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주의 대학
상태바
관료주의 대학
  •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 승인 2020.06.07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학직설]

결국 학생들과 물리적 거리는 물론 사회적 거리조차 좁히지 못하고 학기를 마치게 되었다. 상황이 좋아져 잠깐이라도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얼굴을 맞댈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혹시라도 발생하게 될 조금의 책임도 총장은 떠맡을 의사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총장은 온라인 수업 진행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주문도 하고 요구도 해왔다. 그중에는 “온라인 수업 장기화에 따른 「학생 상담 특별 멘토링」 요청”이라는 것도 있고, “온라인 수업 운영 현황 점검 결과 및 조치 결과 제출 요청”이라는 것도 있다.
 
앞의 것은 “온라인 수업 장기화에 따른 신입생 및 재학생들의 심리 상담과 진로 지도를 모든 학과의 교수님들께 긴급 협조 요청”하는 것이다. 성과가 시원치 않았던지 “대학본부에서 각 단과대학 및 학부(학과)별로 교수님들의 상담실적을 매일 모니터링하여 제공하겠다”고 압박하고 심지어 “가르치는 일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로서 학생 교육에 대한 무한 책임도 필요하다”고 타이르고 있다 (‘통상의 업무 이외의 활동’의 하나로 지급기준 단가가 정해져 있는 ‘학생 상담과 지도’의 성과에 따라 교수들에게 비용을 차등 지급하는 총장이 교수의 ‘무한 책임’ 운운하는 것은 계면쩍은 일이다).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없더라도 학교가, 그리고 교수가 학생들에게 관심을 갖고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얼굴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상담과 지도를 하겠다’며 교수가 전화나 사회적 매체를 통해 학생들에게 연락하는 일이 온당한가 그리고 효과적인가는 의문이다. 더 근본적으로 ‘심리상담과 진로지도’가 교수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인가부터 논란거리다. 오히려 무슨 일이거나 총장이 ‘요청’하면 교수는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또한 무슨 일인가를 하고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관료주의적 발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아무튼 내가 소속한 대학의 학장은 계속 다그침을 당하는지, 소속 교수들에게 참여해달라고 하소연 중이다.

뒤의 것은 내가 진행하는 온라인 수업이 “점검 결과 운영 현황이 ‘0’으로 표시”되었으니 “수업 운영 현황 작성과 누락된 수업자료를 추가 업로드하여 수업 결손이 발생하지 않도록 처리”하고 “조치 결과를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대학에서 진행하는 3천여 교과목의 온라인 수업 운영 현황을 (당연히 피상적으로) 다 들여다본 모양이다. 내 경우, 수업자료는 학기 초에 한꺼번에 학교의 온라인 수업 시스템에 탑재해 놓았고, 수업은 처음에는 온라인에서 글자를 통한 토론과 질의응답으로 진행하다가 온라인 회의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게 된 뒤에는 화상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내 온라인 수업의 운영 현황을 점검하니 ‘0’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내가 대학본부의 ‘지시’를 어긴 것이 있기는 하다. 학교의 시스템을 통해 온라인 회의 시스템에 접속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그렇게 접속하면 속도가 느려지고 학생들도 불편하다고 해서 직접 접속했던 것이다. 또 수업 상황을 녹화해서 학교 시스템에 탑재하라는 지시도 있었지만, 나와 학생들의 수업 현장을 담은 영상이 온라인에 떠돌아다니며 누군가에게 공개될 일을 염려하여 듣지 않고 있다. 그런데 염려한 대로 대학본부에서 수업 상황을 들여다본 것이다. 근래 대학에서 경쟁력 강화, 성과관리 등을 핑계로 교수의 전문 노동에 대한 부당한 감시와 통제가 일상화했는데 이것도 그중 하나다. 게다가 들여다보니 ‘0’으로 나왔으면, 먼저 당사자에게 어떻게 된 일인가 사실 확인부터 해야 할 터인데, 그런 과정을 건너뛴 채 다짜고짜 “수업 운영에 철저를 기하라, 조치하고 결과를 제출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수업마다 사정이 달라서 일일이 사실을 확인하고 사정을 고려할 수 없다고 할 것이지만, 그것이 바로 편의적, 획일적, 권위적 관료주의이다. 관료주의가 대학을 장악하면 형식주의와 성과주의가 전면에 등장하고 연구와 교육의 전문 실행자인 교수들의 관심과 창의는 억압되거나 배제된다. 그 결과는 대학의 침체이다. 행정 훈련과 능력이 부족한 교수들이 구태여 대학의 보직을 맡는 까닭도 그런 폐해를 방지하려는 데 있다. 그럼에도 요즘에는 교육·연구와 보직을 이중으로 수행하기에 벅차게 행정업무가 많아진 탓인지, 대학의 목표와 사명을 잊고 ‘기업적 대학’을 만드는데 몰두하는 ‘관료’보다 더 관료적인 보직교수들이 많아졌다.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주 연구 주제는 사회과학철학, 사회과학방법론, 그리고 사회이론이다. 저서로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역서로 『맑스의 방법론』, 『경제,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 『새로운 사회과학철학』, 『지구환경과 사회이론』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