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대화의 과잉 정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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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대화의 과잉 정치화
  •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 승인 2020.07.06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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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사색]

코로나 19로 인한 고용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난 4월 18일 민주노총이 제안한 ‘코로나 19 대응’을 위한 원포인트 사회적 대화는 5월 20일 ‘코로나 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표자회의’를 시발로 본격화되었음에도 7월 1일 민주노총이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끝내 합의안에 동의를 얻지 못하면서 노사정 사회적 대타협은 다시 ‘헛소동’으로 끝나게 되었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대의원대회를 열어 합의안에 대해 재차 동의를 구하겠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사실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의사와 여건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이미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반복된 사회적 대화의 실패경험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1998년, 2004년, 2015년 3차례의 ‘사회적 합의’가 있었고,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민주노총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 딱 한 번 사회적 대화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민주노총은 당시 김대중 정부의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을 맺었다가 정리해고제 요건 완화와 파견법 시행 등에 합의했다는 점을 문제 삼은 내부 반발로 탈퇴한 후 사회적 대화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버렸다. 이후 두 차례의 사회적 대화는 한국노총만 참여하는 노사정 합의로 진행되었고, 민주노총은 그때마다 대정부 투쟁으로 대처하는 관행마저 생겨났다. 가장 큰 이유는 지난 20여 년 동안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 아래 정치권이 과도하게 시장의 이익을 옹호하고, 노동의 유연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무리한 입법화를 추진해 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말의 진실도 있다. 실제로 노사정이 주도하는 사회적 대화의 성과는 언제나 입법화로 평가하는 경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입법화는 당사자 간의 합의를 못믿기 때문에 법으로 일종의 행위수칙(code of conduct)을 만드는 것인데, 그것이 과도하여 노동계에서 보면 항상 불리한 조건을 합의문에 못 박아 관행을 제도화하는 ‘악마의 맷돌’처럼 인지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제위기 상황에서 경영계의 요구와 이를 담보하려는 정치권의 과도한 입법화가 이를 추동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노동계도 반대급부적인 요구사항의 입법화를 요구하여 사실상 사회적 대화는 사회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이 아니라 법률적 쟁점이 중심이 되고, 경제문제에서 출발하여 결국은 노동법 학자들의 이해조정과 국회의 입법화로 끝나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법만능주의적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왜 그럴까?

기본적으로 사회적 대화를 위한 이해당사자 간의 신뢰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신뢰부족은 다 알다시피 나쁜 경험에서 학습된 것이고, 법제화라는 강고한 장치를 동원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기에, 우리의 사회적 대화는 현실적으로 신사협정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했다. 서구의 노사정 대화 합의문을 보면 대체로 간결하고 명료하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합의를 하면 이를 지키려는 후속 행동 조치가 당연히 뒤따라야만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예외 없는 것은 불가능한지라 일정한 수준의 자율적 결정 범위는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사회적 대화와 협약 당사자의 책임 준수는 기본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노사정 사회적 대화가 강조될 때마다 결국 불신을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입법을 앞세우다 보니 사회적 대화자체가 일종의 과잉 정치화 현상을 부르고, 합의문이 장황하다. 이해당사자 간의 대화를 위한 노력보다는 내부자들에게 보여주는 정치적 목소리에 더 민감하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노동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를 중재할 정부마저 탄력근로제와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 등의 의제를 앞세워 대화 자체를 냉각시켜버렸다. 물론 중산층 지지층에 대한 메시지 전달이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노동계가 그토록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슈의 과도한 법제화를 내세워 굳이 사회적 대화를 파행으로 끌고 갈 필요가 있었나 싶다. 그것이 중요한 이슈가 아니라서도 아니다. 사회적 대화에서 굳이 민감한 쟁점을 피하자는 이유도 아니다. 사회적 대화가 작동하려면 보다 보편적이고, 노사정이 공감할 의제를 두고 논의를 해야 실효적일 텐데, 처음부터 화력을 집중해야할 의제를 들고 나와 꺼져가는 전투성에 불을 질렀다. 역시 이해당사자의 역할과 역량부족만큼 정치권의 조급성과 의제의 과도한 정치화가 문제이다.

사실 노사정의 문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적 대화의 내용을 차용한 일련의 사회적 협의 과정을 보면 극단적인 목소리에 비해 합의의 결과는 너무 미비한 것들이 부지기수다. 정치적 부대비용이 과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대부분 정치적 성과를 겨냥한 것들이다. 모든 사회적 행위가 정치적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부정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어떤 분야에서든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면 우선은 이해당사자의 노력과 역할에 주도권을 넘길 필요가 있다. 정치의 과잉화는 결국 행위의 과잉화를 불러 불신을 낳고 과도한 요구로 대화 자체를 무산시키기 때문이다. 주체의 행위능력이 부족할 때 언제나 공론장에서 담론의 과잉 정치화를 요구한다. 마치 두려움이 많은 개가 더 크게 짖듯이 말이다. 그러한 점에서 어떠한 영역에서든 사회적 대화에 대한 보다 엄밀한 준비와 노력이 요구된다.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독일 마부르크 대학교 사회학 박사. 현재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비판사회학회에서 발간하는 <경제와 사회> 편집위원장, 한국이론사회학회 부회장,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기획평가위원을 맡고 있다. 주 연구분야는 정치경제학, 노사관계, 정치사회학, 현대 사회이론이다. 주요 저서로 <전환시대의 논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중위기>, <경제의 디지털화와 노동의 미래>, 공저로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문화, 환경, 탈물질주의 사회정책>, <청년실업과 노동시장, 그리고 국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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