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는 인간만이 아닌 비인간 타자들과 공생하는 공-산(共-産)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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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는 인간만이 아닌 비인간 타자들과 공생하는 공-산(共-産)의 세상
  • 임병태 기자
  • 승인 2020.07.12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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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 최유미 지음 | b(도서출판비) | 303쪽

이 책은 과학기술학자이자 페미니스트 이론가이며 동물학, 생태학에서도 독창적인 사유를 전개해온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사유 전반을 담은 책이다. 공-산(共-産)은 ‘함께’를 의미하는 심(sym)과 ‘생산하다’를 의미하는 포이에시스(poiesis)의 합성어인 심포이에시스(sympoiesis)의 번역어로 택한 말이다.

모든 제작이나 생산은 다른 무언가와 함께-제작하는 것이고 함께-생산하는 것이다. 혼자 일하는 장인도 그의 도구들과 함께-제작하고, 홀로 조용히 서서 생존하는 소나무도 햇빛, 물, 땅 속의 균류와 영양소 등과 함께 자신의 생명을 생산한다. 후자의 경우는 제작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으니 심포이에시스를 함께-생산함을 뜻하는 공-산으로 번역하였다. 모든 생명은 그렇게 다른 무언가와 함께하는 공-산의 체계 속에서 생산된다. 이처럼 공-산은 ‘누구’도 혹은 ‘어떤 것’도 상호의존적인 관계 바깥에서 나고 성장하고 만들어질 수 없음을 표명하는 말로 해러웨이 사유의 핵심적인 개념이다.

공-산은 누구도 독점적인 소유자이기만 했던 적은 없었고, 모두가 평등했던 적도 없었음을 표명하는 말이다. 유한한 생명은 반드시 ‘무엇’을 필요로 하고, ‘누구’인 자와 ‘무엇’이 된 자의 권력 관계는 당연히 불평등하다. 하지만 ‘누구’와 ‘무엇’이 항상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주체(누구)와 대상(무엇)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에 민감했던 페미니즘은 주체와 대상의 행복한 합일을 추구했고, 자신의 몸에 타자를 받아들이는 ‘여성성’에서 그 희망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 역시 ‘무엇’을 필요로 하는 ‘누구’이고, ‘누구’에 대한 ‘무엇’이기도 하다.

▲ 도나 해러웨이 사진1(위키피디아 코먼스)
▲ 도나 해러웨이 (위키피디아 코먼스)

폭력이 없고 이용(exploitation)이 없는 무구한 위치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일방적인 폭력도 일방적인 이용도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성이 공-산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평등해진 후에야 공-산이 가능해진다고 여길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한 번도 공-산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지구의 공-산 시스템에서 퇴출될 위기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공-산을 이야기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생명과 사회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법들은 개체를 중심에 두었기에, 진화는 개체가 세대를 넘어서 분기해가는 수목형의 토폴로지로 이해되었고, 인권, 동물권 등의 권리담론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해러웨이는 공생에 관한 최신의 이론들을 참조하면서 진화의 토폴로지는 구불구불한 오솔길로 이해하고 개체의 권리보다는 상호 구성적인 관계를 주목한다.

이 책은 주체와 대상이 없는 조화로운 합일의 유토피아를 상정하지 않는다. 상대가 ‘누구’일 때 나는 반드시 ‘무엇’일 수밖에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언제나 주체(목적)이고 비인간은 대상(수단)이라는 서구의 인간학은 역동적이고 세속적인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 책이 포착하는 것은 일방적인 지배가 실패하면서 열어놓는 의외의 가능성들이고, 인간만이 아닌 비인간 타자들과 공유하고 있는 공-산의 세상이다.

해러웨이는 경계에 있는 자들의 전복적인 형상을 통해 자연/문화, 여성/남성, 동물/인간, 기계/유기체 등의 온갖 이분법과 대결해 왔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 가운데 하나인 <사이보그 선언>은 우주전사 일색이었던 사이보그 이미지를 여성-기계-동물 하이브리드로 재형상화하면서 페미니스트 사이보그의 가능성을 열었다. 2003년에 발표된 <반려종 선언>은 평범한 개로부터 반려종이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개는 친숙한 자이지만 동시에 잘 알지 못하는 자이다.

오랜 세월을 우리와 함께 살아온 인간, 비인간 타자들 역시 친숙한 자와 잘 알지 못하는 자가 겹쳐진 ‘중요한 타자’이다. 중요한 타자는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로 환원되지 않고, 때로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타자를 위한 실천적인 윤리는 무엇과 단절하고 무엇과 연결할 것인지를 묻는다. 또한 이 책은 해러웨이의 페미니스트 인식론과 과학기술론을 중요하게 다루는데, 해러웨이는 과학기술을 특권화하지 않으면서 함께 살기위해 유용한, 그러나 무구하다고 할 수 없는 지식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생태위기와 기후위기, 그리고 감염병의 전 지구적인 대유행의 시대다. 이 위기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이 책은 긴급성을 가지고 이 위기에 대처할 것을 주장하지만,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인간만의, 혹은 남성만의 세계가 아니고 인간 비인간, 공-산의 존재자들이 오랜 세월 함께 만들어온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혹은 우회로를 만들기 위해 저자는 인간-비인간의 협동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창의적으로 계승할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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