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문화적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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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문화적 대화
  • 이근세 국민대학교·철학
  • 승인 2019.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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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번역은 도래할 ‘글로벌’ 세계에서 가능한 유일한 윤리이다.” 현대 프랑스 철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프랑수아 줄리앙(Francois Jullien)의 선언이다. 현대철학자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번역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줄리앙은 번역 자체가 철학 작업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문화 간 대화는 각자가 자기 언어로 타자를 번역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번역이 문화적 대화에 본질적인 이유는 자기의 언어 안에서 다른 쪽 문화의 의미를 통해 자신을 재가공하면서 자기 언어의 습벽(習癖)을 재고찰하게 되기 때문이다. 언어가 곧 사유는 아니겠지만 사유는 언어를 자산으로 활용함으로써 전개된다고 할 때 번역은 문화들이 서로 맞대면하면서 서로 간의 간극을 통해 각자의 사유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작업이다. 이런 의미에서 번역은 윤리적 위상을 지닌다. 번역은 타자에게서 자기의 범주를 재발견하는 자기화 작업이라기보다는 두 언어 사이의 긴장을 통해 자기와 거리를 두며 되돌아보는 작업이다.

언어 및 번역과 관련하여 서구와 동아시아의 차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를 들어 유럽의 창조성은 문화적 언어들의 복수성에서 비롯되었다. 유럽에서 ‘지식인’ 또는 ‘교양인’은 우선 여러 언어(예를 들어 희랍어, 라틴어)를 아는 사람으로 정의되었다. 한 언어와 다른 언어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용과 재해석을 통해 유럽은 생산적이었고 쇄신되었고 창조적이었다. 번역의 실험은 철학이 서로 다른 언어 간의 횡단을 통해 풍부해지는 효과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특히 문화적 대화를 통한 중요한 철학 작업은 각자의 사유를 자신이 속한 문화의 습벽으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탐색하도록 해준다는 데 있다. 번역을 통해 문화들을 맞대면시키는 작업은 단지 문화 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문화들 간의 간극을 작동시키고 자기 문화의 근거 없는 정체성에 균열을 일으킴으로써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이 번역이다. 번역을 통한 문화적 대화는 세계를 엄습하는 단형화(uniformisation)에 저항하기 위한 공통의 지성적 방식이자 정치 활동이다.

조선 후기 서학(西學) 수용과정에서 역사적 흐름을 고집스레 거부하고 문화를 단형화하면서 비롯된 가장 아쉬운 귀결은 아마도 언어의 문제일 것이다. 장기간에 걸친 천주교 금압정책은 이미 거스를 수 없게 된 서구문화 수용의 필수 방편인 서구어 습득을 어렵게 만든 것이다. 결국 개항 이후에도 서양 언어에 통달한 인력의 부재는 외교 활동 및 서구문화의 직접적이고 주체적인 선별을 힘들게 했기 때문에 다시금 중국과 일본을 통한 매개를 거쳐야 했고 이는 파행일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역사는 언어 능력이 사회에 대한 외부의 충격을 완충하는 기제라는 점을 실증해주며 번역을 통한 문화 간 대화의 필요성을 알려준다.  

2세기 전 우리는 거대한 세계사적 흐름과 함께 다가온 문화변동을 적절한 완충 없이 혹독하게 겪었다. 오늘날의 상황은 비록 현저히 달라졌다고 해도, 앞으로 우리에게 또 다시 어떤 충격이 밀어닥칠지 모르며 정확한 예측도 어렵다. 분명한 사실은 기존 열강의 문화를 포함한 여러 문화들과 계속해서 대화를 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점이다. 모국어와 외국어 능력을 두루 요청하는 번역은 어려운 만큼 중요한 작업이다. 21세기의 세대는 열강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상황에서 ‘코리아’의 위치를 견고히 지키면서 동시에 다문화, 개방성, 창조성의 기반을 확보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떠안게 된다. 번역을 통해 문화들 간의 대화의 장(場)을 끊임없이 넓히고 또 심화해나가는 것은 현재를 사는 지성인들이 떠맡은 윤리적 책무이고 미시 정치적 과제이다.

 
이근세 국민대학교·철학

경희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 대학교 철학고등연구소(ISP)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브뤼셀 통·번역대학교(ISTI) 강사를 역임하고 귀국하여 현재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서양 근대 철학, 프랑스 철학이며, 점차 연구의 초점을 동서 비교철학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저서로 『효율성, 문명의 편견』, 『철학의 물음들』 등이 있고, 역서로 『스피노자와 도덕의 문제』, 『변신론』, 『전략: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중국까지』, 『스피노자 서간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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