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세계 이해 - 이성과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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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세계 이해 - 이성과 감정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6.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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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1강>_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윤리와 세계 이해 - 이성과 감정」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1강 김우창 교수(고려대 명예교수)의 강연 중 결론부를 발췌해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김우창 교수는 “우리의 세계 인식에서 그리고 윤리 의식에서 감정의 작용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면서 “그것에 주의함으로써, 동양적 사고의 한 유형을 스케치해보려”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전통적 사고와 감정의 양식에 대한 여러 고찰들을 검토”하고 “윤리와 사실 그리고 감정이 얽히는 여러 사안에 대해 언급”하는 데 이어 “그리하여 참으로 깊이 있는 사고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생각”해보기에 이를 것이라고 밝힌다. 왜냐하면 한국이 “근대 국가의 틀을 갖출 수 있게 되었”으나 “인간의 자아는 물질적·사회적 욕망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관심을 완전히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그 같은 이유로 “스스로와 스스로가 거주하고 있는 세계를 포함하는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반성”, 즉 “도덕적 실용주의를 넘어 이론학을 포함”하는 정도의 문명 재수립에 준하는 “사고의 확장과 심화”가 절실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지난 5월 9일, 김우창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1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5월 9일, 김우창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1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근대화의 물질적·정신적 현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삶의 물질적 조건의 경시, 국제 관계의 경시, 국가 정책의 내면화, 국제적 평화주의 등등 — 그 나름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면서, 유학에서 도출(導出)할 수 있는 이러한 이상들은 다시 인간과 인간적 삶의 조건에 비추어 반성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아마 그러한 비판적 검토는 상당히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근대화가 유교적 전통 그 유토피아적 사고가 가지고 있던 많은 인간 이해를 송두리째 버리게 하였다는 근대화의 현실이다. 이것도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하는 사안이다.

17세기 이후 세계사의 흐름은 근대화였다. 그것은 물론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의 형태를 가진 국제적인 세력의 충돌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전적으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개조하여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하는 사건이었다. 근대화는 전통적 국가를 근대 국가로 변혁케 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요구하였고, 또 종종 우리의 사고에서 잊히는 것은 그것이 내면적 사고의 틀의 개조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나름의 에피스테메의 수립 또는 재수립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한 사회가 근대에 들어선다는 것은 사고와 개념 등에 있어서 새로운 에피스테메의 지평이 생겨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온전히 공리적 계산의 세계관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보다도 강조해야 할 것은 윤리적 주체와 그 완성의 이상의 담지자가 되는 문명을 재수립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근대적 주체는 도덕 실용의 주체라기보다는 물질세계의 이론적 주체이다. 그러한 주체가 제기하는 문제의 영역은 윤리 도덕을 통한 자아 완성의 가능성보다는 물질세계의 정복과 경제적 부(富)의 성취에 있다. 그러한 세계에서 윤리적 족쇄(足鎖)에서 풀려난 자아는 자아 중심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움직이고 성적 만족, 사회적 경쟁에서의 성공 그리고 물질적 부의 축적을 욕망한다.

이제 한국은 거대한 역사적 시련을 통하여 그러한 자아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근대 국가의 틀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는 물질적 사회적 욕망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관심을 완전히 떠나지 못한다. 그것은 감추어지고 억압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윤리적 독단론이 추구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참다운 만족의 자원이 될 수 없다. 새로운 주체, 새로운 자아의 의식은 단순히 일방적으로 건설된 윤리 도덕이 아니라 사실의 세계를 포함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와 스스로가 거주하고 있는 세계를 포함하는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반성으로부터 나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하여 인간이 물음을 제기하는 방법도, 도덕적 실용주의를 넘어 이론학을 포함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이론학은 주어진 현실에 대한 반성을 기본으로 하는 물음의 방식을 갖는 학문적 접근이다. 그것은 사고의 확장과 심화로써만 이루어낼 수 있다.

이제 도덕적 당위를 넘어 우리의 사고는 사물에 대한 반성, 인간 존재의 내용에 대한 탐구를 포괄하면서, 거기에서의 윤리 도덕의 위치 — 이러한 것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물론 지난 역사에 있어서의 윤리적 인간의 문제, 그것도 깊은 존재론적 의미를 가진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디에서 유래하든지 간에, 윤리 도덕의 물음에 대한 탐구가 없이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행복한 사회가 성립할 수는 없다.

대체로 한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들었다는 것은 국제적으로 인정된 사실이다. OECD의 여러 국가 가운데 한국의 경제 능력은 10위 또는 11위가 된다고 한다. 흔히 산업 경제와 민주주의는 근대 국가의 두 지주(支柱)라고 한다. 경제에 이어 민주화에 있어서도 한국은 그 기본적인 구조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지표들의 조사에서 놀라운 것은 사회 신뢰도라는 관점에서 한국은 OECD 여러 나라에서 최하위에 놓인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발(Jean Wahl)의 말에 “세계에 대한 신뢰(la confiance au monde)”라는 말이 있다. 한국인은 이러한 신뢰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다른 여건이 만족할 만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사는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이 없이는 행복한 삶은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이나 이웃이, 윤리적 도덕적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윤리적 사고의 근본과 관련하여, 필요한 것은 보다 넓은 윤리적 사고에 대한 탐구이다. 그것은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 인간의 이상을 투영하는 것보다는 더 현실적인 탐구여야 한다.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유물주의의 현실이다. 그러나 참으로 깊은 윤리적 반성도 거기에 발을 붙일 수 있어야 한다. 물질적 세계는 넓게는 인간이 거주하고 있는 세계이고 존재론적 근본에 이어지는 삶의 조건이다.

위에서 우리는 도덕적 실용학에 대하여 이론학(theoretics)을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학문적 물음의 근본으로서 인간이 세계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 사실에 대하여 또는 더 넓게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칼 야스퍼스의 용어를 빌려, “포괄자(das Umgreifende)” 곧 — 실존적 자아(Existenz)를 둘러싸고 있는 큰 범위의 세계, 즉 포괄자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사고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필요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사고인자(思考因子)를 갖는다. 또는 더 간단히 말해, 필요로 하는 윤리학은 그 물음의 지평 안에서, 존재론적 질문을 발하고 거기에 윤리 도덕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하든 이것은 거대한 계획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좁은 범위 안에서는 오늘의 물질적 욕망의 세계, 그것이 구성하는 출구 없는 상황에서 어떤 사실적인 윤리 도덕이 있을 수 있는가를 간단히 생각해볼 수는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이것을 체계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간단한 예를 들어 넘겨보기만 하였다.

다시 나일런 교수가 그의 오경(五經)에 대한 연구에서 밝히는 중요한 사실을 상기해본다. 중국의 고전은 서기 전 2000년대에서 1000년대까지 소급해, 갑골문자, 죽간(竹簡)에서, 종이에 쓴 글, 인쇄물, 문자 등 기록 보존술의 변화, 정권과 정치 체제의 변화 등을 거치는 사이에도 계속 집적되고 논쟁의 대상이 되고 선정되고 보존되고 주석된 결과의 결실물이다. 중국 경전의 역사를 보면, 한 사회의 사상적 중심을 이루는 문헌이 얼마나 긴 역사의 시간에 얼마나 많은 집단적 노력을 통해서 확립되는 것인가를 느끼게 한다. 중국 문화에서 경전이 되고 고전이 된 문헌들이 차지하게 된 높은 위치는 중국 문화의 정체성을 이루는 지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인의 마음에서, “역사는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지혜를 집적하는 터가 되고, 최장(最長)의 지속성을 가진 역사가 그 계승자에게 최선의 문명 진입을 허용하게 된다”는 생각이 성립하였다. 중국인의 심성에 중국이 대제국(帝國)이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중국이 “거대한 문명의 자산을 가지고 그것에 접근할 수 있고”, 긴 역사의 시간 속에서 집적된 “달리 찾기 어려운 풍부한 [문헌적] 인간 자료를 가진 것에 관계되는 일이다” — 나일런 교수는 오경(五經)의 역사를 말하면서, 고전이 된 중국의 문헌들을 이렇게 평가한다.

이러한 고전 문헌의 무게는 물론 중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고전들은 오랫동안 한국의 고전이 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중국의 군사력 그리고 정치력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 강한 것은 그러한 고전들의 보편적 호소력이다. 그 호소력이 한국의 학문 중심에 놓였던 것이다. 희랍의 철학적 문학적 고전들이 유럽에서 가지고 있던 의미도 이와 비슷하다. 20세기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의 한 사람이 하이데거인데, 그의 철학적 사고의 많은 부분은 희랍 사상에 대한 주석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의 저작으로 희랍 문헌을 거론하지 않는 것은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렇다고 그가 희랍 철학의 역주(譯註)에 주력한 학자라고 할 수는 없다. 하이데거는 희랍 전통에 대한 쉼 없는 언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20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여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중국의 문화 전통에서 어떤 것은 한국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려는 의도에서이다. 물론 중국의 고전이 한국에서 수용되는 과정에서, 재선정과 재평가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것은 그것대로 연구되어야 할 사안이다. 그렇기는 하나 사상의 수용과 평가에서 민족주의적 기준을 앞세우는 것은 스스로 변방인이 되는 일이다. 기준은 어디까지나 보편성이다. 거기에 움직이는 주체의 힘은 이성이고 윤리 도덕의 의식이다.

중국 고전의 긴 역사를 언급한 것은 새로운 고전 정립의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말하였기 때문이다. 중국 고전의 길고 복잡한 역사는 다른 나라의 고전과 사상을 말하는 데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이번의 네이버 강연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문화 전통과 그 고전에 관한 것이다. 여러 문명에서 고전 전통이 어떻게 문제를 묻고 해결하고 작용했는가를 해설하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의 중요 문화 전통의 많은 것이 이제 우리의 사상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중에도 서양의 과학, 서양의 근대 사상, 그 근원으로서의 희랍 사상은 우리의 사고 작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근거점이 되었다. 사상과 삶의 지침으로서 기독교가 오늘의 한국에 막대한 중요성을 가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거기에다가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이슬람이 중요한 것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불교와 그 근원으로서의 인도의 사상과 문화에 대한 지식과 연구는 세계의 중요한 문화의 또 하나의 흐름을 배우는 일이고 우리 자신의 문화적 배경 — 사실 유교보다 더 오래된 우리 자신의 과거의 문화 배경을 공부하는 일이다.

이러한 것들을 공부하고 하나로 집약하는 일은 실로 거대한 계획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계의 중요 문명에 대하여 공부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현학적(衒學的)인 관심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그리고 세계의 사상은 이제 우리 현실이 되어 우리를 압박하는 힘이 되었다. 어떻든 그것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늘의 현실을 아는 데에 필수적인 일이다.

이 글은 오늘의 큰 걱정거리인 코로나바이러스의 역병에 대한 논설로부터 시작하였다. 그 논설은 벌써 한 달 전에 작성한 것이지만, 그 문제는 지금도 우리의 큰 걱정거리로 남아 있다. 그러면서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형편 그리고 세계 전체의 생각과 형편을 바꾸어놓을 것이다. 그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지만, 몇 가지 점에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놓지 않았나 한다.

그 하나는 물론 우리가 세계에 산다는 사실을 잊지 못하게 한 것이다. 많은 문제는 이제 어느 때보다도 세계적으로 생각되어야 할 문제가 되었다.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세계 내에 거주한다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게 하고, 그것에 적응하는 데에 몇 가지 사실을 받아들이게 했다. 하나는 부딪치는 문제에 대하여,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하고, 과학자의 의견을 참고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문제에 대한 대응은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정치는 분명한 대책을 가지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정부의 힘은 강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강경 대책은 국민의 적극적인 동의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의 동의 없이 강한 권력은 성립할 수 없다. 국민의 동의는 무분별한 대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포함하여, 자기의 삶의 영역을 문제의 관점에서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는 국민의 동의이다.

이 모든 과정의 바탕에는 이성적 사고와 삶의 도덕적 윤리적 의무 의식 그리고 삶의 보람의 수행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존재한다. 인간의 문명이 어떤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가, 어떤 도덕적 물음을 두는가, 어떤 존재론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 여기에 대한 반성은 우리의 지식과 지혜의 자원에 기여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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