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사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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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사회를 위하여!
  • 지규용 동의대학교·한의학
  • 승인 2019.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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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杏林放談]

국내외 정치경제 어디를 둘러봐도 어렵기만 한 요즈음, 대학지성 인앤아웃의 창간을 축하하며 나라의 형통에 일조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평범한 시민들은 사회가 불안하고 경제가 비틀하면 당장 직장이 어찌 될지를 걱정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필자도 날마다 건강하고 안전한 대한민국이 되기를 기원한다.

하지만 근 이삼 년 사이, 타인에 대한 분풀이와 혐오행위가 부쩍 증가하였다. 된장녀, 맘충, 한남, 여혐 등은 이미 고전이고 메갈, 칙칙폭폭, 휴거, 전거지 등 여러 갈래의 경멸성 언어들이 유행하며, 간혹 소송이나 범죄 혹은 피해자의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두 거대정당의 극단적 싸움은 또 어떤가? 자신들의 본업인데도 법안심의와 예산안심사까지 내팽개치며 오로지 색깔 프레임으로 상대를 비난한다.

이런 일들이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어서, 얼마 전 엠케는 <혐오사회>라는 책에서 종교、인종、성별 등에 따라 형성되는 집단적 편견의 작동메커니즘에 대해 분석하고 이런 차별과 혐오에 대해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근래 이어진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에 관련된 대중들의 혐오성 비난 댓글들을 보면서, 철학적인 거대담론이나 일대일의 투쟁적 시각 등 여러 처방이 가능하겠지만 타인을 대하는 의식 자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혐오사회’, 복잡하고 거대한 문제지만 사회는 본래 개인들의 모임과 사귐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사귐이 유치원 시절처럼 등수도 없고 연극 주인공도 돌아가면서 맡으며 방과 후엔 놀이터에서 해질 때까지 노는 사이처럼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유치원 아이는 제 친구 누구는 약밥을 좋아하고 누구는 줄넘기를 20개까지 하는지도 안다. 그러면서 수시로 친구 이름을 호출하며 이야기를 한다. 마치 자기의 분신이기라도 한 것처럼. 자아가 형성되는 어린 시절 즐겁게 경험하는 이 아이처럼 ‘나’의 긍정성 영역 확보가 중요하다. 이런 아이에겐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관심과 호의가 바탕에 흐른다. 하나의 동락공동체(同樂共同體)랄까.

그렇지만 초등학교 이후 여러 분야에서 행해지는 경시(競試)대회들을 겪다 보면 상대를 경쟁자로 여기는 환경으로 바뀌게 된다. 경쟁이란 본질적으로 상대를 밟고 올라서서 승패를 명확하게 가르는 행위이기 때문에 ‘우리’나 ‘공동체’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나’만이 강조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상대는 적이 되고 ‘내’ 영역으로부터 구별하고 배제해야 한다. 열 살을 갓 넘기자마자 난데없이 주변의 친구들이 잠재적 경쟁자이고 이겨야만 내가 산다니…비판능력이 없는 어린 나이에 잘못하면 이 혼란과 스트레스는 그대로 내면화된다.

하나의 방안을 제시하자면 공동체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동고공동체(同苦共同體)’랄까. 팀별로 경쟁을 하되 한 팀 내에서는 팀원 간의 협조가 있어야만 완수할 수 있는 어려운 과제를 설계하고, 팀원마다 해결책에 접근하는 권한과 정보를 달리 부여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팀을 대표하는 개인을 선정할 때는 일과 재능의 특성에 따라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결정한다. 이런 과정을 여러 해 반복하다 보면 개인과 사회, 경쟁과 협동의 상반되는 가치들을 균형 있게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공동체 경험은 이미 지나버린 일이고, 아이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에 따라 차별과 등급이 예정되어 있어 계대 전승된다. 정보와 기술이 증가하고 발전할수록 접근 장벽이 늘어나고 교육을 통한 사다리도 점차 사라져가는 추세이다. 이런 신분세습 사회를 인지하기 시작하는 사회초년생들에게 닥친 세계적 불황은 묵직한 카운터펀치이다. 설사 부잣집 아이라도 혼나고 억압받아 자아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역시 같은 문제가 생긴다. 아무리 노력해도 장벽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암울한 현실에서 ‘인내의 열매는 달다’는 구닥다리 도덕과 공동체 논리는 그야말로 아무 효과도 없는 꼰대 처방에 불과하다.

이런 고달픈 상황에서는 ‘나’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이질적인 것들이 그냥 싫고 짜증난다. 특히나 잘난 것들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잘나가는 건지, 못난 것들은 ‘내’ 몫이 줄어들 것 같아 밸이 꼬인다. 고도의 호흡과 정신수련을 거친 청산도인이 아니라면, 긍정성을 습득하지 못한 마음속에 울화와 분노만 쌓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 울화는 내부에서 몸과 마음을 상하다가 필경 외부로 폭발해야만 일시나마 풀어진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간기가 쌓여서 화(火)로 변하고 상역하였다고 표현한다. ‘간기’는 우울과 근신경반응의 조급성을 일으키고 더 심하면 잠재의식화하며, 2단계의 ‘화’는 정신과 신체를 흥분시키면서 영양을 소모하고, 3단계의 ‘상역’은 다리를 지지해야 할 혈기가 머리로 올라가 혈압을 올리므로 다리에 힘을 못 쓰고 심하면 중풍으로 쓰러지게 된다. 혐오사회의 문제는 분풀이하는 혐오 행위자가 이 서너 단계 중의 어디에 있으면서 불특정 다수에게 다양하게 발산한 결과들이다. 피해자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이런 병리사회에서 치루는 희생은 무지막지하게 크고, 가해자 본인도 결국은 자기를 손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처방해야 할까? 보통 건강한 사람은 성장하면서 자아를 형성할 때, 자기-타인, 남성-여성, 부귀-공평, 욕망-양심과 같은 다양한 양면성을 조화롭게 통합한다. 자아를 하나의 시소로 본다면 한쪽이 너무 가볍거나 무거울 때는 이미 시소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것처럼, 어느 쪽도 너무 약하거나 세지면 안 된다. 정부가 사회를 통치할 때도 자유라는 개(個)와 평등이라는 전(全), 자본과 노동, 인간과 환경 등의 양면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지속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혐오사회의 궁극적 원인은 이 여러 양면 사이의 저울추가 어느 지점에서 과도하게 기울어진 것이다. 그것도 일일권이 된 세계화 시대라 정부의 힘만으로는 통제하기 어려운 곳에서.

분노와 혐오감정을 가진 사람이 자발적으로 병원에 가는 일은 없으므로 가족이나 주변에서 유심히 살펴야 한다. 위에서 본 것처럼 혐오행위는 피해자도 아프지만, 본인의 건강도 상하므로 우선 타인이나 사건에 대한 판단과 평가를 중지하고, 무심코 생기는 분노와 울화의 움직임을 차분히 관찰하여 감정을 내맡기지 않아야 한다. 이미 쌓인 간기는 사지운동과 웃음을 통해 풀고 교제와 담화를 통해 이완시켜 주며, 달달하고 매운 기호음식들로 잠시 기분을 전환하거나 예술과 취미활동에 빠지는 것도 간기를 승화하는 좋은 방법이다.

타고난 불평등 문제와 같은 정치적 사안에 대해 정확한 처방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부가 이들 기울어진 지점의 상대적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사회를 살리는 길이라는 추론만은 가능하다. 따라서 사회적 분노와 혐오의 원인을 집단뿐만 아니라 개인의 내적 긴장을 아울러 찾아보고, 피해 당사자도 문제의 원인이 자기가 아니라 혐오행위자의 무력한 고달픔에 있음을 이해하고 애먼 자신만을 극단적 선택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또 하나, 위에서 말한 공동체를 계층이나 남녀, 종교, 이성애자, 민족과 같은 특정 집단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이런 집단들은 이기적 개인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증폭되고 확대된 것들로서 결국 사적인 개인일 뿐이다. 엠케가 증오에 대해 함께 저항하자고 주장하듯이, 집단은 정상적으로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의도된 편견과 맹목 상태로 인해 혐오사회의 원인자로도 등장한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공동체는 ‘나’의 삶에서 무목적으로 만나며 특정한 이념으로 채색되지 않은 낱낱의 개인들 집합을 의미한다.

요컨대 건강한 사회는 개인의 존재와 삶이 필수적으로 타인을 요구하므로 본질상 한 뿌리인 상호관계를 분명히 인지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래야만 현실에서 부닥치는 차이와 문제들에 대해 균형적인 인지를 통하여 자기 파괴적인 흥분과 분노 혹은 자포자기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모쪼록 우리 사회가 편 가르고 미워하며 상대를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야만성을 벗어나, 위아래가 서로 부러워하지 않고 단지 다르다고 남을 멸시하지 않는 건강한 대동사회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지규용 동의대학교·한의학

경희대학교 한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를 취득했다. 세명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동의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로 있다. 대한동의병리학회 회장, 동의대학교 한의학연구소장과 한방바이오연구센터 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관심사는 한의학이 예전에 누렸던 정상과학의 지위를 되찾기 위한 정지(整地) 작업과 한의학 이론의 일반화다. 저서와 역서로는 『격치고역해』, 『새로운 한의학 터닦기』, 『상한론정해』, 『현대상한론』, 『한방병리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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