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근-자연주의와 서체적 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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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자연주의와 서체적 추상
  • 박영택·경기대 교수/미술 평론가
  • 승인 2020.06.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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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택의 그림이야기]
▲ 윤형근, Burnt Umber_Ultramarine, 80.3x100cm, 린넨에 유채, 1991
▲ 윤형근, Burnt Umber_Ultramarine, 80.3x100cm, 린넨에 유채, 1991

수 년 전부터 한국의 단색주의 회화가 시장에서 선호되고 있다. 1970년대 대두된 단색주의는 한국적 미의식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한국현대미술로 논의되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난 현재 그 단색주의가 여전히 미술계와 시장에서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지난 그림들을 다시 보고 있는 요즈음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에 그려진 몇몇 작가들의 그림이 무척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어쩌면 여러 면에서 어려움이 많았을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뛰어난 작품들이 그 당시에 나왔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김환기의 추상을 비롯해 도상봉, 권진규, 박고석, 박노수, 박수근, 이상범과 변관식, 윤형근, 천경자, 장욱진 등이 내가 좋아하는 이들이다. 1970년대 단색주의 화가들 중 가장 매력적인 그림은 윤형근(1928~2007)의 것이다. 나에겐 그의 그림이 격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현재 작품가격이 지속해서 치솟고 있고 그만큼 그의 작품도 자주 보고 있다.
 
1970년대 김환기의 추상화(점화)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이는 김환기의 제자이자 사위이기도 한 윤형근일 것이다. 윤형근은 1970년 한국미술대상 전에서 김환기의 전면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본 후로 번짐을 소재로 한 작품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화면을 수직 또는 수평으로 나누고 공간을 설정해서 청색, 흑갈색의 면을 통해 서체적인 선의 구성, 수묵의 얼룩과 번짐 등의 오묘한 변화를 연상시키는 회화를 선보였다. 강한 질감이 느껴지고 자연스러운 색감으로 물든 아마포(린넨) 위에 갈색과 청색의 유화 물감을 테레빈유와 린시드유로 섞어 몇 겹씩 겹쳐 발라 거의 흑색에 가까운 청갈색 면을 화면 좌우에 배치한 극도로 단순화된 구도의 그림을 그렸다. 소박한 질감, 널찍한 여백, 색채의 은은한 번짐, 흑과 백의 강한 대비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그림은 당시 단색주의 회화를 선보였던 다른 작가들과는 구별되는 품격이 있었고, 한국적 미감과 정서를 대변하는 멋과 깊이를 지녔다는 평을 받았다.

윤형근이 사용하는 목면이나 마로 된 캔버스는 우선 자연섬유에서 오는 소박함과 신선함으로 인해 강한 인상을 준다. 그는 캔버스 위에 짙은 남색 등이 섞인 엄버(umber·천연으로 산출하는 갈색 안료)로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색을 만들어 기름에 흠뻑 적신 후 커다란 귀얄(풀이나 옻을 칠할 때 쓰는 넓적한 솔)을 이용해 위에서 아래로 내리 긋고, 다시 그 동작을 반복한다. 이때 내리 그은 굵은 선 가장자리로 기름이 번지고 캔버스의 올과 올 사이로 스며든다. 이후 화면에 길이와 두께가 서로 다른 기둥 같은 것들이 세워지면서 검은색과 삼베의 누런색이 절제된 조화를 이루는 그림이 완성된다.

여러 번 반복적으로 덧칠된 물감은 천의 씨실과 날실을 따라 스미고 퍼져 표면 위에 물감 층을 만드는 대신, 천의 두께를 통과해 밑으로 배어나오면서 캔버스 뒷면에 또 다른 자국을 남긴다. 이것은 회화의 정면성에 대한 도전이면서 한국 근대 모더니스트 추상과 앵포르멜 추상의 반동으로도 간주된다. 그러나 테레빈유의 번진 자국이 배경으로부터 몽롱하게 떠오르거나 가라앉는 듯한 시각 효과를 줌으로써 시적 몽상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는 애써 그림을 그리기보다 인간의 삶과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며 착시를 배제한 소박한 캔버스에 그저 물감을 스며들게 하고 번지게 했을 뿐이다.

윤형근의 회화는 바탕과 색 면의 이원적 구조를 극복하면서 물든 부분과 여백이 동등한 차원에서 자리한다. 이는 동양화의 여백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다시 말해 색 면과 여백이 단순히 ‘메워진 공간’과 ‘비어 있는 공간’의 대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모두 동질의 공간 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 역시 모더니즘의 이분법적 논리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은 환영과 작위적 형태, 표현적인 제스처를 부정하는 탈형태 추상회화이자 캔버스 천과 물감, 붓만으로 이루어진 자족적인 회화가 되었다. 한편 화면을 물들인 짙고 어두운 색은 나무나 흙, 돌 같은 원초적인 것들의 색채, 자연의 색감을 연상시킨다. 이는 모든 생명체가 결국 죽어서 되돌아가는 색이다. 무엇을 만들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닌 형태가 스스로 생명력을 발휘하는 이 자연주의적 특성, 무작위적인 측면은 한국 추상미술을 말할 때 흔히 거론되는 수사다. 윤형근은 정의할 수 없고 규명할 수 없고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을 그리려고 했고, 자연과 같은 세계를 그리고자 했다. 그것은 김환기가 꿈꾸던 길이기도 했다.

“거대한 나무가 산허리에 쓰러져 있었다. 이미 썩어 문드러져서 뿌리 부분에서는 흙으로 되기 시작한다. 그 썩은 나무의 색은 흑갈색이었으나 흙의 색으로 화하고 있다. 지금쯤은 비바람에 씻겨서 흔적도 없고, 흙이 되었는지 모른다. 자연의 신비, 자연의 섭리가 얼마나 처참한가를 느꼈던 그때의 광경이 지금도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지상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이다. 나와 나의 그림도 그렇게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생명을 연소시킨 흔적으로서 살아있는 증거로써 그날그날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자연은 늘 보아도 소박하고, 신선하고, 아름답다. 나의 작업도 그 자연과 같이 소박하고, 신선한 세계를 지닐 수 없을까. 그것은 어려운 것, 원하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자연과 같이 늘 보아도 물리지 않는 아름다운 작품을 그리고 싶다. 그것이 나의 소원이다.“(작가노트)


박영택·경기대 교수/미술 평론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뉴욕 퀸스미술관에서 큐레이터 연수를 마쳤다.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를 거쳐 1999년부터 현재까지 경기대학교 서양화·미술경영학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전시분석, 미술비평, 큐레이터십, 이미지 읽기, 현대미술의 이해 등을 강의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식민지시대 사회주의미술관의 비판적 고찰」 「한국 현대동양화에서의 그림과 문자의 관계」 등이,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테마로 보는 한국 현대 미술』을 비롯해 다수가 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 서울시립미술관 운영위원, 한국미술품감정연구원 이사, 정부미술품 운영위원, 아트페어 평가위원, 2020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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