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언어를 만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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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언어를 만나는 여행
  • 박상진 부산외국어대·비교문학
  • 승인 2020.06.2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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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말하다_ 『단테: 내세에서 현세로, 궁극의 구원을 향한 여행』 (박상진 지음, 아르테(arte), 256쪽, 2020.05)
 

이탈리아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는 자기가 쓴 <신곡>을 “하늘과 땅이 손을 맞잡는 거룩한 시”(천국 25곡 1~2행)라고 불렀다. 20년에 걸친 망명 기간 내내 집필에 매달렸고, 다행히 죽기 전에 완성할 수 있었던 <신곡>은 영원한 절대자와 유한한 인간이 교류하는 구도를 담고 있다. 단테는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살아있는 몸으로 지옥, 연옥, 천국으로 이루어진 죽음 이후의 세계를 순례한다. 구원의 순례 이야기로서 <신곡>은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선과 악, 구원과 타락, 정의와 부패, 사랑과 증오, 기쁨과 슬픔, 겸손과 오만처럼 인간이 언제 어디서나 당면하는 보편적인 경우들을 다룬다.

이 경우들 각각은 이항 대립으로 이루어지되 단테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그는 다양한 사연들을 안고 살던 다양한 영혼들을 만나면서 그 대립하는 양쪽 사이를 오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신의 선과 구원, 정의와 사랑을 향해 일방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당연한 해법과 결론을 내는 대신, 끊임없이 양쪽 사이에서 서성거린다. 선은 필연적으로 우월하지 않고 악은 무조건 배제될 것만도 아니다.

▲ Dante - Divine Comedy (facsimile edition)
▲ Dante - Divine Comedy (facsimile edition)

내세의 순례자 단테는 지옥의 지하세계를 둘러보고 난 뒤, 지상으로 나와 연옥에 도착한다. 죄를 씻는 희망의 장소답게 연옥의 해안가에 도착한 시점은 동이 터오는 새벽이다. 수평선에 떠오르는 햇살을 바라보며 그는 정죄의 여정을 예감한다. 죄를 씻으며 천국에 오를 준비를 하느라 연옥의 영혼들은 늘 부산하다. 그런데 해안에 도착한 단테는 곧바로 그들에게 향하기 전에 한동안 서성거린다.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목격한 그로서 연옥이라는 정죄의 현장은 더없이 반가울 텐데, 서성거리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 캄팔디노 평야의 포피 성 앞에 세워진 단테의 흉상
▲ 캄팔디노 평야의 포피 성 앞에 세워진 단테의 흉상

<신곡>의 행간에는 마냥 희망으로만 채워지지 않았던 단테의 내면이 어른거린다. 그는 새벽 바다 저편에서 자기를 데리러 날렵하게 날아오는 흰 빛의 천사를 서쪽의 수평선으로 낮게, 자욱한 안개를 뚫고 붉게 빛나는 화성에 비유한다. 구원의 해가 떠오르는 하얀 동쪽을 마주하고서 해가 지는 붉은 서쪽을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눈은 동쪽에 두면서 마음은 서쪽에 놓고 있었다. 내면은 이탈리아반도 서쪽의 리구리아 해안에서 망명객으로 떠돌던 그때 그 기억으로 가득 차오른다.

가야 할 길을 선뜻 시작하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모습은 화성의 붉은 빛과 어울린다. 단테는 철학서 <향연>에서 화성을 음악에 비유한 적이 있다. 그리고 <신곡>에서 신의 구원의 본질을 조화로 보고, 그 조화를 인간이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형식은 음악이라 생각했다. 연옥의 해안에서 단테는 동쪽에서 떠오르는 햇살을 바라보는 대신 등지고 서 있었다. 그러면서 길게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와 더불어 해가 지는 황혼의 하늘을 떠올리며 구원의 인간적 형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구원이란 하늘과 땅이 손을 맞잡는 현장이다. 그는 하늘로 오르는 동안 자기가 서 있던 인간의 땅을 자꾸만 돌아보곤 했다. 나아가며 돌아보는 반복되는 과정이 곧 <신곡>을 쓰는 일이었다.

천국의 꼭대기에 오른 그는 하늘과 땅이 손을 맞잡는 이 거룩한 시를 쓰는 일이 그를 오랜 세월 쇠약하게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다뤄야 할 주제는 광활하며 난해했고, 다루는 마음은 간절하며 열렬했다. 이제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구원의 궁극에 다다르려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대지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손에는 <신곡>을 들고서 어렸을 적 세례를 받은 곳, 삶의 시원으로 돌아가 월계관을 받으리라 다짐한다. 사람들이 <신곡>을 읽는 광경을 떠올리며, 그것이 그의 승리라고 기대한다.

쇠약해진 단테를 떠올려보라. 오랜 세월을 바쳐 인간의 구원을 노래하는 시를 쓰느라 심신이 지쳤다. 단테는 <신곡>을 천국으로 수렴되고 하느님이라는 궁극의 한 점으로 흡수되기보다 하늘‘과’ 땅이 서로 손을 잡는 ‘과정’으로 생각했다. 그것을 단테는 ‘거룩하다’고 부른다. 거룩함은 온전히 하느님에게만 속하지 않는다. 인간은 제 나름대로의 거룩함을 실천할 뿐만 아니라 거룩함의 목표가 된다. 그렇게 거룩함은 인간에게도 속한다. 단테가 “거룩한 시”를 쓰느라 오랜 세월 쇠약해진 육신의 흔적이 그 거룩함에 담겨 있다.

▲ 루니자나의 한 성루에서 바라본 리구리아 해안의 황혼
▲ 루니자나의 한 성루에서 바라본 리구리아 해안의 황혼

나의 책은 단테의 쇠진한 몸과 마음을 만나러 간 여행기다. 나는 이탈리아반도 중북부에 흩어진 그의 삶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그의 눈으로 보고, 그의 손으로 만지고, 그의 귀로 들었다. 그러자 사물에 흩어져 스민 그의 글이 마음에 들어왔고, 그의 슬픔과 외로움, 희망과 기쁨이 느껴졌다. 내세를 여행하는 순례자 단테는 그곳에 있었다. 리구리아 해안에서 서성거리고, 카센티노 숲에서 도사리며, 베네치아 조선소를 시찰하고, 캄팔디노 전쟁터에서 말을 달리고 있었다.

<신곡>은 단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내세를 여행한 글이지만, 상상보다는 재현으로 이루어졌다. 재현의 대상은 그가 머문 현세였고 그가 겪은 삶이다. 사물이 보이지 않으면 믿는 것을 보기 마련이다(지옥 31곡 25~27행). 그는 보이지 않는 믿음보다 보이는 사물을 통해 내세를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현실의 감각으로 환상의 세계를 둘러본 여행자 곁에 어떤 사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나는 그 사물을 추적하려 여행을 떠났고, 그것은 <신곡>을 비롯해 그가 남긴 글을 다시 해석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 일이 무척이나 행복했던 이유는 고대와 중세의 엄청난 지식과 최고의 상상, 그리고 끝없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미적 언어 저편에 우리가 잊고 있던 단테, 바로 그 지식과 상상, 언어를 홀로 키웠던 한 인간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상진 부산외국어대·비교문학

한국외대를 졸업하고 옥스퍼드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탈리아 문학, 비교문학 전공으로 현재 부산외국어대 만오교양대학 교수로 있다. 하버드 대학, UC 버클리 방문학자를 역임했으며, 단테 연구로 제47회 플라이아노(Flaiano) 상을 수상했다(2020). 저서로 <단테 '신곡' 연구>, <사랑의 지성: 단테의 세계, 언어, 얼굴>, <단테가 읽어주는 '신곡'>, <비동일화의 지평: 문학의 보편성과 한국문학>, <A Comparative Study of Korean Literature: Literary Migration>, 역서로 <신곡>, <데카메론>, <꿈의 꿈>, <레퀴엠>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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