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뒤집힌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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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뒤집힌 세상
  • 이현복 서울대 명예교수·언어학
  • 승인 2020.06.2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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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_ 나의 6·25

이 이야기는 필자가 중학교 2학년 때 직접 겪은 한국전쟁 발발 초기의 실화이다. 나라가 안팎으로 불안한 오늘, 70년 전의 비극을 되짚어 보고 전쟁을 겪지 않은 후대의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불과 3일만인 6월 28일 아침, 소련제 탱크 T34를 앞세운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하였다.

25일 낮, 휴가 나온 국군 장병들의 부대 복귀를 독려하는 라디오 및 확성기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거리에는 국군을 태운 트럭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분주하게 오갔다. 26일 오후부터 서울 미아리 북쪽에서는 펑펑하는 대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피난민 행렬이 줄을 지어 서울로 들어왔다. 달구지에 짐을 싣고 가족이 함께 오는 사람도 있었고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등에는 아이를 업은 여인들도 내려왔다. 그리고 남자는 지게에 짐을 싣고 오거나 소를 몰고 오는 행렬이 그치지 않았다.

민심은 갈수록 흉흉하고 방송에서는 “국군이 용감하게 인민군을 격퇴하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소식을 계속 내보냈으나, 실제로는 국군이 여기저기 전선에서 패하여 밀리고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갔다. 불안이 확산되었고 모두 서울을 떠나야 한다는 말이 돌았다. 어머니는 동네 가게에서 캐러멜, 과자, 통조림, 식품 등을 사 오시면서 물건이 거의 동나고 값이 폭등했다고 하셨다.

27일이 되자 북쪽에서 들려오는 대포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이미 짐을 꾸려서 떠나는 동네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가족도 결국 서울을 떠나느냐 서울에 남느냐의 결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에 앞서 아버지 어머니의 앨범을 모두 꺼내 와서 사진을 모두 찢고 불태웠다. 아까운 사진이었다. 그러나 공무원 신분의 아버지를 염려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결국 가족 전체가 떠나갈 수는 없고 하니 아버지와 큰아들인 나, 이렇게 둘만이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아버지는 잡혀갈 것이 뻔하고 열다섯 살 된 장남인 나도 의용군으로 끌려갈 위험이 크니 이렇게 두 사람만 우선 피난을 떠나고, 나머지 11세, 7세, 3세의 동생 3명은 어머니와 함께 서울 집에 남아 사태를 지켜보기로 결정을 하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참으로 말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 도대체 가면 어디로 간단 말이냐? 그리고 서울에 남을 어머니와 세 동생은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걱정이 엄습해 왔다.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는 것도 큰 걱정거리였다. 국군이 인민군을 잘 막아내면 속히 다시 돌아올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인민군이 서울을 완전히 점령하고 계속 쳐내려 간다면 기약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결국 우리 가족은 일찍 저녁을 먹고 떠날 사람은 짐을 꾸려서 떠나기로 했다. 짐이라고 해야 급하게 입을 옷과 먹거리를 넣은 것이다. 그런데 저녁을 먹고 나서 떠날 시간이 되자,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정말 내키지 않는 피난길이었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이라면 너무 늦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아버지와 나는 짐을 들고 대문으로 나와서 갈 길을 재촉하였고, 어머니와 동생은 대문 밖에 나와서 창백한 얼굴로 떠나는 우리를 배웅한다. 서로 아무 말이 없이 오랫동안 쳐다만 볼 뿐이었다.

대문 밖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어머니 쪽에서 나는 고개를 돌려 앞쪽만을 보며 걸었다. 그리고는 30여 미터나 내려왔을까. 실개천이 흐르는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지나면 시야가 가려서 우리 집도 배웅하는 어머니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거기서부터는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도무지 내 발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그때 내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니 어머니와 동생들이 그대로 서 있었다. 정말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도 걸음을 멈췄다. 내가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침통한 표정이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빠 나 가기 싫어. . . . 발이 안 떨어져요."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셨다.

그리고 잠시 후 아버지는, "그래, 돌아가자. 엄마 혼자서 어린 세 아이를 어떻게 돌본단 말이냐. 죽으나 사나 같이 있자." 이렇게 해서 우리 가족 여섯 명은 다시 합쳤다. 사색이 되어 있던 어머니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아주 짧은 찰나, 60여 초의 이산을 맛본 후 우리는 재회를 한 것이다. 만약에, 그때 헤어졌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다시 만날 수나 있었을까. 그리고 하루가 지난 6월 28일 새벽,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하기 전에 한강 다리는 우리 군에 의해 폭파되어 끊어졌고 많은 차와 사람이 한강으로 수장되었다. 간밤에 아버지와 내가 피난길에 나섰다면 우리도 폭파되는 다리와 함께 한강에 수장되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 1950년 6월 28일, 전쟁이 발발한지 3일만에 서울에 진입한 북한군 제105전차여단의 T-34/85들.
▲ 1950년 6월 28일, 전쟁이 발발한지 3일만에 서울에 진입한 북한군 제105전차여단의 T-34/85들.

6월 28일 아침이 밝았다. 그러나 서울은 이미 어제의 서울이 아니었다. 세상이 하룻밤 사이에 뒤집어진 것이다. 방송국을 장악한 인민군은, "우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영용한 인민군은 남조선 괴뢰 정부의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남조선 인민을 해방시켰으며 물밀듯이 남쪽으로 계속 진격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남조선을 완전히 해방시킬 것이다. 서울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요지의 방송을 되풀이하며 "김일성 장군의 노래" 등 북한의 군가인 듯한 노래를 연신 내보냈다. 섬뜩하고 살벌한 분위기에 몸과 마음이 오그라들었고 동네 사람들은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미동도 하지 않으니 천지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6월 27일 오후까지도 펑펑대며 점점 더 가까이 크게 들려오던 대포 소리가 잠잠해진 지도 오래다. 인민군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에 입성했으니 대포를 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천지가 조용한 것이 펑펑대던 대포 소리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은 웬일인가. 그것은 물론, 우리 국군이 저항을 멈췄을 것이라는 추정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의 간절한 희망은 사라지고 서울은 결국 인민군에게 빼앗긴 것이다.

아버지는 가족이 필동 집에 머무는 것이 불안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명륜동의 친지에게 연락하여 며칠이라도 그 댁에 가 있기로 하였다. 간단히 짐을 꾸리고 아침에 밥을 한 밥솥까지 들고 우리 가족 6명은 되도록 사람 발길이 뜸한 필동 3가를 경유하여 동국대 부근의 퇴계로 4가로 나가니, 갑자기 눈에 탱크가 들어왔다. 멀찍이 그 옆으로 지나며 보니 탱크 위 뚜껑을 열고 군인 한 명이 얼굴을 내민 채 망원경으로 남산 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동양인이 아니고 서양인이었고 머리도 갈색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직후부터 소련군 참전 여부가 논란이 되었는데, 바로 소련군 참전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그것도 소련군이 모는 탱크가 최전면에 서서 서울로 입성한 것이다. 그 탱크의 소련군은 필시 후퇴하는 국군이 남산을 넘어 한강 쪽으로 퇴각하는 장면을 살피고 있었을 것이다.

퇴계로 4가를 지나 충무로 4가로 들어서니 오가는 시민들이 늘어났으나 모두가 어둡고 긴장된 얼굴이었다. 그리고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몽둥이와 총을 든 사람들이 차량으로 이동하기도 하고 떼를 지어 거리를 활보하기도 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인민군과 북한의 앞잡이 전위부대일 것이다. 서슬이 퍼런 이들을 보니 앞날이 심히 염려되었다. 탱크는 을지로 4가에도 한 대가 있었다. 그리고 종로 4가에도 또 한대가 서 있었다. 그런데 을지로 4가에 이르니 보도에 붉은 피가 흥건히 흐르고 있고 그 옆을 보니 한 사람이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하늘을 보고 누워있다. 총을 맞아 죽은 사람이다. 그 순간 나는 온몸이 굳어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죽어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을 다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죽은 시체이다. 그것도 처참한 상태로. 무정부 상태이니 시체는 치우지도 않고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사람들은 그 시체를 피해 옆으로 지나간다. 그런데 간신히 발을 옮겨 길모퉁이를 도니 사람들이 직진하지 않고 우측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도 그들을 따라  우측으로 도는 순간 좌측에 또 한 구의 피투성이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생지옥이 아니고 뭣이란 말인가. 무슨 이유로 이들은 이같이 처참한 죽임을 당했는지, 누가 죽였는지, 죽은 이들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으나, 전쟁의 참혹함에 몸서리가 쳐질 뿐이다. 이 모두가 전쟁의 패자가 어찌할 수 없이 감수해야 할 운명 아니겠는가. 

어느새  큰길가에는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인민공화국 만세! 같은 벽보가 등장한다. 김일성의 사진이 들어 있는 포스타도 있었고, 39세라는 나이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나이를 따져보니 내 아버지와 같았다. 그뿐인가, 여기저기 인공기도 걸려 있었다. 인공기도 나는 처음 보는 깃발이어서 그 당시에는 생소하였다. 서울 하늘에 어제까지 휘날리던 태극기는 사라지고 하룻밤 사이에 인민공화국 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그저 놀랍고 두렵기만 하였다. 그런데 종로 5가에 이르니 네거리에서 교통정리 하는 나이 어린 소녀가 있다. 복장으로 보아 남한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필경 북에서 온 인민군이나 경찰로 보였다. 그 이후에도 느낀 일이지만 북에서 온 인민군이나 경찰은 대체로 체구가 작고 여위고 어려 보였다. 중학교 2, 3학년 내 또래 정도로 보이는 어린 남녀가 모두 군인이나 경찰로 끌려 나온 듯하여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여 일 후, 아버지 신변에 위협을 느낀 우리 가족은 미 공군 전투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서울 상공을 떠돌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아침, 정든 필동 집을 떠나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으로 머나먼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앞에서는 아버지가 리어카를 끌고 나는 뒤에서 이를 밀며.


이현복 서울대 명예교수·언어학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학교 대학원 음성학/언어학과에서 음성언어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글학회 부회장 및 이사를 지냈으며 대한음성학회를 창설하고 회장 및 명예회장을 지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명예교수로 저서로는 『한국어의 표준발음』, 『국제음성문자와 한글음성문자』, 『음성학-이론과 실제』, 『Korean Grammar』, 『한국어 표준발음사전』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음성언어학 관련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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