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의 굴레, 인간의 숙명인가?
상태바
편견의 굴레, 인간의 숙명인가?
  • 석기용 인하대·언어분석철학
  • 승인 2020.06.28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책을 말하다_ 『편견: 사회심리학으로 본 편견의 뿌리』 (고든 올포트 지음, 석기용 옮김, 교양인, 840쪽, 2020.05)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있다. 알량한 식견을 갖고서 마치 세상 돌아가는 일을 다 안다는 듯이 사는 어리석은 사람을 우물 안에서 바라본 하늘이 세상 전부인 줄 아는 개구리에 빗대 나무라는 표현이다. 자, 그렇다면 그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이제는 세상의 실제 모습이 어떠하며 그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일까? 설령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가서 아무리 넓은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한들, 기껏해야 개구리가 개구리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일 뿐이다. 개구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우물 안에서건 우물 밖에서건 개구리의 관점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는 우리 인간의 인식이라고 해서 사정이 특별히 더 나을 것은 없다. 20세기 독일 철학자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의 유명한 어구를 빌어 표현하자면, 우리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 위에 올라탄 신세나 다름없다. 망망대해에서라면 결코 배 밖으로 나갈 수 없고, 그것은 곧 우리가 결코 배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뜻이겠다. 우리는 배에서 내려 내가 지금 배에서 바라본 세상에 대한 판단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스스로 검증할 길이 없다. 우리는 인식자로서의 인식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이 올바른지 제3자의 관점에서 초연하게 판정해줄 소위 신의 관점(god’s eye view) 혹은 새의 관점(bird’s eye view)에 결코 우리를 직접 위치시킬 수가 없다. 우리는 각자 주관적 의식의 배 안에 갇힌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우물 밖이 아니라 우주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근본적 한계이다.

▲ 우물 안 개구리
▲ 우물 안 개구리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에게는 본성적으로 앎의 욕구가 있으나, 불행하게도 이렇듯 주관적 의식 세계 안에 갇혀 있는 인간의 인식 능력은 완벽하지 않고 우리가 세상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과연 절대적 진리인지 검증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에 가로막혀 있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상황에서 두 가지 유형의 독초가 자라나는 암울한 토양이 형성된다. 하나는 아집과 독선에 빠진 사람들이 그런 근본적 한계를 무시하고 절대적 진리의 소유자임을 참칭하며 뿜어내는 독단적인 믿음들이다. 그래서 우물 안 개구리가 자기가 본 하늘이 세상의 전부이며 감히 그것이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다른 하나는 우물 안 개구리나 우물 밖 개구리나 근본적 한계 상황에 처해 있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로부터 극단적 상대주의로 비약하여 우물 안 개구리의 판단이나 우물 밖 개구리의 판단이나 인식적 가치는 그저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무기력한 태도가 빚어내는 믿음이다. ‘너는 너대로 믿고, 나는 나대로 믿으면 그만이다.’ 이른바 편견은 아마도 이 두 가지 독초의 혼종일 것이다. 근거 박약한 믿음을 절대적 진리인 양 고수하면서 때에 따라서는 어차피 진실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며 편견의 보유를 합리화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가 처한 인식적 곤경이 반드시 이런 양극단의 결과를 낳아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며, 따라서 편견을 반드시 퇴치 불가의 대상으로 여겨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비록 우물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절대적 진리에 닿을 수는 없겠으나 우리는 우물 속에 머물지 않고 힘껏 도약하여 바깥세상으로 나아간 개구리의 노력과 그 덕분에 갖게 된 ‘더 나은 믿음’을 존중해야 한다. 주관적 인식의 한계 속에서도 최대한 객관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비록 그로 인해 얻은 믿음이 절대적 진리의 위상에는 항상 미달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인식적으로 더 가치 있는 믿음이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앎의 욕구를 지닌 지구상의 보기 드문 존재로서 근본적인 인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식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비록 절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전보다 더 나은 믿음, 더 나은 앎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신념, 비록 절대적 진리까지는 아니더라도 단지 경직된 주관적 의식의 산물에 그치는 것이 아닌 최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개방적인 태도가 인식자의 의무와 책임을 일깨워준다.

편견은 단지 거짓된 믿음이 아니다. 편견이 검증되지 않은 믿음이기는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모든 거짓 믿음이 다 편견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비난받게 되는 것은, 이를테면 우물 바깥에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한 심지어 자신이 그 바깥세상에 나와 있으면서도 여전히, 어떤 불합리한 이유에서 새로 접한 현실을 무시하고 기존에 우물 안에서 바라본 하늘이 하늘의 전부라는 믿음을 고수하려 할 때이며, 그럴 때 그 개구리는 인식적 책임을 저버리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증거 앞에서 믿음을 수정하는 열린 태도를 보이기는커녕 기존 믿음을 고수하기 위해 증거를 왜곡하거나 아예 불리한 증거의 수용을 거부하면서 최후의 수단으로는 어차피 누구도 절대적 진리는 알지 못하며 각자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볼 뿐이라고 강변한다면, 그는 편견을 쉽게 품게 될 사람이다.

▲ 『편견: 사회심리학으로 본 편견의 뿌리』 원서

사례들로부터 일종의 법칙으로 나아가는 소위 일반화(generalization)라는 사유의 방식을 활용하면 판단을 내릴 때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서 경제적이고 무언가 확신 같은 것을 마음에 심어줌으로써 내면의 위안을 준다. 이런 일반화의 사고방식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 아마도 오늘날 지구에서 인간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극히 소수의 편파적인 사례들만 확보된 상태에서 자기 입맛에 맞게 아무렇게나 일반화하고 그것을 법칙이라며 함부로 휘두르는 것은 인식적으로 무책임한 일이다. 모든 유대인을 악당으로 일반화하면 그다음에는 일을 처리하기가 편리하다. 히틀러가 그랬다. 모든 흑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일반화하면 문제에 대처하기가 간편하다. 가장 큰 걸림돌인 양심의 가책을 덜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로 인한 결과들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들이고 또한 어떤 측면에서는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과연 어떤가? 우리 사회에도 인식자로서의 의무에 충실하지 않은 무책임한 사람들이 다른 어느 사회 못지않게 많은 것처럼 보이며 지역, 이념, 성(性), 연령, 경제 계층, 국가, 민족 등에 관련된 온갖 사회적 편견들이 횡행함으로써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치르고 있는, 또 앞으로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가 않은 것 같다.

Gordon Allport(1897~1967)
Gordon Allport(1897~1967)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가 1954년에 출간한 편견(The Nature of Prejudice)은 인간 사회에 깊게 뿌리 내린 이러한 편견을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그 어느 연구서보다 더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분석해낸 이 분야 최고의 고전으로 오늘날 자리매김해 있다. 이런 뜻깊은 저서를 번역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역자로서는 그야말로 큰 행운이었다. 비록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역자가 이 분야에 해박한 전문 연구자는 아니지만, 이 책을 번역하면서 최고 수준의 사회과학 저서가 보여줄 수 있는 연구의 폭과 깊이, 체계성 그리고 적확한 문제 제기와 그에 대한 건설적 대안 제시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책은 매 장마다 흥미로운 소재와 사례(미국 사회의 편견과 차별에 관한 믿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례들도 많다)가 소개되고 거기에 저자 올포트의 합리적 해석과 주장이 어우러져 책읽기 그 자체의 재미마저 쏠쏠하게 느낄 수 있는 빼어난 가독성마저 갖추었느니 어디 하나 모자란 구석이란 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부디 독자들의 판단도 역자와 다르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역자가 느낀 이 책 최고의 미덕은 학자로서 자신의 연구 결과물이 우물 속 개구리의 편견이 되는 일이 없도록 올포트 본인이 시종일관 고수하고 있는 철두철미한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태도이다. 올포트는 전반적으로 편견이란 개인의 사회화 과정에서 성격이 형성되는 양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그는 확보된 근거 자료 이상으로 자신의 주장을 과장하고 비약하는 일을 철저히 삼가고 비교적 충실한 근거가 확보된 경우라 할지라도 자신의 주장이 논박될 수 있는 가능성을 결코 닫아 놓지 않는다. 한 마디로 올포트는 합리적인 인간으로서 편견에 빠지지 않기 위한 노력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이 책에서 몸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인간은 비록 불완전한 인식자이지만, 올포트에 따르면 그렇다고 우리에게 씌워지는 편견의 굴레가 절대 피할 길 없는 숙명인 것은 아니다. 올포트의 이 책 편견이 바로 그 점을 안팎으로 입증한다.


석기용 인하대·언어분석철학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언어분석철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였고 현재는 인하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다수의 전문 철학서와 교양 인문서를 번역했다. 옮긴 책으로 《좌절의 기술》 《난파된 정신》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비트겐슈타인과 정신분석》 《과학의 미래》 《철학으로 읽는 괴테 니체 바그너》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삶의 품격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