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均如傳〉을 지은 혁련정(赫連挺)(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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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均如傳〉을 지은 혁련정(赫連挺)(상)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0.06.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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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18)_<均如傳>을 지은 혁련정(赫連挺)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균여전(均如傳)>에 대해 들었다. 그 안에 향가가 11수 들어 있어서 향가 연구의 중요한 자료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정작 어떤 향가가 들어있는지 제목 한두 개 외에는 배운 기억이 없다. 보현십원가였던가? 생각건대 우리나라 학교 교육의 실상이 다른 과목도 이와 대동소이하지 싶다.

▲ 균여전(均如傳).(사진출처=나무위키)
▲ 균여전(均如傳).(사진출처=나무위키)

그런데 뒤늦게 <균여전>의 내용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자못 놀랍고도 기쁘다.

“... 그러나 한스러운 것은 우리나라 재자(才子)와 명공(名公)들은 당나라 글귀는 읊을 줄을 알지만, 저 땅의 거유(巨儒)와 대덕(大德)이라도 우리 노래는 알지 못한다. 하물며 당나라 글은 제망(帝網)과 같아서 우리나라에서는 읽기 쉽지만, 우리글은 마치 범서(梵書)를 연철한 것 같아서 저 땅에서는 알기 어렵다. (중략) 대저 이와 같으므로 팔구행의 당문(唐文)으로 서(序)한 것은 뜻이 넓고 글이 풍부하지만, 11수의 노래는 사(詞)가 맑고 구(句)가 곱다. 그 지은 바를 일컬어 사뇌(詞腦)라 한다”.(https://namu.wiki/w/%EA%B7%A0%EC%97%AC%EC%A0%84의 글에서 따옴)

위의 인용 글 중에 “우리글은 마치 범서를 연철한 것 같다”는 부분은 고려시대에 이미 우리글이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된다. 그리고 한글의 글꼴이 범서 즉 범자와 닮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 성종조의 문인 성현(成俔, 1439~1504년)선생도 아래에서 보듯 자신의 문집 <용재총화(傭齋叢話)> 卷之七에서 “其字軆依梵字爲之” 라고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世宗設諺文廳。命申高靈成三問等製諺文。初終聲八字。初聲八字。中聲十二字。其字軆依梵字爲之。本國及諸國語音文字。所不能記者。悉通無礙。

그렇다면 이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균여전>의 찬자(撰者)는 누구인가? 고려 중기(문종, 숙종, 예종 대)의 문인이자 학자요, 관리였던 혁련정(赫連挺)이다. 그 무렵 전중성(殿中省) 내급사(內給事)로 있던 강유현(康惟顯)이 실제 사실을 바탕으로 고려 초기의 고승 균여(均如, 923년~973년)의 일대기인 <균여전>을 지었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혁련씨가 창운(昶雲) 등 균여의 문도들로부터 자료를 제공받은 뒤 외레 상상력을 발휘하여 허구적 내용을 가미한 전기로 글을 완성했다. 고려 문종 29년(1075)의 일이다.
 
<균여전>은 약칭이고 원 제목은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균여전(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이다. 스님을 가리키는 수좌 앞에 ‘대화엄’이 붙은 탓에 책장을 펼치기 전부터 숙연하다. 하긴 균여스님의 제자가 물경 3,000인에 이르렀다 하니 그 분을 지칭하는 수좌의 수식어로 대화엄이 올 법하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찬자인 혁련정이라는 인물의 출신에 관한 것이다. 複姓인 赫連이라는 성은 百家姓에 수록된 중국 성 중 제417位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5,582개의 성씨가 있으나(2015년 기준) 혁련이라는 姓은 없다. 대가 끊긴 것일까? 그런 점도 궁금하거니와 지금으로부터 거의 천 년 전 유목민인 혁련씨가 文宗왕 치하의 고려 조정에서 進士에 합격하고 숙종 5년(1100년)에는 거란족의 나라 요(遼)에 사신으로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예종이 즉위한 1105년에는 장락전학사(長樂殿學士)ㆍ판제학원사(判諸學院事)라는 관직을 수여받고 당당히 봉직하고 있었다는 점이 또 놀랍다.

결국 이런 점 등이 고려 사회가 이미 글로벌화 되어있었다는 증좌라 여겨진다. 아다시피 고려 가요 <쌍화점>에 등장하는 回回아비는 回回敎 즉 이슬람교 신자인 무슬림이고, 花山李氏의 시조는 고려 왕조 고종 시절인 1226년 정란이 일어나 화를 피하기 위해 바다로 나섰다가 표류해 황해도 옹진 해안에 정착한 베트남 리왕조의 왕자 이용상이다.  
 
균여전을 쓴 혁련씨는 어떻게 고려인이 되었을까? 그에게 후사(後嗣)는 없었을까? 혁련씨는 원래 匈奴 련제씨(攣鞮氏)로 그 족속은 다 흉노 최고지도자 선우(單于)를 배출하는 우두머리 집단에 속한다. 왕비인 연지(閼氏)는 호연씨(呼延氏) 집단에서 나온다. 呼延은 투르크어로 ‘羊’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 때 이 땅에 살면서 균여전을 쓸 정도의 문재를 지닌 혁련씨와 관련된 이야기는 인간사를 이해하기에 여러모로 적합하다.
 
오호십육국 시기 흉노 철불부(鐵弗部)의 류발발(劉勃勃)이 大夏를 건립하고 대하천왕, 대선우를 칭했다. 그가 성씨를 혁련으로 바꾼다. 류발발은 흉노 좌현왕 去卑의 아들 劉虎의 후손으로 류호는 모친이 鮮卑族 여인이다. 이렇게 胡父와 鮮卑母 사이의 所生을 흉노 지배계층에서는 부계인 정통 련제씨로 취급하지 않고 철불鐵弗(또는 철벌鐵伐)로 성씨를 삼았다. 서얼 취급한 셈이다.
 
한족의 姓인 劉가 아닌 차별이 엿보이는 유목민 성 鐵弗이 마음에 들 리 없었던 발발은 자립하여 407년 섬서성 일대에서 大夏를 세우며 “帝王者, 系為天子, 是為徽赫, 實在天連”라는 뜻으로 철불을 혁련으로 改姓하며 혁련발발이 되고 그리하여 혁련씨의 시조가 된다. 그러나 야심차게 건국된 대하는 오래가지 못하고 혁련발발의 5남이자 3대 선우인 혁련정(赫連定)대에 이르러 탁발선비인 색로(索虜) 탁발도(拓跋燾)에 의해 파멸하기에 이른다(431년). 그리고 흉노는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철불부와 수나라 최초의 황후이자 수양제 양광의 어머니로 잘 알려진 獨孤伽羅의 출신부족인 獨孤部와의 관계, 세레자 요한의 목을 베도록 한 살로메와 닮은꼴 행적을 보인 독고황후의 성정 등의 이야기와 함께 혁련씨를 찾는 말뿌리 기행은 다음 글에서 계속될 것이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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