술 구조인 대장(對仗)구조를 그의 초기 시부터 1920년대 시까지 반복하며 이러한 대의 구성으로 개인의 내면을 포착했다.

▲ 김억과 김소월
▲ 김억과 김소월

마지막으로 김소월은 ‘정성위음(鄭聲衛音)’과 같이 기존 한문맥에서 부정되던 개념을 오히려 긍정적 의미로 사용하며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시혼」에서 한문맥을 심층적으로 구문맥과 국맥과 결합하여 변형했다. 소월 또한 한시를 번역하면서, ‘정성위음’적 성격을 강화하려고 노력했고, 한시의 형식을 바탕으로 국문시를 실험했다. 또 유배객의 심정을 담은 한시를 번안하고 이에 기반을 둔 국문시를 써서 망국민의 설움을 유배객이라는 한문맥의 주요한 전통에 기대어 표현했다. 김소월은 영원한 것과 변화하는 것, 그리고 빛과 그늘이라는 각기 구문맥과 한문맥 그리고 국맥이 상징하는 핵심적인 세계관의 충돌을 동력으로 삼아서 시를 썼다. 그의 국문시에는 한시의 영향이 세계관의 차원에서 하나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이 책은 기존의 한국 문학사에서 소홀히 다루어졌던 근대시 형성과 한문맥의 관련성을 고찰했다. 이렇게 근대시 형성과 한문맥의 관계를 해명한 작업은 한반도의 문학사가 한문 문학과 국문 문학의 상호교섭으로 이루어졌다는 장기적 안목을 근대 이후로까지 확장했다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한문맥, 구문맥, 일문맥, 국맥을 뒤섞으며 이를 원천으로 삼아 풍요로운 시들을 창출해 낸 것이야말로, 한국 근대시의 ‘근대성’을 특징짓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한국 근대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내 생각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정기인 서울과학기술대학교·국문학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동경외국어대학 특임준교수를 역임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 교수이며 지훈신진학술상을 수상했다. 한국 근대시와 한문맥의 관계, 페미니즘과 퀴어이론, 케이팝 가사와 뮤직비디오, 해외 한국학 등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다. 쓴 논문으로 「경전에서 텍스트로-20세기 초 『시경』에 대한 근대 시인들의 인식 변화」, 「이광수와 모윤숙-이광수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의 모윤숙의 『렌의 애가』」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 『쿠데타의 기술』, 『친밀한 제국-한국과 일본의 협력과 식민지 근대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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