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직업윤리
상태바
일과 직업윤리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5.2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삶의 지혜 46강>_ 신상목 기리야마 대표의 「일과 직업윤리」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여섯 번째 시리즈 ‘삶의 지혜’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카오스홀에서 진행되었다. ‘어떻게 해야 보람 있고 성숙한 삶의 실현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본 이번 시리즈는 주로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객관적인 사실, 또 보다 넓은 사고와 관점에서 처세와 이존(以存)을 보다 확실한 삶의 사실에 이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됐으며 전체 50회로 구성되었다. 46강 신상목 대표(전 외교관·기리야마 대표)의 강연 중 주요 대목을 발췌·요약해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신상목 대표는 ‘어떠한 일을 어떻게 하며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내게 주어진 잠재력(potential)을 활성화(active)”하며 살지, 아니면 “잠자는(dormant) 상태로 방치”하며 살지 하는 “개체 차원의 잠재력 실현 문제’로 치환하여 바라본다. 그리고 그 물음은 “어떠한 잠재력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문제, 즉 “최적의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어떻게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할지로 이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고려 요인”으로 ‘삶과 일’의 관계가 부각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관계를 풀어가는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현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바 “첫째 창의적일 것, 둘째 내게 결정권이 있을 것, 셋째 확장성이 있을 것, 세 가지로 응축”하여 제시하며 그러한 때에 논리적으로 무리 없이 “네트워크에서 발생하는 참여자 간 자원 교환의 규칙”을 따르는 일의 윤리도 지켜질 수 있으리라 이야기한다.  

▲ 지난 4월 18일, 신상목 대표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삶의 지혜〉’의 46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비공개 녹화로 진행됐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4월 18일, 신상목 대표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삶의 지혜〉’의 46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비공개 녹화로 진행됐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들어가며

현대인은 다들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라는 화두(話頭)를 안고 산다. 그 화두의 한가운데에는 ‘어떠한 일을 어떻게 하며 살 것인가?’라는 고민이 있기 마련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천형(天刑)이건 축복이건 일을 해야 하며 삶과 일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대개 화두라는 것이 그렇듯 이러한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각자의 성정(性情), 환경, 경험에 의해 형성되는 주관적이고 개별적(individual)인 깨달음이 있을 뿐이다.

2. YOLO: 한 번뿐인 인생의 의미

‘욜로’라는 말이 유행이다. ‘한 번 사는 인생(You Only Live Once)’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욜로가 한 번뿐인 인생이니 잘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표상하는 삶의 지표가 되려면 그보다는 고차원적인 각성(覺醒)이 필요할 듯하다.

나에게는 그 출발점이 내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다. 나는 왜 소중한가? 창조론은 초월적 존재가 소명(召命)을 부여함으로써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르면 나의 존재에는 신성성(神聖性)이 담겨 있다. 창조론이 미심쩍다면 진화론의 관점에서 볼 때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경위는 더욱 경이롭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의하면 “생물 진화의 주체는 유전자이며, 생물은 모두 유전자의 자기복제를 통해 만들어진 기계적 존재”다. 도킨스의 정의야 어떻든 유전자가 개체의 특성, 능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는 것은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내가 생각이 깊어지는 부분은 내 존재의 원형(prototype)이 유전자라면, 그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형질을 내가 제대로 발현(發顯)시키고 있는가 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나의 유전자가 누구보다 우수한가 열등한가 하는 상대적 우열 비교 문제가 아니라 유전적 형질의 형태로 내게 주어진 잠재력(potential)을 활성화(active)시키며 사는가, 잠자는(dormant) 상태로 방치하며 사는가 하는 개체 차원의 잠재력 실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타고난 잠재력의 일부분만을 현실의 능력으로 발현한다.

다시 욜로로 돌아가서, ‘한 번뿐인 인생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세속적 성공을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사회 공헌 또는 영성(靈性)의 실천을 통한 내면의 만족을 추구할 수도 있다. 일률적인 답은 없다. 나에게는 잘 사는 인생의 정의가 ‘잠재력을 실현해가는 삶’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잠재력이 발현되고 가능성이 현실이 될 때 성취감을 느낀다. 성취감은 기쁨, 즐거움, 뿌듯함 등으로 형용할 수 있는 감정이며, 행복의 조건인 건강한 자존감(self-esteem)과 직결되는 심리이다. 내가 이룬 성취에 타인의 인정(appreciation)이 곁들여지면 더욱 강한 동기 부여가 되겠지만, 꼭 외부와의 관계가 전제되지 않더라도 잠재력 실현의 과정은 자기 긍정을 통한 행복 증진을 촉진할 수 있다. ‘어제보다 나은 나’를 꾸준히 실천하는 과정은 경험해본 사람에게는 상당히 중독성 있는 삶의 지표가 된다. 발현되지 못한 잠재력은 피우지 못한 꽃이다. 가능성이 주어졌더라도 그 실현을 위해 자원이 투입되지 않는다면 그 가능성은 허비된다.

3. 삶과 일: 자원 투입과 우선순위

목표 의식이 뚜렷하면 그렇지 않을 때에 비해 원하는 결과에 더 잘 다가갈 수 있다. 한 번뿐인 인생, 잠재력을 실현하며 살겠다는 것을 목표 의식으로 삼으면 그다음 질문은 어떠한 잠재력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각 개인에게 가용한 자원은 유한하다. 최적의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고려 요인이 되는 것이 ‘삶과 일’의 관계이다. 바꿔 말하면 ‘일은 내 삶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역사적으로 일의 개념 또는 의미가 변화한 것만은 분명하다. 사회 기능이 고도로 분화되어 일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증가한 근ㆍ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삶과 일은 불가분의 관계로 밀착되었다. 산업화의 진전과 노동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새로이 대두한 문제는 일과 여가의 관계다. 일은 단순한 생계수단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가?

헤겔, 흄 등 근대 계몽주의자들은 일에 대한 기존 관념을 전환하여 근대성의 중심부에 배치하였다. 신학적, 철학적 견지에서 일은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자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격상되었고, 근면, 성실, 정직 등의 노동 윤리가 자유ㆍ책임의 원리와 함께 근대 시민의 덕목으로 권장되었다. 일과 여가를 분리하는 이분법은 지금도 팽배해 있다. 노동은 가급적 회피되어야 할 억압 기제로, 여가는 존재의 본질 실현에 기여하는 해방 기제로 간주되는 것이다.

일은 생계유지를 위한 필요악이고 여가는 자아실현을 위한 필수선(善)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일지 말지는 각자가 판단할 문제이다. 다만, 주의를 환기하고 싶은 것은 대한민국 헌법 15조는 “모든 국민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직업의 자유는 원하지 않는 일을 강제당하지 않을 소극적 자유와 원하는 일을 함으로써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일을 향한 자유’의 양면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각 개인이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추구함으로써 얻어지는 ‘개별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 요소이자 행복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불가(佛家)에는 ‘유록화홍진면목(柳綠花紅眞面目)’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버드나무는 푸르고 꽃은 붉으니 그 색들이 각자에게 어울리는 참된 모습[眞面目]이라는 것이다.

일이야말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개별성과 진면목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개인이 일을 통해 개별성을 추구하면 사회에 그만큼의 다양성이 부여된다. 개별성의 총합으로 생성된 다양성은 다시 개별성의 발현을 촉진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져 모두의 행복이 증진된다는 것이 근대 자유주의자들의 세계관이다. 현대인의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이러한 중요성과 의미를 긍정한다면 각자에게 주어진 유한한 자원 배분을 고려함에 있어 일에 높은 순위를 부여하는 것은 비논리적이지 않다.

그러면 어떤 일에 자원을 투입하는 것이 자원 배분의 최적화에 부합하는 것일까? 바꿔 말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일(직업) 중에서 어떤 일을 선택해야 할까? 이 문제는 ‘좋아하는 일 vs. 잘하는 일’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의 문제로 치환(置換)되어 직업 선택을 고민할 때 맞닥뜨리는 대표적인 딜레마로 종종 거론된다.

현문에 우답을 하자면, 나에게는 어떠한 종류의 잠재력 실현을 통해 가장 큰 성취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를 기준으로 일을 선택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내 안의 다양한 잠재력을 발견하고 자신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한 진지한 사색과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인 직업 선택을 위한 준비 과정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한국인들에게는 일과 일터가 혼동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즉 직업이 아니라 직장을 기준으로 삶과 일의 관계를 인식하고 설계하는 것이다. 경제 수준이 향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성, 취향보다 안정을 우선시하고 정부ㆍ공공 기관이나 대기업을 일터로 희망하는 쏠림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큰 조직에 속함으로써 얻어지는 안정감이 일을 선택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고려 요소이지만, 그것이 행복 추구의 충분조건은 아님은 다들 깨닫게 되기 마련이다.

자원 배분과 관련해 또 하나 생각해볼 점은 ‘워라밸(Work-life balance)’ 문제다. 가급적 일을 적게 하고 사생활을 늘려야 보다 자아실현에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인식이 대세이기는 하지만, 워라밸의 개념이 반드시 그런 것인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의문이 있다. 워라밸을 자원투입 문제로 바꿔 생각하면 이 역시 효용 극대화를 위한 최적 자원 배분의 문제가 된다.

일과 여가에 어떻게 자원을 배분할 것인가는 각자의 인생관, 가치관에 따라 판단할 문제이지만, 한 가지 조언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자원 배분 비율이 인생 전반에 걸쳐 균등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즉 최적의 워라밸은 인생 전반을 놓고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그 균형점은 시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 전반에 걸쳐 워커홀릭(workaholic)이 될 필요는 없지만, 인생의 한 시기에 워커홀릭이 되지 않고는 다다를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최소한 그러한 시기에 일에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인생 전반을 시야에 두고 생각했을 때 워라밸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시기(timing), 기간(duration), 정도(intensity)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4. 일의 윤리와 논리: 자원 교환과 규칙

일의 의미는 개인의 자아실현이나 행복 추구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일은 타인의 존재를 전제로 하며 개인이 사회와 연결(connected)되는 접점이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필요하다고(즉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대가를 지불하면서 다른 누군가의 일을 수요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에는 타인의 효용 증대에 기여한다는 사회적 의미가 기본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일의 윤리는 일의 수행에 요구되는 바람직한 태도나 자세를 말한다. 윤리는 대개 내용보다는 실천의 문제이다. 아무리 ‘마땅히’를 강조해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떠한 이익이 있는지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의 윤리를 논하는 주안점은 어떻게 하면 각자가 그러한 덕목을 실천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까에 두어지는 것이 보다 실용적이다. 일의 윤리가 보편성을 가지려면 수행 중인 일에 대한 주관적 선호와 관계없이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고도의 문명을 이룩한 현대인들은 더더욱 그렇다. 현대인들이 지금과 같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사회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탔기 때문이다. 기능주의적 시각에서 본 사회는 부분의 역할이 모여 전체 기능이 완성되는 유기체와 같은 존재다. 모든 사람은 타인이 수행하는 역할에 힘입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역할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고 또 인정받아야 한다.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모든 인간은 타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존재이자 타인이 올라탈 어깨를 내어주는 양면적 존재이다.

일의 윤리에 실천성을 증진하기 위한 실마리는 역할론에서 찾을 수 있다.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해당 일에 자원을 투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를 구성원들의 역할이 상호 의존(inter-dependent)하는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가정하면, 일의 윤리는 네트워크에서 발생하는 ‘참여자 간 자원 교환의 규칙’으로 정의될 수 있다. 어떠한 규칙이 바람직한 교환 규칙인가? 이에 대한 직관적인 답은 ‘공정 교환(fair trade)’일 것이다.

여기에서의 공정이란 참여자 누구도 편향된 이익이나 손해를 보지 않도록 투입한 자원에 상응 또는 비례하는 자원을 회수하는 교환을 의미한다. 어떠한 참여자가 높은 수준의 자원 획득을 욕구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누군가 투입한 자원에 비해 과도한 자원을 획득한다면 그것은 불공정 교환이라 할 수 있다.

일을 하다 보면 무한정 자원을 투입할 수 없으므로 적당한 수준에서 자원 투입을 중지하는 타협점을 찾기 마련이다. 교환을 통해 높은 수준의 자원을 얻기를 원한다면, 즉 상대가 적용한 타협점이 높기를 바란다면, 자신의 타협점도 높여야 공정 교환이 연쇄적으로 반응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자신이 먼저 실천한(베푼) 연후에 타인에게 동등한 실천(베풂)을 바라는 것, 이것이 교환은 공정해야 한다는 명제의 논리와 윤리가 만나는 지점이다.

모든 참여자가 이러한 규칙에 동의하고 네트워크에 참여한다면, 즉 맡은 일을 높은 수준의 성실성, 책임감, 프로 정신으로 수행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타인이 동등하게 성실히 수행한 일로부터 얻어진 높은 수준의 편익의 형태로) 피드백되고 전체로서의 네트워크도 원활히 작동하여 참여자들이 누리는 혜택이 더욱 증진될 것이다. 문제는 네트워크 작동을 방해하는 왜곡 요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공정 교환 명제가 개인 윤리를 넘어 연대(連帶)와 참여의 관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회 윤리를 요구함을 의미한다.

가장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규칙 위반자(cheater)의 존재이다. 특히 공정 교환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특권의 존재, 얌체, 미꾸라지들을 단호하게 제재할 수 있는지 여부가 네트워크의 건전성 유지와 참여자 전체의 이익 보호에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특권과도 연결되는 불평등의 근원으로 세습ㆍ상속의 문제가 있다. 개인이 소유한 자원은 일신전속적 성격의 것과 외생적 성격의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잠재력, 열정, 의지, 지식, 기술 등은 전자이고 지위, 신분, 재산 등은 후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세습ㆍ상속에 의해 태생적으로 소유하는 외생적 자원의 규모에 지나친 불평등이 발생하는 것은 공정에 반한다. 태생적 자원 획득 가능성에 불평등이 있다는 것은 기회의 불평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를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지만, 다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세습ㆍ상속보다 당대의 재능ㆍ노력이 자원 획득에 더욱 유효한 수단으로 기능하는 가능성이 절대적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습ㆍ상속과는 다소 결이 다르지만 ‘크로니즘(cronyism)’ 문제도 있다. 크로니즘이란 사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적 영역에서 편파적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적 맥락에서 말하면 ‘연고주의’와 유사한 개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정 교환에 필수적인 능력 본위, 적재적소, 불편부당 등의 원칙을 실천하는 것은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가 교차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로 하나 더 짚고 싶은 문제가 일에 대한 귀천(貴賤) 인식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유교적 신분제에서 비롯된 수직적 관계 인식이 아직도 뿌리 깊은 탓일 것이다. 이로 인해 자원 유통 체계가 왜곡되어 특정 직역은 지나치게 선호되고 특정 직역은 지나치게 기피되는 불균형이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거론하고 싶은 것은 일할 기회의 문제이다. 일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적절한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다면 당사자는 물론 사회 전체의 행복이 저하된다. 네트워크에서 교환할 기회를 박탈당한 자원은 그만큼의 자원 낭비를 초래하고 네트워크 자체의 안정성을 저해하는 위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자아실현 이전에 생존이 달린 문제라는 점에서 일자리는 사회가 구성원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복지와 분배의 일차적 해결책이기도 하다. 일할 기회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이념의 교조성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이건, 수정 자본주의이건, 제3의 길이건 명칭에 불문하고 실용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5. 맺으며

첫 번째 선택이었던 외교관은 나로서는 과분할 정도로 보상을 받은 일이었다. 다만 어느 시점에 이르자 공직자로서의 보람, 사회적 지위, 경제적 안정, 든든한 조직 배경 그런 혜택들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허전함이 마음속에 커져갔다. 그 허전함의 정체가 잠재력 실현을 향한 욕구였다.

나에게 가장 큰 성취감을 줄 수 있는 일의 조건은 무엇인가?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원점으로 돌아가 고민한 끝에 보다 선명해진 형태로 머릿속에 자리 잡은 답은, 첫째 창의적일 것, 둘째 내게 결정권이 있을 것, 셋째 확장성이 있을 것, 세 가지로 응축되었다.

우동집 경영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조건을 훌륭하게 충족시킨다. 비록 작은 식당이지만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남들과 차별화될 수 있도록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 어떠한 아이디어에 자원이 투입되어 현실이 되는가는 나의 결정에 달려 있고, 이를 통해 얻어진 경험과 지혜는 다른 사업 영역으로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사회적으로 만연한 직업 귀천 의식에 평균 이상의 강한 반발심을 갖고 있는 반골 기질도 식당 창업 의욕에 한몫을 보탠 측면도 있다.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그들의 직업의식의 일면을 느낀 바가 많았다. 비록 한 그릇의 우동이라도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개성과 품질이 담겨 있다면 그 가치는 작지 않다. 외교관은 외교관대로 식당 주인은 식당 주인대로 각자 맡은 직역에서 제 할 일을 다하면 사회에 기여를 하는 것이다. 둘 사이에 어느 쪽이 높고 낮고, 귀하고 천하고의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긍지와 보람은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지 타인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식당이지만 내가 경영자로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부분은, 손님이 맛있다고 칭찬해줄 때의 뿌듯함과는 별개로, 사업체를 일굼으로써 고용을 창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영업자 생존에 녹록지 않은 상황이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 직원을 고용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사업체를 운영한다는 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한다는 의미 외에도 타인에게 일을 통한 잠재력 실현의 장을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비록 나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지만 그 일의 결과가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전에는 느끼지 못하던 책임감과 성취감에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선택은 나를 성장시키고 잠재력을 끌어내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의미가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