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속의 『페스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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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속의 『페스트』 읽기
  • 이명원·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 승인 2020.06.2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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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의 에크리티시즘]

평소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 고전인데, 어떤 이슈 때문에 광범위하게 읽혀지는 일이 있다. 가령 카뮈의 『페스트』가 이에 해당한다. 아마도 오늘날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독자들의 공통 독서 목록에는 이 책이 상위에 배치되어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신종코로나 사태의 초기에는 <컨테이전>이나 <감기>와 같은 바이러스성 재난을 다룬 영화들을 집중적으로 보다가, 문득 이 재난의 문명사적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음미하면서 이 책을 두 번 반복해서 읽었다.
 
한국에서는 신종코로나 발생 이후 뜨거운 독서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2011년 3.11 후쿠시마 핵 재난 당시 이미 이 책이 화제가 되었던 전례가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페스트』였나. 거기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재난의 유사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첫째, 재난의 ‘비가시성’ 문제다. 후쿠시마에서의 원자력 발전소 폭발과 이에 따른 노심용융, 그리고 방사능에 의한 피폭 문제에서 가장 큰 공포를 초래한 것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 위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방사능은 보이지 않는다. 냄새도 나지 않는다. 인간의 오감으로는 지각할 수 없다. 카뮈의 소설에서 묘사되는 페스트의 확산은 소설 도입부에서의 쥐의 출혈과 집단적인 괴사로 암시되지만, 그것이 어떻게 사람 간 감염의 확대로 이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서술되거나 묘사되지 않는다. 그렇게 페스트에 의한 죽음은 바이러스의 ‘비가시적 공격’의 형태로 나타난다.
 
둘째, 이른바 도시봉쇄(lock down)가 초래하는 혼란과 공포의 공통성이다. 카뮈의 『페스트』의 공간적 배경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오랑이다. 카뮈는 이 오랑의 식민도시로서의 성격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지만, 페스트의 확산 초기 시점에서 총독부가 과감하게 도시를 폐쇄하고, 도시 바깥으로 이어지는 관문에 무장병력을 신속하게 배치하는가 하면, 전보를 제외한 모든 통신을 차단하는 조치를 통해 ‘죽음의 도시’로 사실상 버려진 오랑의 현실을 묘파한다. 쓰나미 재해와 함께 방사능 재난에 직면했던 후쿠시마 역시 사태 직후 자위대에 의한 도시폐쇄가 신속하게 진행된 반면, 후쿠시마 현민들은 잠재적 피폭자·전파자로 간주되어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이 ‘금지’되었다. 도시봉쇄란 사실상 기민(棄民) 정책이었다.
 
신종코로나 사태가 판데믹(pandemic) 상황으로 비화되면서 감염병에 대처하는 각국의 정책은 인문학적으로도 몇몇 쟁점들을 불러일으켰다. 가령 아감벤과 같은 이탈리아의 철학자는 「에피데믹의 발명」을 포함한 몇 편의 에세이를 통해, 정부에 의한 도시봉쇄와 밀접접촉자 추적과 같은 강력한 방역 정책이 ‘예외상태’ 하에서의 국가권력을 강화시키고, 이는 시민적 ‘자유에 대한 중대한 제한’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아감벤이 말한 ‘예외상태’ 하의 국가권력 강화는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생(生)-정치’(bio-politcs)의 전면화를 의미한다. 실제로 한국이나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권의 많은 국가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국민건강과 선제적 방역이라는 목표 아래, 개인적 프라이버시권을 일정하게 제한하는 적극적 방역정책을 펼쳐나갔다. 여기에 발전된 정보통신기술(ICT)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것 역시 푸코가 말한 판옵티콘 체제의 강화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감벤이 볼 때는 이러한 일련의 정부 조치가 가장 나쁜 경우에는 감염병의 공포를 이용해 기존 지배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책략으로서의 ‘쇼크 독트린’(레베카 솔닛)을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우려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시각은 프랑스의 낭시 같은 철학자에 의해 지나치게 ‘자유절대주의’를 강조한 시각이 아니냐는 반론에 봉착하기도 했다. 

▲ 알베르 카뮈
▲ 알베르 카뮈

카뮈의 『페스트』를 읽어보면, 아감벤이 우려한 그런 징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페스트의 확산이 명백해지자 행정당국은 외부로 통하는 오랑의 모든 관문을 폐쇄해 버리고, 거기에 중무장병력을 배치하는 한편 계엄령을 선포하기도 한다. 밤 11시가 되면 통행금지와 등화관제를 실시하고, 외부로의 교통이나 통신조차도 완전히 차단시켰기 때문에, 오랑은 전염병 속의 고립된 섬처럼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저항하는 소규모의 시민들도 있어서 도시의 관문에서는 간혹 총격전도 일어나고 폭력·약탈·방화도 간간이 발생하지만, 총살과 같은 계엄당국의 강력한 처벌이 이어지자 곧 잠잠해진다. 이 점만 보면 예외상태 하의 국가권력의 강화가 맞다.
 
그런데 카뮈의 『페스트』를 읽으면서, 혹은 아감벤이 거주하고 있는 이탈리아나 미국 등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내가 오히려 강하게 의식하게 된 것은 ‘예외상태 하의 국가권력의 강화’가 아니라 그것의 역방향의 흐름이었다. 즉 예외상태 혹은 한계상황 하에서의 국가의 완전한 무능 혹은 기능부전 현상이 오히려 신종코로나 사태에서 뚜렷히 보였던 것이다.
 
『페스트』에서 행정당국은 도시를 봉쇄하거나 계엄령을 동반한 형법의 강화를 통해 현상적으로는 주민통제를 가능케 하는 국가권력 혹은 식민권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감염병에 대한 보건/방역정책에 있어서는 완전히 무능한 면모를 보이고, 식량을 포함한 생필품의 공급 책임 역시 모조리 방기하고 있고, 시민들의 경제적 박해상태를 해결할 능력 또한 사실상 의지도 없는 상태에서 부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페스트 재난 하의 국가권력이 개인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제한하고 있기보다는 국가의 책임을 완전히 포기하고 있는, 그래서 실제로는 국가권력의 균열이나 무력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황에 대한 풍자나 비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국가라는 환상’의 추방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무력으로 관문을 폐쇄하고 있는 국가권력의 존재란 무엇인가. 오랑의 시민을 살리는 데는 무능하고, 그들의 이동을 봉쇄하는 데는 유능한 그 선택적 권력이란 결국 ‘기민(棄民) 정책’, 한계상황이 오면 시민의 생명을 포기하거나 유기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는 국가권력의 어두운 본질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페스트』 자체는 오랑의 행정당국이나 총독부와 같은 국가권력의 작동방식을 상세히 보여주기 보다는 그것의 ‘불능성’을 제시하는 한편, 여러 다른 이유에서 출발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시민적 연합(association)을 통해 생명구제에 힘쓰는 인물들의 내면과 행동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페스트가 초래하는 오랑의 변화를 촘촘하게 기록하고 있는 의사 베르나르 리외, 자원위생 보건대를 제안하는 장 타루, 진료를 거부해 결국 죽게 되지만 자원위생 보건대에 참여하는 파늘루 신부, 오랑 바깥으로의 탈출에 실패하지만 역시 자원위생 보건대에 참여하는 신문기자 레몽 랑베르 등,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치료제도 백신도 없는 상태에서, 페스트라는 한계상황과 싸우기 위해 기꺼이 연합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함께 있음’의 상태는 페스트가 초래하는 강제된 분리, 이를테면 오늘의 용어로 ‘도시봉쇄’라든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한 ‘고립’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일이다.
 
페스트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베르나르 리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병은 동시에 전통적인 결사(結社)들을 해체해 개개인을 고독으로 내몰고 있었다.” 결사의 해체, 개인의 단자화와 고립, 그리고 무엇보다도 “페스트가 모두에게서 사랑의 힘과 우정의 힘까지도 앗아가 버렸다는 사실”이 상기되고 있다. 요컨대 페스트는 사회=시민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부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 과정에서 가장 인간다운 감정의 교통(交通) 역시 파괴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자원위생 보건대’로 상징되는 시민적 연합과 활동은 설사 페스트 환자를 건강한 몸으로 귀환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페스트가 난폭하게 부숴버렸던 사회를 복원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레베카 솔닛이었다면 이것을 ‘재난 속의 유토피아’의 한 사례로서 설명하고자 하는 유혹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령 ‘속죄와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신학관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파늘루 신부, 마음의 평화를 찾고자 했던 타루라든가 그랑이라는 인물, 철저한 이기주의자로 등장했지만 체념 이후에는 자원위생 보건대에 참여하는 랑베르 등이 여러 계기로 회심하여 공동체적 참여와 협력의 모습을 보면,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주인공 격인 의사 리외는 랑베르에게 “사실을 사실로써 받아들이고 거기서 결과를 끌어내 봅시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속죄와 구원의 문제에 골몰하고 있는 파늘루 신부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구원이란 저에게 너무 거창한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멀리 안 가겠습니다. 제 관심은 인간의 건강입니다. 인간의 건강이 우선입니다.” 이런 리외의 태도는 유동하는 감정생활이 배제된 것과 동시에 종교적 묵시 역시 걷어낸 ‘세속적 합리주의’의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리외는 그가 기록한 페스트의 연대기가 오랑에서 페스트가 사라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승리의 연대기”가 아니라고 소설의 끝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연대기는 ‘증언’이다. 즉 “공포에 맞서, 그리고 공포의 지칠 줄 모르는 무기에 맞서 그가 수행해야 했던 것이자, 성자가 될 수는 없으나 재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의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든 사람이 개인적 아픔에도 불구하고 계속 수행해나가야 할 것에 대한 증언일 뿐이다.” 
 
의사 베르나르 리외가 ‘페스트’를 증언해왔던 것과는 다른 형태지만, 현재의 우리 역시 신종코로나가 초래하는 인간과 문명의 문제를 ‘증언’해야 될 상황에 처해 있다. 그것도 오랑이라는 소설 속의 제한적인 공간이 아닌,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의 공통의 재난의 서로 다른 차원을 고려하면서. 이 소설 속의 페스트는 1월말이 되자 어떠한 예고도 없이 도시에서 사라졌다. 페스트가 사라지면 정상생활로의 복귀가 가능할까? 타루가 묻자 “그런데 어떤 것이 정상생활로의 복귀라고 하는 겁니까?”라고 코타루는 반문한다.
 
페스트를 읽으며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 역시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정상생활’이라고 간주했던 것이 과연 되돌아가야 할 기원일까? 혹 오랑의 시민들과 비슷하게 “이곳 시민들은 일을 많이 하지만, 그것은 항상 부자가 되기 위해서이다.”라는 목표에만 종속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신종코로나 이후 우리는 원래의 ‘정상생활’로 되돌아갈 수도 없겠지만, 그 생활의 정상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될 상황에 처해 있는 것 역시 명백한 사실이다.  
   

이명원·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성균관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최일수 문학비평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후 문학평론가로 활동해왔다. <비평과전망> <내일을여는작가> <실천문학>의 주간을 역임했다. 지은 책에 <타는 혀>, <해독>, <파문>,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 <종언 이후>,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두섬: 저항의 양극, 한국과 오키나와> 등이 있다. 상상비평상, 성균문학상, 한국출판문화상(저술 부문)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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