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미널리티, 커뮤니타스, 사회극 개념을 통해 본 5·18 광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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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널리티, 커뮤니타스, 사회극 개념을 통해 본 5·18 광주항쟁
  • 강인철 한신대·종교사회학
  • 승인 2020.06.2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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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5·18 광주 커뮤니타스: 항쟁, 공동체 그리고 사회드라마』 (강인철 지음, 사람의무늬, 468쪽, 2020.05)
 

책의 머리말에서도 지적했듯이 광주항쟁은 한국의 쟁쟁한 사회과학자 대부분이 한 번쯤 진지하게 파고든 주제였다. 그래서 고민했다. 30년 넘게 주로 종교를 연구해온 사회학자인 필자가 무엇을 더 보탤 수 있을까? 그러다 인류학자들이 처음 제시한 후 세계 사회과학계가 널리 공유해온 몇몇 개념들을 광주항쟁 연구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게 주목하게 된 게 리미널리티(liminality), 커뮤니타스(communitas), 사회극(social drama) 개념이었다. 리미널리티는 아놀드 방주네프가 통과의례의 중간 단계로서 처음 제시한 이래 빅터 터너가 적용 대상을 확대하고 더욱 세련되게 발전시킨 개념이다. 커뮤니타스와 사회극 역시 터너가 제안한 개념들이고, 커뮤니타스 개념은 빅터 터너가 작고한 후 부인인 에디스 터너에 의해 더욱 풍요로워졌다.

일정한 개념적 혁신들도 필요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터너에 기대면서 터너를 넘어서기’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빅터 터너의 리미노이드 개념이 중요한 약점을 갖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리미널리티 유형론을 새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터너 부부의 커뮤니타스 개념에는 부족하지만, 광주항쟁의 커뮤니타스에서는 대단히 중요해 보이는 ‘민중의 자기통치’ 측면도 보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커뮤니타스는 리미널리티의 해방력(解放力)과 전복성에 대한 주체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와 감정적 몰입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 다시 말해 커뮤니타스는 리미널한 시공간에 대한 ‘주체의 자발적·능동적인 참여와 투신’ 차원, 그런 참여·투신에 수반되는 ‘공동의 체험과 감정’이라는 차원을 추가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극 개념도 한국의 상황에 맞게 더욱 정교화할 필요가 있었다.

▲ 전남도청 분수대 앞(©나경택, 5·18기념재단 제공)
▲ 전남도청 분수대 앞(©나경택, 5·18기념재단 제공)

‘사회운동의 감정사회학’과 관련된 기존 연구 성과들도 이 책에서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아울러 필자는 또한 광주항쟁의 문화적 측면과 공동체적 측면에 주목한 연구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넓은 의미에서 이번 연구는 민주화운동 혹은 민주혁명에 대한 ‘문화적·의례적·드라마적’ 접근에 속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5·18 광주항쟁의 의례, 기념, 상징, 기억투쟁, 의례투쟁 등에 주목하는 최근의 연구들과 상통한다.

리미널리티는 사회구조와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규범·가치로부터 사람들의 사고·감정·행동이 일시적으로 해방되는, 이도 저도 아닌 야릇한 시간과 공간을 가리킨다. 분리―전이(리미널리티)―통합으로 구성되는 통과의례의 3단계 도식에서 첫 번째의 분리 단계는 구체제와 동의어인 ‘구조’로부터의 해방, 그로 인한 기존 일상생활의 중단 및 초월을 가리킨다. 분리는 리미널리티로 진입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통과의례에서 분리는 지위·계급·신분·성별 표식의 제거를 포함한 특정 형태의 ‘분리의례’를 거행하거나, 특별히 준비된 (대개 성스럽다고 간주되는) 장소로 ‘이동’함으로써 달성된다. 그러나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대체로 자발적인 성격을 띠는 ‘의례적 분리’가 아닌, 외부로부터의 강압에 의한 ‘군사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분리’가 이뤄졌다. 동시에 광주에서는 특정한 장소로 이동함으로써가 아니라 이동할 수 없도록 강제됨으로써, 즉 특정 장소에 고립되고 갇힘으로써 분리가 이뤄졌다.

▲ 본격적인 저항(©이창성, 5·18기념재단 제공)
▲ 본격적인 저항(©이창성, 5·18기념재단 제공)

리미널리티는 예기치 못한 온갖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과 창조성의 시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놀드 방주네프가 이 개념을 처음 이끌어낸 통과의례의 맥락에서는 리미널리티가 기존 정치·사회질서를 강화하는 데 기여할 따름이었다. 필자가 책에서 ‘질서와 충성의 리미널리티’라고 명명한 게 바로 그것이다. 이런 유형의 리미널리티는 순응적 주체들을 주조해내고, 사람들을 기존 체제에 충성스런 참신자(true believer)로 거듭나도록 만든다. 반면에 통과의례의 맥락을 넘어선 정치적·사회적 갈등 영역에서는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을 촉진하고, 새로운 유토피아적 비전을 창출하는 ‘변혁과 해방의 리미널리티’가 종종 발생한다. 광주항쟁은 이런 변혁적 리미널리티로 가득했던 시공간이었다. 필자는 광주 리미널리티의 변혁적 잠재력을 표층 수준에서는 민주화와 항쟁 정당화, 심층 수준에서는 반(反)구조의 제도화 차원, 유토피아적 차원, 국가폭력에 대한 성찰성 차원, 급진적 행동 차원, 지배 담론·상징의 뒤집기 차원, 결과적 차원 등으로 구분하여 접근했다.

한편, 커뮤니타스는 리미널리티 속에 놓인 사람들 사이의 사회관계와 상호작용을 특징짓는 양식을 가리킨다. 지금까지는 ‘○○공동체’로 명명하는 방식으로 광주항쟁 주체들의 상호관계를 설명해왔다. 그렇지만 공동체 개념으로는 광주항쟁의 커뮤니타스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양상들을 제대로 다루기 어렵다. 예컨대 사람들이 기존 체제의 구속으로부터 갑자기 자유로워지는 것, 기존 권위를 더 이상 당연하거나 자연스럽게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 고분고분 순응하지 않게 되는 것, 일상생활의 속박에서 마치 초월한 듯한 행동이 속출하는 것, 일상생활을 지배하던 과거의 습속(아비투스)과 불현듯 결별하는 것, 집합의례의 분위기 속에서 참여자들이 정체성의 심대한 변화를 겪는 재생적(再生的)인 체험, 기존 정치·사회질서에 대한 성찰과 비판의 활성화, 이상주의적 상상력과 창조성의 만개, 행위와 인식이 융합되는 경험, 무아경적인 몰입을 통해 느끼는 집합적 기쁨과 행복감 등은 ‘공동체’가 아니라 ‘커뮤니타스’ 개념에 의해서만 제대로 포착되고 설명될 수 있다.

▲ 광주, 해방의 빛으로(©나경택, 5·18기념재단 제공)
▲ 광주, 해방의 빛으로(©나경택, 5·18기념재단 제공)

필자는 항쟁 초기부터 독특한 유형의 ‘광주 커뮤니타스’가 형성되었으며, 그것은 이른바 ‘해방광주’가 도래한 1980년 5월 22일 이후에도 소멸하지 않았다고 본다. 대신 다양한 유형의 커뮤니타스들이 성격과 형태를 달리해가면서 5월 27일 새벽까지 연이어 출현했다. 이번 책에서는 항쟁 초기 형성된 ‘항쟁-재난의 커뮤니타스’와 함께, 해방광주 시기에 나타났던 여러 커뮤니타스들을 부각시켰다. 이 시기에 대안권력과 항쟁지도체가 형성되는 과정은 ‘자기통치의 커뮤니타스’를 산출했다. 희생자들을 향한 장례와 추모 의례를 중심으로 한 재난의 커뮤니타스, 시민궐기대회에서 잘 나타난 의례-연극의 커뮤니타스도 해방광주 시기에 주로 나타났다. 항쟁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죽음의 행진’에서 극적으로 표출된 비폭력 저항의 커뮤니타스, ‘최후의 도청 항전’을 앞두고 재차 등장한 항쟁-재난의 커뮤니타스가 중요했다.

마지막으로, 사회극은 터너에 의해 “갈등적이고 경쟁적인 혹은 호전적인 유형의 사회적 상호작용의 연속체”로 정의된 바 있다. 사회극은 위반, 위기, 교정, 재통합 혹은 분열의 네 단계로 구성되는데, 사회극의 2단계(위기)와 3단계(교정)에서 리미널리티와 커뮤니타스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사회극의 3단계와 4단계(재통합 혹은 분열)에서는 기존질서에 대한 비판적 성찰성, 그에 기초한 사회개혁과 같은 사회·정치적 기능이 주로 나타난다. 사회극의 시각으로 접근할 때 광주항쟁은 최초의 ‘위반’이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위로부터, 즉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에 반하는 신군부 세력의 5·17쿠데타(계엄 전국 확대 조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아주 특이했다. 대부분 역사와 사회들에서 사회극을 촉발시키는 ‘최초 위반’은 피지배 세력 혹은 저항세력의 몫이었지만, 광주항쟁에서는 정반대였다. 사회극의 첫 단계에서부터 나타나는 이런 특징이

▲ 시민군(©나경택, 5·18기념재단 제공)
▲ 시민군(©나경택, 5·18기념재단 제공)

광주 사회극을 독특하게 만드는 여러 다른 특징들을 연이어 산출했다.

우리는 사회극의 마지막 단계를 이루는 두 가지 역사적 시나리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갈등적 사회극이 ‘재통합’으로 마무리될 경우 기존 정치사회 체제(구체제)는 단단하고 지속가능한 사회통합 효과를 구가할 수 있다. 신군부 세력은 광주·전남 시민들의 저항을 제압한 후 광주 사회극을 ‘변형된 구체제(제5공화국)로의 재통합’으로 마무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주 사회극은 정반대의 방향, 즉 구체제로의 재통합은커녕 구체제의 분열 심화 방향으로 치달았다. 그런 세월이 무려 20년 넘게 흘렀고, 이 과정에서 결국 구체제는 붕괴되었다.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0년대 초에 이르러 광주항쟁에서 발원한 저항의 물결이 민주화된 신(新)체제에 합류·통합됨으로써 장기 지속된 광주 사회극이 비로소 종결되었다.


강인철 한신대·종교사회학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로 학술단체협의회 학술위원장, <역사비평> 편집위원, 우리신학연구소 서울연구실장·연구위원장,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협력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시민종교 3부작인 <시민종교의 탄생>, <경합하는 시민종교들>, <전쟁과 희생>, 종교정치 5부작인 <한국의 종교, 정치, 국가>, <종속과 자율>, <저항과 투항>, <민주화와 종교>, <종교정치의 새로운 쟁점들>을 비롯하여 16권의 단독저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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