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의 현실을 향한 살/몸 존재론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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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의 현실을 향한 살/몸 존재론의 여정
  • 한상연 가천대·리버럴아츠칼리지
  • 승인 2019.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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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문학과 살/몸 존재론』(한상연 지음, 세창출판사, 2019.11)

『문학과 살/몸 존재론』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고통과 기쁨의 근원적 처소로서의 살과 몸의 관점에서 재해석할 목적으로 기획된 책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스타니슬라프 램의 공상 과학소설 『솔라리스』,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시 <고대 그리스 항아리에 붙이는 송시>,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등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들뢰즈, 슐라이어마허, 푸코 등의 철학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이 담겨 있다.

“나는 백만 번이라도 체험의 현실과 만나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내 종족의 양심을 벼려 내리라.”

제임스 조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의 입을 통해 밝힌 이 고백 속에 『문학과 살/몸 존재론』의 근본 취지가 담겨 있다. 살/몸 존재론이라는 낯선 용어는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가? 그것은 일체의 상식과 이론으로부터 벗어나 체험의 현실 그 자체와 만나고자 하는 일종의 존재론적 감행이다. 오직 살/몸 존재론적 감행만이 아직 창조되지 않은 인류의 양심을 벼려낼 수 있다. 양심이란 사념과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의 근본 의미에 눈뜸을 뜻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최대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로고스보다 더욱 근원적인 것은 아이스테시스라고 밝힌다. 아이스테시스란 그 무엇을 순연히 감각적으로 받아들임을 뜻하는 말이다. 아마 분석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이라면 이러한 의미의 아이스테시스가 어떠한 의미작용이나 대상의식도 전제하지 않는 순전히 감각적이기만 한 자극의 수용을 뜻하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스테시스란 체험의 매 순간마다 일회적인 것으로서 새롭게 일어나는 감각의 근원적 특성을 지칭하는 말일 뿐이다. 돌리마운트 해변에서 아름다운 한 소녀를 만났을 때 디덜러스는 이러한 존재론적 진실에 눈뜬다. 제임스 조이스는 디덜러스에게서 일어난 변화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녀의 이미지는 그의 영혼 안으로 영원히 들어와 버렸으며 어떤 말도 그 황홀경의 성스러운 침묵을 깨트리지 않았다.”

아름다움이 자신을 압도해올 때 우리는 불현듯 모든 것이,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낯설어져 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낯섦을 느끼는 자신은 누구인가? 그것은 타성에 젖은 자기이다. 익숙한 일상에 젖어 있는 자기만이 그 무엇을 낯설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갑작스레 찾아온 아름다움으로 인해 모든 익숙한 것들이 절대적인 무의미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하고도 절실한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 자기이기도 하다. 불안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름다움의 감각으로 인해 더 이상 과거에 머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살/몸 존재론은 하이데거의 철학적 한계에 대한 각성에서 출발한다. 만약 존재론적 진리의 문제에서 아이스테시스가 로고스보다 더 근원적이라면 존재론은 오직 감각의 근원적 처소로서의 살에 대한 엄밀한 성찰을 통해서만 온전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하이데거는 살의 존재론적 의미에 관해 거의 아무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다. 살/몸 존재론은 하이데거가 침묵한 곳에서 그가 시작한 존재론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오직 살/몸 존재론을 통해서만 그 온전한 의미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 현존재의 근원적 존재방식은 실존이다. 실존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살/몸 존재론의 관점에서 보면 실존이란 감각의 근원적 처소로서의 살에게서 일어나는 감각에 의해 현존재가 매 순간 이중의 낯섦을 겪게 됨을 뜻하는 말이다. 하나는 모든 존재(자)의 근원적 낯섦이다. 현존재는 만나는 모든 것들을 그 근원적 낯섦 가운데서 발견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심지어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하게 여겨지는 것마저도, 실은 오직 낯선 것으로서만 발견된다. 감각이 매 순간 새로운 것으로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며, 또한 감각 없이 알려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자기로 존재함의 근원적 낯섦이다. 체험의 매 순간이 현존재에게는 새롭게 일어난 감각과의 조우이다. 이러한 조우 속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 역시 새롭게 일깨워진 것으로서 만나게 된다. 현존함이란 감각에 의해 낯설어진 자신과의 부단한 만남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몸이란 그러한 자신이 고립된 실체로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의 곁에 있는 것으로서 거기 있는 것임을 알리는 존재론적 근거이다. 살/몸 존재론의 관점에서 보면 실존은 살/몸으로 현존함이 자아내는 현존재의 근원적 존재로서의 곁에 있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실존이란 황홀경의 성스러운 침묵과도 같다. 아이스테시스, 즉 그 무엇을 순연히 감각적으로 받아들임의 체험이란 감각의 장 안에서 그 무엇과 언제나 이미 하나인 자로서 자신을 발견하며 일어나는 감정의 고양과 같기 때문이다. 디덜러스가 돌리마운트 해변에서 아름다운 소녀를 보며 경험한 것처럼 그 고양된 감정은 황홀할 뿐 아니라 성스럽다. 본질적으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럼에도 우리 존재의 가장 은밀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상연 가천대·리버럴아츠칼리지

하이데거와 슐라이어마허를 함께 전공한 철학자. 독일 보쿰대에서 철학, 역사학, 독문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에서 철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천대 리버럴아츠칼리지에서 예술철학, 문화철학, 종교철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철학을 삼킨 예술』(동녘),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기쁨과 긍정의 종교』, 『공감의 존재론』 등이 있다. 2007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하이데거학회 학회지 『하이데거 연구』 및 『존재론 연구』 편집이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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