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의 유학(儒學)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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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의 유학(儒學) 수용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6.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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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4강>_ 김언종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의 「한중일의 유학 수용」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4강 김언종 교수(고려대 명예교수)의 강연 중 서론과 결론 부분을 발췌해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김언종 교수는 유학(儒學)의 기본 키워드를 정리한 뒤 유학의 발상지인 중국을 필두로 그 전파 순서를 따라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어떻게 유학이 받아들여졌는지를 추적한다. 구체적으로는 중국에서 북송오자(北宋五子), 남송(南宋)의 주자, 그리고 명대(明代) 중엽 왕양명이 걸어간 길을 좇아보고, 고려 말 성리학이 “불교 비판과 일상 윤리”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 땅에 수입된 이래 확산 보급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사단칠정 논쟁으로 커다란 불꽃을 틔우고 실학으로 이행하기까지 여정을 살핀다. 삼국 가운데 마지막으로 일본의 경우 유학의 전래 이후 특히 근세에 도덕주의 주자학파와 그에 맞선 양명학파 그리고 고학파의 흐름이 어떠했는지 일별한 다음, 세 나라 유학 수용의 변별점을 오늘의 시각에서 짚어 보인다.

▲ 지난 5월 30일, 김언종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4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5월 30일, 김언종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4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유학 원론 한마디

1) 유(儒)란 무엇인가?

먼저 ‘儒(유)’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보자. 상(商)나라(B.C. 1600~B.C. 1046) 때 만들어진 이 글자의 원형에는 사람을 상형한 ‘大(대)’ 주위에 몇 개의 점이 찍혀 있다. 점은 물방울이고, 물방울들은 이 사람이 제사를 앞두고 목욕재계하는 상황을 나타낸다. 이 사람이 제례(祭禮)나 상례(喪禮)를 집행하는 제관임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제자 자하(子夏)에게 “너는 군자유가 되어야지 소인유가 되어선 안 된다(子謂子夏曰, “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고 하였다. 여기서 소인유란 예악(禮樂) 주관과 집행에서 형식에 그치거나 형식에 치우친 유인 반면, 군자유는 형식과 내용, 즉 문질빈빈(文質彬彬)한 유이다. 재능과 덕을 겸비하고 선을 바탕으로 유소불위(有所不爲), 즉 아무리 큰 곤경에 처해도 절대로 하지 않는 일이 있으며, 세상이 알아주면 겸제천하(兼濟天下)하고 그렇지 못하면 독선기신(獨善其身)하는 원융한 인격을 갖춘 사람, 즉 도덕을 갖춘 사람을 의미하게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유자가 필수로 익혀야 할 교양은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이었는데 한대(漢代)에 와서 역(易)을 더하였다.

2) 공자는 유학(儒學)의 창시자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자 유학 사상의 성립에 주나라 초기의 주공(周公) 희단(姬旦)부터 동시대의 ‘노나라 군자(君子)’ 들에 이르기까지, 신본주의(神本主義)의 완고한 틀을 벗어나 인문주의(人文主義) 경향의 사상을 가지고 행동한 수많은 선배들의 영향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공자의 주요 언설로 여기는 ‘극기복례(克己復禮)’도 공자가 처음 제기한 것이 아니라 앞 시대 선각 인문주의자들의 말로 그 인용이었다. 노나라 군자의 범위에서도 류하혜(柳下惠)ㆍ좌구명(左丘明) 같은 사람이 금방 부각된다. 특히 주공(周公)은 공자의 유학 사상 확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주공의 사상은 명덕(明德)ㆍ신벌(愼罰)ㆍ경덕(敬德)ㆍ보민(保民) 등인데, ‘경천애인(敬天愛人)’, 이 한마디로 집약할 수 있다. 경천(敬天)에 그친 은상(殷商)과 크게 다르다. 이상 사정을 전제로 공자는 유학의 집대성자이자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중국 학계는 공자를 유학의 ‘실제창립자(實際創立者)’라 부르기도 한다.

3) 유학의 핵심인 인(仁)은 무엇인가?

『논어』에서 공자가 인을 언급한 사례가 많지만, 제자들의 질문에 피력한 공자의 대답에서 살펴보는 게 좋겠다.

樊遲… 問仁. 曰, “仁者先難而後獲.” (『논어』 「옹야」)
子曰,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논어』 「옹야」)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논어』 「옹야」)
仲弓問仁. 子曰,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 「옹야」)
樊遲問仁. 子曰, “愛人.” (『예기(禮記)』 「표기」편: 子曰, “以德報怨, 則寬身之仁也.) (『논어』 「옹야」)

4) 아성(亞聖) 맹자 사상의 핵심

(1) 성선설(性善說)
告子曰, ‘性無善無不善也.’
或曰, ‘性可以爲善, 可以爲不善.’
或曰, ‘有性善, 有性不善.’
今曰‘性善’, 然則彼皆非與?”

(2) 사단설(四端說)
惻隱之心, 仁也, 羞惡之心, 義也[사생취의], 恭敬之心, 禮也, 是非之心, 智也.
 (인의예지는 하늘의 선물, 측은 수오는 인간의 자유)
“惻隱之心, 仁之端[발단]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端, ◎ 趙岐曰: 首也. 人皆有仁義禮智之首, 可引用之. ◎ 朱子曰: 緖也. 說文曰, 緖, 絲端[실끝]. 양백준은 맹아(萌芽).)

(3) 민귀군경설(民貴君輕說)
孟子曰,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5) 유학의 성경 - 사서오경(四書五經)

『논어』ㆍ『중용』ㆍ『맹자』ㆍ『대학』을 사서라 하는데, 유학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책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남송의 주희가 적극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삼경 즉 『시경』ㆍ『상서』ㆍ『주역』, 혹은 오경, 『시경』ㆍ『상서』ㆍ『주역』ㆍ『춘추(좌씨전ㆍ공양전ㆍ곡량전 포함)』ㆍ『예경(의례ㆍ주례ㆍ예기 포함)』이 사서보다 훨씬 중요한 책이었다. 『중용』과 『대학』은 한대에 편찬된 『예기』 49편 중 2편이었다. 『시경』은 문학, 『상서』는 정치학ㆍ사학, 『주역』은 유가 사상과 일정한 거리가 있는 철학 전적이다. 이에 비해 『논어』ㆍ『중용』(공급[孔伋]의 저술)ㆍ『맹자』ㆍ『대학』(진한간[秦漢間] 유학자의 저술)은 유학 사상을 체계화하여 서술한 책이다. 유학의 정수라 할 만하고 주희가 일생의 공력을 들여 선양하고자 한 이유를 알 수 있는 것들이다.

6) 공맹 유학의 특질과 기본 정신

유학의 특질을 논의하기에 앞서 그 가장 중요한 덕목(德目)을 알아보자. 당연히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그것이다. 공자는 산발적으로 제시하였고 맹자가 이를 측은ㆍ수오ㆍ사양ㆍ시비지심과 연결하여 한 범주로 일관 정리하였다. 이 인의예지를 바탕으로 한 유학의 특질과 기본 정신을 탕일개(湯一介)는 다음 여섯 가지로 정리하고 그 특징을 제시하였다.

① 인문주의(人文主義) : 유학에 원시 종교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종교라고 볼 수 없다. 유학의 주요 관심은 사회ㆍ인간에 있지 내세 천당 지옥에 있지 않다.
② 도덕주의(道德主義) : 종법 윤리 중심의 향선(向善)을 강조, 선우후락(先憂後樂)의 실천을 중시한다.
③ 전통주의(傳統主義) : 과거의 사회 제도와 행위 방식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이를 소화 흡수 개조 가공하여 계층화 이론화 규범화한다.
④ 천인합일(天人合一) : 운명천 인격천 주재천에서 의리천 도덕천으로 이동한 천인합일.
⑤ 중용원칙(中庸原則) : 도통의 중심이다. 목숨 건 결투가 없다. 감정적 충동이 적다. 극단으로 기울지 않는다.
⑥ 강건유위(剛健有爲) : 부드러움 속의 강함, 외유내강. 무위(無爲)를 거부하고 적극적 진취적이다. 자강불식(自彊不息). 강포(强暴)를 두려워하지 않고 희생을 겁내지 않는다.

2. 한중일의 유학 수용의 변별점

중국의 경우 2500여 년, 한국의 경우 2000여 년, 일본의 경우 1700여 년, 사상계의 중심에서 풍미했던 선진 유학과 성리학의 맥락은 이제 더 이상 지속할 여력이 없어 유물이 되고 말 것인가? 쉽게 제기할 수는 있지만 쉽게 논의하기 어려운 거대한 문제이며, 집단지성이 검토하여야 할 우리 시대 전체의 현안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 서구화의 길을 걸어 유학과 멀리 떨어져서 다시 가까워질 가능성이 거의 없고, 한국은 거리가 멀어졌으나 아주 단절된 상태는 아니며, 중국은 의외로 공산주의의 대안 가운데 하나로 대두되어 다시 다가서고 있다.

우리 현실의 담론과 사상의 풍경으로 돌아와 보자. 유학의 저변이자 성리학의 골간인 이기론(理氣論)을 인식과 판단의 틀이나 모색과 준용의 기준으로 삼거나,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거나 거론하기를 즐기며 지지하는 사람이나 사례가 드물다. 유학의 관점과 가치관도 거의 경시되고 있는 듯하다. 자식이 부모를 경찰에 고발해도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부부가 서로 불륜을 감행하여도 놀라지 않는다. 장유의 서차는 서로 부담스러운 질서가 되고 있고, 신의 없는 우정도 우정이며, 사제의 정의(情誼)가 희석되며 교수의 강의는 서비스의 일종이 되고 있다.

역사상 최악의 공자 비난자라 할 오우(吳虞, 1872-1949)의 다음과 같은 말에도 이제 사람들이 별로 분개하지 않는 듯하다. “盜跖之爲害在一時(도척지위해재일시), 盜丘之遺禍及萬世(도구지유화급만세). 鄕愿之誤事僅一隅(향원지오근일우), 國愿之流毒遍天下(국원지류독변천하).” 도구(盜丘)는 ‘도척(盜跖)과 같은 도적인 공구(孔丘)’의 준말이고, 국원(國愿)은 ‘국가 차원의 위선자’로 공자를 가리킨다.

중ㆍ한ㆍ일의 유학은 과학기술을 동반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세와 인권을 내포한 민주주의(民主主義)가 ‘파급’되어 오자 제대로 대항 한번 못해보고 봉건 유제(遺制)와 더불어 모래언덕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유허에서 여전히 미련이 이어지고 있다. ‘보석’처럼 교환 가치가 크거나 일상의 ‘음식’처럼 활용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남아 있는 것인가? 송대 유학의 언설 가운데 ‘존천리(存天理) 거인욕(去人慾)’이 있다. ‘하늘의 이치를 내면화하고, 과도한 욕망 추구를 스스로 그치자’는 절제의 언어이다. 이 경구는 사리사욕을 이기고 공동체의 공익을 우선하자는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와 다르지 않은데, 자본의 논리에 탐닉하거나 자본의 횡포에 취약한 오늘의 다수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면서도 불편해 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모순성 복합에 오늘 유학의 운명도 중첩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맹자의 통찰대로 인류에게 이성과 양심이 있고 진정한 행복을 희망하는 의지가 있기에 이에 부응한 유학도 취택과 개신의 과정을 거쳐 지속되면서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조정하는 기준으로 활용될 것이라 믿는다.

유학은 지난 봉건 유제와만 관련된 낡은 사상만이 아니다. 인간성 탐구의 한 결과이며 삶을 성숙으로 이끄는 강력한 자양이다. 유학의 주제는 인간성의 근본과 관계되어 인간의 자기 탐구에서 결국 배제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며, 이 질문과 모색은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 삶의 고양에 기여하고 개인과 사회의 유대와 행복을 증진한다. 소문과 선입견이 무성한 가운데 늘 대중은 유학을 잘 모른다. 예를 들면, 공자는 부귀를 배격하지 않았다. 불의(不義)한 수단으로 쌓은 부귀를 허망하다고 경시하였을 뿐이다(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우리가 유학을 버린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불의한 부귀를 조장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럴 수 있겠는가? 빈부 양극화 해소와 공동체의 결속에는 정당한 부귀뿐만 아니라 인의예지가 필요하다. 인의예지는 여전히 나와 타인이 서로 기대하는 소통의 진정한 자질이다. 유학이 문제가 아니라 유학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위선을 감행하는 인간이 늘 문제였지 않는가? 『논어』ㆍ『중용』ㆍ『맹자』ㆍ『대학』은 그런 우리 인간을 격려하고 고침의 에너지를 제공한다.

현대의 삶에서 유학은 이제 옛 권위를 회복할 수 없고 옛 존중과 추앙을 기대할 수도 없지만, 모든 사람들의 의식에 삼투(滲透)되어 있기도 하다. 삶을 지배하는 강력한 이념이나 사상으로서의 양식성은 희석되었지만 기본 윤리나 기초 생활 규범으로 사회에 풍화되고 체화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윤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평소 객관화하지 못하는 상태일 뿐이다. 한국 유학 수용의 역사가 2000여 년이다. 유학의 덕목들은 우리의 문화와 정신사에서 배제할 수 없으며 그 자체 유전자로 전승과 승계를 반복해나갈 것이다. 중국도 일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알고 보면 오랫동안 오해의 두터운 이끼가 끼어서 그렇지 유학도 실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최종 목표로 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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