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의 코와 인간의 ‘언어본능’은 결코 역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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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의 코와 인간의 ‘언어본능’은 결코 역설이 아니다
  • 김재호 서평위원/과학전문기자
  • 승인 2020.05.3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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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서평]

■ 서평_『언어본능(마음은 어떻게 언어를 만드는가?, LANGUAGE INSTINCT)』(스티븐 핑커(심리학자) 저, 김한영·문미선·신효식 역, 동녘사이언스, 2008.12.20.)
 

‘동일한 마음의 구조와 동일한 언어본능’ 심리언어학자를 자칭하는 스티븐 핑커는 인간의 마음은 동일한 보편문법의 설계 구조를 갖고 있으며, 이로써 누구나 언어본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면, 언어본능은 초창기 고대 인류나 최근 인류세까지 동일했다. 스티븐 핑커는 고상한 척 하는 언어와 문법 전문가들, 그리고 이들로부터 비롯된 규범문법 규칙들을 비판한다. 또한 그는 방언에 대해 '나쁜 문법', '파손된 구문', '부정확한 용법'으로 일컫는 걸 거부한다.

1994년 출간된 『언어본능』은 국내에도 660페이지 가량으로 번역돼 있다. 저자 스티븐 핑커는 언어학, 심리학, 진화론, 생물학, 인류학 등을 아우르는 통섭적 학술 글쓰기를 선보인다. 스티븐 핑커가 주장하는 바는 간단해보이지만, 그 증명 방법은 인간의 본성을 건드린다. 아마도 그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언어본능’을 통해 인종 우월주의나 언어 엘리트주의를 타파하고자 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스티븐 핑커는 현재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이다. 그는 방한하여 진화심리학자로서 세계를 해석하는 탁견을 제시한 적도 있다. 

스티븐 핑커는 촘스키의 이론을 따른다. 촘스키는 인간의 6천여 개 언어에는 보편적인 심층구조가 존재하며, 이는 문법유전자에 입력돼 있다고 강조했다. 촘스키는 정신문법과 보편문법을 주장한다. 정신문법은 인간이 유한한 단어들로부터 무한한 문장들을 만들어내는 비법이 있다는 것이다. 보편문법은 어린아이들이 모두 문법에 관하여 공통된 하나의 설계도를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다는 설명이다.

진화심리학을 따르는 스티븐 핑커는 생물학자들이 구별하는 두 종류의 유사성 개념을 인용해 인간 언어의 유사성을 추적한다. 첫째, 새의 날개와 벌의 날개는 난다는 공통의 기능을 하지만 동일한 기관은 아니다. 둘째, 박쥐의 날개나 바다표범의 지느러미 모양의 발, 인간의 손은 아주 상이한 기능을 갖고 있지만, 이것들은 모두 진화적으로 포유동물 조상의 앞다리가 변형된 상동적(相同的)인 것들이다.

스티븐 핑커는 인간의 언어와 진화적으로 상동적인 특성이 다른 동물에게도 있는지 살펴봤다. 기능과 더불어 진화론적인 측면을 고려한 것이다. 신경해부학자의 연구에 따라, 원숭이의 뇌에서 베르니케 영역과 브로카 영역이 발견됐다. 하지만 인간과 달리 원숭이는 소리의 식별이나 얼굴과 입, 혀, 후두의 근육이나 촉각을 통제하는 데 이 영역들을 사용했다.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인간은 상동적 뇌의 영역에서 새로운 모델인 언어를 발달시켜왔다.

▲ 스티븐 핑커
▲ 스티븐 핑커

상동적인 특성으로서 인간의 언어본능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 무엇인지 떠올려보면 분명 ‘언어’이다. 스티븐 핑커는 현대 인간 사회에선 빠른 사람보단 말 잘하는 이가 승리한다고 적었다. 지금까지 언어가 없는 부족은 발견된 적이 없다. 어떤 한 부족이 언어 없는 부족에게 언어를 퍼뜨리는 언어의 ‘요람’이 된 적도 없다. 오히려 언어는 한 언어가 다른 언어의 문화권으로 들불처럼 번진다. 이게 가능하기 위해선 다른 언어를 수용하는 지능이 인간에게 있어야 한다. 언어 수용 지능은 유연하고, 창의적이며, 선천적이다. 

언어가 인간의 사유 방식에 한계를 정하는 건 아니다. 언어 없이도 충분히 사물과 환경을 구별할 수 있다. 일부 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언어가 인간 사고의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언어가 존재를 한없이 규정하진 않는다. 그 예로 제시된 건 인도네시아 파푸아 다니족의 새로운 색깔 범주 학습이다. 그들이 색깔을 보는 방식이 색깔을 표현하는 단어 학습의 방식을 결정한다. 그 반대가 아니라고 스티븐 핑커는 주장한다. 언어보다 개념이 우선한다.

『언어본능』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인간의 언어본능을 따라갈 수 없다. 인간은 유한한 단어들 속에서 무한한 문장들과 글을 생산해낸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언어는 유한한 입력언어들의 조합으로 유한한 출력언어들만 만들어낼 뿐이다. 인간은 문장을 해독할 때 어렵게 기억하고 쉽게 판단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쉽게 기억하고 어렵게 판단한다.

한 사람이 알 수 있는 단어는 6만 개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이 6만 개의 단어들을 각각 다르게 발음하진 못한다. 유사한 발음들을 구사하는 전략으로 6만 개를 저장하고 있는 셈이다. 영리하다. 또한 한 단어에서 여러 비슷한 단어들로 파생되게끔 유의어들이 조직되어 있다. 6만 개 단어들이 분절돼 있는 게 아니라 유기적으로 엮여 있다.

언어학자들이 보기에 모든 언어에는 언어의 기본 설계도가 내재돼 있다. 한 언어의 기본 성질이 다른 언어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 영어와 중국어에서처럼, 복합어와 파생어 규칙 : sensationalization, Darwinia-nisms. ▶ 영어의 단수-복수 일치 표시와 대명사의 격변화 ▶ 전치사구의 순서를 자유롭게 배치 ▶ 주어ㅡ동사ㅡ목적어 어순 언어들 ▶ 분류사 고집 : 네모난 종이 한 장 = a sheet of paper.

각각의 언어에 내재된 언어의 기본 설계도

스티븐 핑커에 따르면, 약 3,000개의 언어가 빈사 상태다. 이로써 언어의 풍부함이 사라지고, 언어학과 언어학 관련 연구인 마음과 뇌 연구 역시 위축된다. 그는 언어본능이 자연선택과 진화론에 관한 다윈의 이론과 동일하다고 간주했다. 언어는 원래 사회적 활동이다. 인간의 언어지능은 주변의 환경에 대한 언어의 각 세부사항들을 저장하고, 그 사람이 말하는 언어와 일치되도록 한다.  

“현대 코끼리에게 유일한 코가 역설이 아니듯, 현대 인간에게만 유일한 언어본능 역시 결코 역설이 아니다. 여기에는 모순도, 창조주도, 빅뱅도 없다.”-523쪽.

마지막으로 스티븐 핑커는 『언어본능』에서 인간 ‘마음의 설계도’를 다룬다. 정상적인 보통 사람은 각기 다른 여러 가지 본능과 마음의 모듈을 갖고 있다. 이 모듈들은 유사한 공간들을 차지하며, 자신 밖의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이며, 사회적인 세계를 학습하고 지적으로 일반화 해낸다. 우리가 대개 오류를 범하는 건 사람들과 사람들이 말하는 언어의 차이를 선천적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거꾸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언어엔 공통점이 선천적으로 존재한다고 간주해야 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양식과 언어가 달라지는 건 주변 환경과 양적인 변이 때문이다. 스티븐 핑커는 인종의 비유를 든다. 인종이라는 외적인 차이 때문에 각 인종의 내적인 면까지 다르다고 간주하는 건 오류다. 오히려 모든 인종은 인간으로서 상동적인 공통점들을 선천적으로 갖고 있다. 

『언어본능』은 인간 본성을 추적하는 언어학적, 인류학적, 진화심리학적 탐험이다. 자칫 ‘모든 인류는 다르다’는 주장은 인종 간 우열이나 개인 간 서열을 조장할지도 모른다. 스티븐 핑커는 이에 반해, ‘모든 인류는 언어본능이 있다’고 주장하며, 엘리트 문법주의자들이나 언어에 의한 민족 우월성 주창론자들을 비판한다. 그 여정은 진화심리학자이자 언어학자로서 매우 상세하고 과학적이다.


김재호 서평위원/과학전문기자

학부에서 수학을,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학술기자, 과학기자, 탐사보도 연구원 등으로 일했다. <교수신문> 학술 객원기자를 역임했고 현재는 ‘학술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며 과학과 기술, 철학, 문화 등에 대한 비평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레이첼 카슨과 침묵의 봄》,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한다》,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성공 방정식》, 《다시 과학을 생각한다》(공저), 《인공지능, 인간을 유혹하다》(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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