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승 제19호, 선비 정신이 오롯이 새겨진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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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 제19호, 선비 정신이 오롯이 새겨진 곳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0.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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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이야기]_경북 예천 백송리 선몽대

넓고 깊다, 물 댄 논. 다랑논 삿갓배미도 가없는 하늘이다. 연둣빛 싹 가득 품은 모판들이 논가에 웅성웅성 앉았고, 길가엔 비료포대들이 탑 마냥 우뚝하다. 육모장의 어린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내의 뒷목덜미와 써레질 하는 농부의 둥근 척추를 바라본다. 거기에는 어떤 종교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는 듯해서, 엉뚱하게도 고통스러울 정도의 진지하고 깊은 책임감이 느껴진다. 논둑에는 노랑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었다. 물러앉은 봄산은 연두로 아슴아슴하다. 예천으로 향하는 924번 지방도를 천천히 달리고 있다. 

▲ 호수 같은 백송마을의 논. 논둑길은 은행나무 길이다.
▲ 선몽대 숲과 1983년에 세운 우암 이열도 기념비. 선몽대 일원은 명승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 나무 밑동 주위에 자연석을 두르고 얕은 못처럼 파 놓았다. 숨 쉬시라고, 오래 사시라고.

선몽대(仙夢臺) 이정표 따라 샛길로 들어서자 와락 호수 같은 논이 펼쳐진다. 논의 서북쪽 가장자리에는 집들이 간잔지런히 들어앉았다. 봄물 깊어가는 소리에 가만 귀 기울이며 만족스럽게 지켜보는 모습이다. 사방은 야트막한 산이다. 서쪽엔 건지산과 운봉산, 동쪽에는 우암산과 석교산, 북쪽에는 삼봉산이 솟았는데 산줄기들이 아늑히 흘러 마을은 제비집 같다. 이곳은 호명면(虎鳴面) 백송리(白松里),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흰 소나무 마을’이다. 백송은 흰 솔, 행솔로 변해 지금은 행소리라고도 부른다. 북쪽 산 너머에는 내성천(乃城川)이 동에서 서로 흐른다. 한 때는 천변의 백사장이 반짝거린다고 백금리(白金里)라고도 했다. 집들을 먼데 두고 호수 같은 논을 에두른 논둑길 따라 내성천으로 간다. 길가에는 은행나무들이 열 지어 섰다. 벼 익고 잎 물들 무렵이면 마을은 아예 황금덩어리겠다.

마을 사람의 대부분은 진성이씨(眞城李氏)다. 입향조는 퇴계의 둘째형인 이하(李河)의 차남 이굉(李宏)이다. 그는 1530년 즈음 백송리로 들어와 1538년에 아들을 낳았다.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다. 우암은 선조 9년 별시에 문과 급제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형조정랑(刑曹正郞), 고령현감, 경산현감 등을 지냈다. 아들로서는 효성이 지극했고 관리로서는 청렴 강직했으며 당대 명필이었다고 전한다. 그가 경산 현감이었을 때의 일이다. 관찰사가 불러서 갔더니 책 제목을 써 달라고 했단다. 우암은 ‘글씨 쓰는 것으로 나를 오라 하였는가’ 하고는 탕건을 벗어던지곤 고향 백송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 선몽대 숲의 ‘선대동천(仙臺洞天)’ 비. ‘선몽대가 산천에 둘러싸여 훌륭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다.
▲ 선몽대 숲의 ‘산하호대(山河好大)’ 비. ‘산이 좋고 하천은 크고 길다’는 의미다.
▲ 소나무 숲이 끝나갈 즈음 천변의 선몽대가 보인다.

은행나무길이 끝나면 울창한 가로수길이 이어진다. 길은 마을에서부터 내성천으로 향하는 개울과 골짜기의 밭 사이에 운치 있게 뻗어 있다. 청량한 그늘이 끝나면 문이 활짝 열리듯 내성천 물길과 십리에 이른다는 백사장과 장대하고 헌걸찬 소나무들의 숲이 펼쳐진다. 넓은 것은 낮고 높은 것은 그윽하여 안온한 세상이다. 소나무 숲은 천변을 따라 150m 정도 넓고 길게 조성되어 있다. 숲은 마을로 들어오는 북풍의 허한 기운을 막아준다. 언젠가 제방을 쌓으면서 나무줄기가 상당한 깊이로 묻혔다고 한다. 줄기 부분이 흙에 묻히면 나무뿌리와 줄기는 숨을 쉬지 못하고 끝내는 말라 죽는다. 그래서 이곳의 몇몇 나무들은 밑동 주위에 자연석을 두르고 얕은 못처럼 파 놓았다. 숨 쉬시라는, 오래 사시라는 배려다.

송림에는 세 개의 비(碑)가 있다. 하나는 ‘선대동천(仙臺洞天)’이라 새겨진 비다. ‘선몽대가 산천에 둘러싸여 훌륭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산하호대(山河好大)’로, ‘산이 좋고 하천은 크고 길다’라는 의미다. 송림이 끝나는 환한 자리에는 우암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멀지 않은 천변에 선몽대가 보인다. 선몽대는 우암산이 내성천으로 뛰어드는 벼랑에 자리한다. 대문간 앞이 온통 민들레 꽃밭이다. 질끈 감았다 뜨는 눈동자 속으로 은빛 갓털이 폴폴 날린다. 그들은 강으로, 숲으로, 솟을대문 너머로 자유롭게 난다. 사람의 대문은 잠겨 있다. 좁은 옆길로 안마당에 들어선다. 좁은 마당에는 푸른 석벽이 가파르게 솟았고 선몽대 정자는 그 절벽에 걸터앉아 긴 다리를 뻗고 있다. 석벽을 쪼아 만든 계단을 올라 선몽대와 나란히 선다. 대문간 너머로 강이 흐른다. 봄바람에 하늘은 시시각각 변하고 강은 꼼짝도 않는 모양새로 시시각각 변한다. 저토록 아득하고 영원한 인상 앞에서 홍진에 기침 나듯 초조함이 생긴다. 

▲ 선몽대. 우암 이열도가 1563년에 지었고 1967년 중수했다.
▲ 선몽대는 가파른 석벽에 걸터앉아 긴 다리를 뻗고 있다.
▲ 선몽대 곁에 서면 대문간 너머 내성천 모래밭이 펼쳐진다.
▲ 선몽대 앞의 내성천과 모래밭. 모래밭에 풀이 많이 자랐다.

우암이 26살 때인 1563년, 그는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노는 꿈을 꾼 뒤 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퇴계는 직접 선몽대 현판과 시를 써서 종손자에게 보냈다. ‘솔은 늙고 대는 높아서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하고 / 흰 모래 푸른 절벽은 그리기도 어렵구나 / 내가 지금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니 / 전날에 가서 기리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지 않노라.’ 우암은 백송에 돌아온 이후 농사짓고 후학을 기르며 선몽대에서 노닐다가 54세에 세상을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왔었다. 약포(藥圃) 정탁(鄭琢),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등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과 벼슬아치들이 선몽대에서 올라 시를 남겼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아버지와 함께 선몽대에 올라 2백여 년 전 선대의 시를 발견하기도 했다고 한다. 선몽대에 걸려 있던 편액들은 지금 ‘한국국학진흥원’에 있다. 시판들은 멀리에 있고 시는 눈앞에 있으나 오늘은 정탁의 차운시에 담긴 성리에 마음을 두어볼까. ‘새벽바람의 산 신기루는 시끄럽다 조용해지고 / 강가의 저녁 비 세차다가 다시 성글어지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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