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 광주’와 ‘2020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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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광주’와 ‘2020 대한민국’
  •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 승인 2020.06.14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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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직설] 서유경 칼럼

2020년 5월 18일 서울에 장대비가 내렸다. 해마다 5월 17일과 18일 사이에는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속설이 올해도 어김없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올해는 40주년을 기리기라도 하려는 듯 유독 더 커다란 하늘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어 마땅한 날 5월 18일, ‘1980 광주’는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결연한 몸짓과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전 인류를 향해 천명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최대 분수령이기도 했다.

‘1980 광주’가 없었다면 1987 유월 항쟁은 물론 2016~17 촛불혁명도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 후 사십 년, ‘1980년 광주’는 어느덧 국경을 초월하여 세계 민주주의 운동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아랍의 봄’ 광장에서, 대만의 ‘해바라기’ 광장에서, 홍콩 ‘우산 행진’의 거리에서,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을 때마다 다양하게 새로운 모습으로 소환되고 있다. 요즘 세계 유수 언론들은 한국이 COVID-19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게 된 주효 원인 중 하나가 ‘민주주의의 힘’이었다고 논평한다. 그런데 세계인이 인정한 우리 국민적 자부심의 원천인 한국 민주주의는 ‘1980 광주’를 말하지 않고서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1980 광주’는 어떻게 한국 민주주의의 신기원으로 자리매김한 것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18일 전남도청 광장에서 행해진 추념식에서 40년 전 바로 그곳에 ‘대동(大同) 세상’이 펼쳐졌다고 회고하며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참모습이라고 역설했다. “우리는 광장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대동 세상을 보았습니다. 직접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시민들과 어린 학생들도 주먹밥을 나누고, 부상자들을 돌보며 피가 부족하면 기꺼이 헌혈에 나섰습니다. 우리는 독재 권력과 다른 우리의 이웃들을 만났고 목숨마저 바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참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도청 앞 광장에 흩뿌려진 우리의 민주주의는 지난 40년, 전국의 광장으로 퍼져나가 서로의 손을 맞잡게 했습니다. 드디어 5월 광주는 전국으로 확장되었고 열사들이 꿈꾸었던 내일이 우리의 오늘이 되었습니다.” 

『오월의 사회과학』의 저자 최정운은 대통령이 추념사에서 언급한 ‘대동 세상’을 “절대공동체”로 개념화했다. 이는 5월 18일 계엄군이 도착하여 2박 3일간 잔학무도한 폭력극장을 연출하고 정부가 이에 저항한 항쟁의 주동자를 현실 불만 세력, 즉 ‘폭도’로 규정함으로써 광주시민의 자존심을 처참하게 짓밟은 20일 저녁부터 21일 오후 시민군이 조직될 때까지 광주 전역에 출현했던 ‘시민들의 저항공동체’를 가리킨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공수부대의 잔혹함은 두려움과 공포 이상으로 인간적 수치심과 모멸감을 불러일으켰다. 거기에 이웃 친지들의 외로운 사투를 수수방관하는 자신의 비겁함에 대한 자괴감과 분노가 더해짐으로써 인간존엄의 파괴에 대한 저항의지가 분출되었고, 마침내 개개인의 생명보다 공동체 사수가 먼저라는 목표의식을 공유하는 “절대공동체”가 실체화되었다.

광주시민들이 ‘우리 가신님들을 따라 다 같이 죽읍시다!’라는 결연한 구호와 함께 국가폭력에 맞서 스스로 절대공동체를 수립하는 과정은, “모든 시민들이 인간이 되기 위하여 적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그들이 동료 시민들과 만나 존엄한 인간임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역사적 순간에 우연히 수확한 “성스러운 초자연적 체험”이었고, 자신이 속한 현실 세계를 벗어나 절대공동체가 요구하는 미지의 초월적 삶의 방식을 학습하는 개안(開眼)의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21일 시민군이 조직되어 총기가 배부되자마자 이 초월의 마법이 풀리고 현실의 법칙이 다시 가동되었으며 절대공동체는 신화가 되었다(최정운 2012: 189-90).

특정 정치공동체의 신화는 각기 집단무의식의 형태로 존속하면서 구성원들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화 밈(cultural meme)’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980 광주’ 신화가 한국 민주주의의 신기원인 까닭은 아마도 민주주의가 요청하는 시민상, 즉 ‘동료 시민들과 더불어 자신의 공동체 수호에 앞장서는 공동체주의적 개인’이라는 민주시민적 이상을 집단무의식화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폐일언하고, 코로나19라는 무시무시한 공동의 적과 맞서 싸우고 있는 2020년 대한민국은 다시금 ‘절대공동체’ 신화를 소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1980 광주’ 이후 40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맞은 오늘, ‘우리 다 같이 죽읍시다!’ 대신 ‘우리 다 같이 삽시다!’라는 구호를 외칠 수 있음에 우리 다 같이 깊이 감사하자.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학과장 겸 문화창조대학원 미래시민리더십·거버넌스 전공 주임교수. 현재 한국NGO학회 회장과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주 연구주제는 한나 아렌트, 정치미학, 시민정치철학, 한국민주주의의 패러다임 전환 등이다. 저서로 The Political Aesthetics of Hannah Arendt와 『제3의 아렌트주의』 (근간), 역서로 『아렌트와 하이데거』, 『과거와 미래 사이』,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렌트 읽기』, 『시민사회』,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 『책임과 판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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