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도구화된 세계를 지배하는 혐오의 정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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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도구화된 세계를 지배하는 혐오의 정치경제학
  • 임병태 기자
  • 승인 2020.07.12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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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이 읽기_ 『문명과 혐오: 젠더ㆍ계급ㆍ생태를 관통하는 혐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아고라, 544쪽, 2020.06)

경찰의 강압적 체포로 인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은 전 세계인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인종차별과 소수자 혐오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분노는 그동안 자행되어 온 갖가지 차별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전 세계는 생명을 위협하는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사회적 ‘분열과 증오’라는 전례 없는 혼란을 겪고 있다. 모두가 격리되고 대규모 실업과 경제난도 잇따르면서 좌절감과 불안감이 사람들을 예민하게 만들고, 예민함은 생존을 위한 폭력성을 드러나게 한다. 저자 데릭 젠슨은 우리 사회의 작동 원리가 바로 혐오의 정치경제학이며, 누구나 차별과 혐오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데릭 젠슨은 이 책에서 우리 문명사 전체를 꿰뚫어 혐오 문화를 파헤치고, 사회·경제적 구조와 혐오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총 21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혐오집단의 정의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하여 소수자 린치, 강간, 포르노 사이트, 아동학대, 계급 착취, 생태 파괴, 홀로코스트 등 다양한 사례들을 살피면서 산업 사회 전체에 만연한 잔학 행위들의 뿌리를 추적한다.
 
책에는 이유 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열거된다. “에드워드 앤토니 앤더슨, 1996년 1월 15일, 바닥에 엎드린 채 수갑을 찬 상태에서 총에 맞다. 프랭키 아르주에가, 15세, 1996년 1월 12일, 머리 뒤쪽에 총을 맞다. 그 다음 날인 어머니날, 그의 가족은 알 수 없는 사람에게서 비아냥거리는 전화를 받았다. 회신 다이얼을 누르니 경찰이 나왔다. 앤토니 바에즈, 1994년 12월 22일, 뉴욕 시 길거리에서 축구를 했다는 이유로 질식사당하다. 르니 캠포스, 수감 중이던 그가 자기 목에 티셔츠를 절반 이상 쑤셔 넣어서 자살했다고 경찰은 발표했다. 폐에 이르는 기관의 4분의 3까지 티셔츠가 쑤셔 넣어져 있었다.”

▲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강압적인 체포로 사망한 후 미국 전역에서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강압적인 체포로 사망한 후 미국 전역에서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경찰의 지시를 순순히 따랐다는 것, 그리고 흑인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죽음들은 ‘묻지 마’ 살인이다. 이 다양하고 끔찍한 사례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가 타자를 이해하는 보편적인 방식이다. 너무 오래되어 ‘혐오’라고 인식되지도 않는 수많은 혐오들 앞에서 데릭 젠슨은 고백한다. “내가 백인으로 태어난 것이 다행이다.” “내가 남자로 태어난 것이 참 다행스럽다.” 유대인들이 민족 외에 다른 이유 없이 학살당했듯이, 많은 여자들은 ‘여자라는 이유’로 강간의 대상이 된다. 제3세계 아동 매춘은 세계의 거시 경제정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미국 땅 어디에도 인디언의 피가 스며 있지 않은 곳이 없다. 1페니짜리 수분 보충제가 없어서 죽은 50만 명의 이라크 어린이들, ‘게으르다’는 이유로 땅을 빼앗기고 노예가 된 아프리카 원주민들, 휴지처럼 쓰고 버려진 수백만 중국인 이주노동자들, 전쟁에 반대하다 맞아 죽은 시민들……. 이유는커녕 이름도 없이 죽어간 이 수많은 목숨들 앞에서 데릭 젠슨은 눈물을 펜 삼아 글을 써야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많은 살인들을 저지른 이들은 누구일까? “피가 흘러내리는 심술궂은 입에 뼛조각과 살덩어리를 물고 있는 미치광이들”일까? 아니다. 데릭 젠슨의 말에 따르자면, 그들은 “우리 자신의 마음과 훨씬 더 가까운 무엇이었고 그것은 현재에도 마찬가지다.” 지극히 평범한 이웃이라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한다.

데릭 젠슨은 그 모든 문제들의 배후에 생산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생산성이 향상될수록 추상성 또한 커지면서 개인들 간의 유대의 끈이 사라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심리적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살인도 용이해진다.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기술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정당화하든 코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아야만 했다. 인디언들의 머리 가죽을 벗겨내던 정복자들은 숨넘어가는 소리와 식어가는 체온을 직접 느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단추 하나만 누르면 수많은 생명을 살상할 수 있다. 또는 거시경제 정책 하나로도 충분하다.

데릭 젠슨은 생산을 불교의 ‘아귀 개념’이 현실에서 구현된 것으로 본다. 먹을수록 채워지지 않는, 영원히 만족할 수 없기에 스스로가 소멸할 때까지 멈출 수 없는 허깨비라는 것이다. 실제로 돈은 만져지지 않는다. 우리가 만지는 것은 종이지 돈이 아니다. 돈은 숫자다. 그렇기에 내가 얼마나 배불리 먹었는지를 느낄 수가 없다. 그 끝이 정해질 수 없는 숫자이기에 채우고 또 채워도 만족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숫자에 비례하여 실제로 불어나는 것도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소외감과 소통 부재, 매년 수십만 명의 아이들을 죽이는 기아, 값이 너무 싸서 쓰고 버려도 되는 노예들, 그리고 천문학적인 수치로 높아져가는 생태 파괴에 대한 빚이다.

차별과 배제, 혐오는 문명의 형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데릭 젠슨은 문명의 시작과 함께 탄생한 노예제를 그 근거로 든다. 고대 문화의 꽃, 헬레니즘은 노예제를 통해서만 가능했고 노예제가 없었다면 그리스 국가도, 그리스 예술과 과학도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유럽 국가도 없었을 것이고, 문명이 주는 고상함과 안락함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문명의 기본 조건은 바로 타인을 착취하고,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다.

▲ 필자사진_ Derrick Jensen
▲ Derrick Jensen

데릭 젠슨은 오늘날 경제라는 이름으로 많은 잔학 행위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도 노예제와 그 외 강제 노동은 언제나 문명의 기반 역할을 해왔으며 모든 생명에 대한 혐오, 멸시, 무시가 자본주의 경제의 기초라 꼬집는다. 자본주의는 경쟁에 기초하기 때문에 혐오, 위험, 공포를 낳는다. 심해지는 경쟁은 경쟁자들에 대한 혐오를 무한으로 키운다. 생명보다 생산을 높이 평가하는 것, 사람을 도구로 보는 것, 소수를 위한 다수의 착취에 기초하는 시스템 안에서 사회는 인간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이윤 극대화는 반윤리적인 행위를 유발하며 이는 자연스럽게 혐오 집단을 만들고 갈등을 촉발한다. 전쟁과 독점은 경제에 가장 효과적이다.

미디어는 사회의 권력 구조를 그대로 전파한다. 아이들은 왜곡된 이미지를 흡수해 편파적인 가치관을 가진다. 혐오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뿌리는 깊어지게 되며, 언제부턴가 그것은 혐오로 느껴지지 않는다. 저자는 세상은 늘 변하지만 변함이 없다고 말한다. 권력은 명칭과 얼굴만 바뀌어 왔을 뿐, 경쟁 사회에서 적절치 않은 대상에게 표출되는 분노는 불가피한 결과라는 것이다.

데릭 젠슨이 제시하는 해법은 ‘구체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 스스로에게 가하는 잔학 행위를 멈추고 싶다면, 그것을 일으키는 사회 경제적 조건을 이해하고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성 회복, 그 방편으로 저자는 우리 체제의 결함을 일깨워주는 소외된 사람들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전한다. 반면에 부정의, 불합리에 저항하고 항의하는 전통 또한 강력하게 존재해 왔으며 진실을 말하고 다양성을 회복하려는 노력도 계속돼야 한다고 독려한다. 그러면 “짙은 어둠의 시대에도” “혐오와 자기합리화의 문화를 극복하는 변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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