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에 충실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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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에 충실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는 것”
  • 임병태 기자
  • 승인 2020.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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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공산당 선언 리부트: 지젝과 다시 읽는 마르크스 | 슬라보예 지젝 지음 | 이현우·김유경 옮김 | 미디어창비  | 88쪽
 

슬라보예 지젝이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2018년)을 맞아 『공산당 선언』의 현재성을 되새기고자 그에 부친 서문을 책으로 엮었다. 『공산당 선언』은 현대 세계사에 미증유의 영향력을 끼친 독보적인 저작인 동시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지나간 사상 고전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특히 오늘날 계몽된 자유주의적 독자라면 『공산당 선언』을 일찍이 틀렸다고 판명 난 예언으로 받아들일지 모른다.
 
『공산당 선언』은 과연 과거의 유산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현대 글로벌 자본주의의 역설에 둘러싸인 우리는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에 등장했던 유령을 새로운 방식으로 소환할 필요가 있다. 『공산당 선언 리부트』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당면한 자본주의의 문제를 환기하며 4차 산업혁명의 장밋빛 미래, 선량한 자본가가 감추고 있는 착취를 가시화한다.

지젝은 이 책에서 변증법적 역설을 통해 『공산당 선언』이 지닌 현재성을 거뜬히 증명해낸다. 반복되는 경제 위기, 현실 사회주의의 모순 속에 지젝은 마르크스의 말이 아닌 그의 행동, 그가 가리킨 방향에 주목한다. 마르크스를 이 시대에 걸맞게 호명하는 지젝의 논리 안에서 공산주의는 실패한 해결책이 아닌 진행형의 ‘문제’로서 의미를 얻는다.

이 책에서 지젝은 『공산당 선언』이 여전히 유효한 통찰임을 강조한다. 그러기에 앞서 그는 먼저 자본주의의 현 단계, 글로벌 자본주의의 현실을 직시한다. 협력적 커먼즈의 성장과 기술혁신은 세계를 더 평등하게 만들고 있는가. 지젝은 이러한 변화가 기대와는 달리, 세련된 형태의 계급적 착취일 뿐임을 파헤친다. 시장, 화폐, 상품, 노동의 위상이 달라진 오늘날, 사람들은 ‘세상이 진짜 굴러가는 방식’을 이미 알고 있다고 믿지만, 억압의 쇠사슬은 그들의 바람보다 강고하다.

▲ 공산당 선언 리부트_슬라보예 지젝
▲ 공산당 선언 리부트_슬라보예 지젝

자본주의를 극복할 대안처럼 떠오른 협력적 커먼즈의 성장은 ‘일반 지성의 사유화’라는 전에 없던 위험을 동반했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의 착취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흔히 이야기되지만, 여기에서 지젝은 ‘공정’해지려는 시도, 착취를 없애거나 제한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상품화로 귀결되고 마는 비극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는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노예제가 나타나는 것을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의 구조적 필연으로 파악했다. 예컨대, 학생은 교육을 받음으로써 부채를 쌓고, 그 부채를 자기 상품화, 곧 구직을 통해 갚아야 한다. 제3세계에서 이주한 난민 역시 교육을 통해 노동력으로서만 사회에 통합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자유로운 선택은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실상은 표면적으로 자유의 형태를 띤 비자유가 만연할 따름이다. 장기 고용 대신 불안정한 일자리에 내몰리는 노동자들이 감당해야 할 미래는 잠재력을 스스로 계발할 기회로 포장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경험하는 자유란 ‘선택’이라는 가치에 내몰려 강요당한 결정이기 쉽다. 모든 개인이 시장 주체로서 평등하다는 환상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자발성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투자를 위한 대출과 생계를 위한 대출의 차이는 간과되곤 한다.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등 이른바 사회적 의식이 있는 기업가들을 글로벌 자본의 가장 ‘진보적인’ 얼굴, 바꿔 말해 ‘위험한’ 얼굴이라 지칭하는 지젝의 경고는 서늘하다.

이 시대 단연 눈에 띄는 이데올로기는 급진적 변화에 대한 희망이 없는, 유토피아적 미래를 향한 낙관적인 기대가 제거된 냉소적인 체념이다. 바디우는 이런 현상을 두고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저항이 아닌 희망을 분쇄한다고 정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우리에게 더 이상 가능한 출구는 없는가.

이 책에서 지젝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는 희망이 불가능해 보이는 시대에 『공산당 선언』이라는 한때 잊혔던 희망을 재조명한다. 마르크스가 시대착오적이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시대를 너무 앞섰기 때문이다. “부르주아계급은 세계시장의 착취를 통해 모든 나라의 생산과 소비에 세계주의적 성격을 부여했다.”라던 마르크스의 서술은 지젝의 탁월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여러 증거 중 하나다. 혁명이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고 유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역자이자 해제를 쓴 이현우는 이 글을 현시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와 변혁을 위한 통찰을 돕는 ‘가장 짧은 책’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바로 그 점이 『공산당 선언』과 닮아 있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공산당 선언 리부트』는 단순히 마르크스를 다시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층 교묘하게 강화된 착취로 노동자의 저항과 연대가 어려워진 현대 글로벌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해법을 찾고 싶은 이들에게 던지는 또 하나의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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