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출판의 위기, 방치해도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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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출판의 위기, 방치해도 좋은가
  • 백원근 서평위원/책과사회연구소 대표·출판평론가
  • 승인 2020.07.0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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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의 모든 부분이 타격을 받고 있다. 대학 역시 대부분의 학교가 비대면 온라인 강의를 진행하면서 수업 만족도에 대한 문제부터 등록금 반환 논란에 이르기까지 바람 잘 날이 없다. 지난 한 학기 내내 대학의 정체성이나 교육 방식을 둘러싼 고민은 물론이고 대학의 내일을 걱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학사 일정상으로는 여름방학이지만 예전처럼 느긋한 하계 휴식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코로나19와 함께 성찰의 시간은 길어질 전망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대학 교재 등을 펴내는 학술출판의 위기는 더욱 깊어졌다. 책은 물성이 있는 매체이지만 개인적으로 읽는 비대면 매체라는 본원적 특성 때문에 출판계 전체가 어려움을 겪은 것은 아니다. 초중고의 등교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도서관도 문을 닫으면서 어린이 청소년 도서는 전년 동기 대비 더 많이 판매되었다. 과제 도서를 읽어야 하므로 이 분야의 인터넷서점 매출은 지난해보다 상당히 증가했다. 반면 대학의 온라인 강의에서는 대부분 파워포인트 자료 등을 활용하면서 교재 판매가 대폭 하락했다. 학술출판계는 지난해 대비 60% 안팎의 매출 하락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출판 분야에 따라 명암이 명확히 갈린 것이다.

어려움을 겪는 출판계를 대표하여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지난 4월 8일 교육부에 교재 구입 쿠폰 15만 원을 대학생들에게 지급하여 교재 구입에 사용할 수 있도록 예산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막대한 재정 지출이 어렵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또한 디지털 파일로 손쉽게 복제와 전송이 가능한 상황에서 불법복제 방지를 위한 저작권 교육의 실시를 대학평가 항목에 반영하도록 요구했으나, 대학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이유로 즉각 실시가 어렵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리고 학점은행제 원격교육 업체들이 정당한 저작권료를 지급하지 않고 출판물을 불법 사용하는 상황에서 출판사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 달라는 요구에 대해, 교육부는 작년에 권고한 바 있다고 밝혔다. 다만, 대학 원격수업에서 어문저작물의 10%를 초과 사용하지 않도록 하는 저작권 보호 지침을 교·강사들에게 공지하여 출판권자의 권리 침해를 막아달라는 요청에 대해서는 교육부가 저작권 교육을 지원하겠다는 다소 형식적인 답신으로 돌아왔다. 교육부가 출판사들의 절박한 요구를 콧등으로도 듣지 않는 현실을 생생히 보여준다.

불법복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출판사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판면권 보호 입법도 정부의 소극적 태도와 저작권자 단체들의 반대로 인해 답보 상태다. 출판사들이 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노력을 저작인접권처럼 보호해 달라는 것인데, 이것이 마치 저작권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처럼 왜곡되고 있다. 음악 연주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연주의 질이 달라지는 것처럼 출판사들이 들인 노력 여하에 따라 품질 좋은 책이 만들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현행 저작권법은 연주자의 권리는 저작인접권으로 보호하지만, 출판사는 그와 유사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수업목적 저작물 이용으로 인해 침해된 출판사의 권리를 보상받을 수 있도록 출판권자를 저작권자처럼 보상권자로 인정해 달라는 요구 역시 계속 거절당하고 있다.

▲ 대학가 복사가게에서는 교재 불법 복제 행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 대학가 복사가게에서는 교재 불법 복제 행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저자와 출판사는 책의 생산 과정에서 일심동체와 같다. 책이 보다 많이 읽히고 판매되는 것이 공동의 이익이자 사회적 이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제에서는 저작권자의 권익이 적극 옹호되는 반면 출판사의 합리적인 요구는 무시되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다. 정부 정책 기능이나 국회의 입법 기능도 그 잘못된 상식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학술도서 판매량이 떨어지면 당장 소규모 출판사들부터 경영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약자부터 쓰러뜨리는 것이 코로나 법칙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지속 가능한 학술출판 생태계 조성을 위한 법과 제도적 기반, 그리고 대학의 구매력, 세종도서 등 학술출판 지원제도의 한계가 여전히 개선되지 못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술도서 친화적인 생태계 조성은 요원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영세 출판사들 다 죽는다는 이야기는 닳고 닳은, 답도 없는 주제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학술도서는 학문 연구의 결과를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전승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학술서 출판사나 출판계가 시대 변화에 맞춰 지식 전달 수단을 다변화하려는 진화 노력 못지않게 법과 제도, 정책 역시 진화가 필요하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고사 위기에 처한 학술출판에 대해 정부와 사회의 관심이 높아지기를 기대한다. 대학과 학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인 학술도서 출판의 급격한 추락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치해서는 안 된다. 오늘이 어렵더라도 미래를 꿈꿀 정도의 최소 안전망이라도 있어야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것 아닌가. 학술출판을 지원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소중한 학술 생태계를 함께 지키고 더불어 상생하는 내일을 만들자는 말이다.


백원근 서평위원/책과사회연구소 대표·출판평론가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로 한국출판학회 부회장 겸 출판정책연구회장, 일본출판학회 정회원이다. 대학에서 출판문화론 등을 강의한다.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화체육관광부 규제개혁위원, 서울도서관 네트워크 위원장, 경기도 지역서점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한국출판산업사』를 썼고, 옮긴 책으로 『서점은 죽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책』, 『책의 소리를 들어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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