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요일’이 쏘아 올린 시와 책 생태계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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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요일’이 쏘아 올린 시와 책 생태계의 희망
  • 백원근 서평위원/책과사회연구소 대표·출판평론가
  • 승인 2020.05.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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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공장 담벼락을 타고 올라 / 녹슨 철조망에 / 모가지를 드리우고 망울을 터트리다 / 담장 넘어 비로소 피어나는 꽃들, / 흐르는 바람에 / 햇살 속에 // 어둠에마저 빛나는, 내가 아직도 통과하지 못한 / 어떤 오월의 고통의 / 맨얼굴

두 연 길이의 짧은 이 글은 박영근 시인의 『저 꽃이 불편하다』(창비, 2002)에 실린 <꽃들>이라는 제목의 시다. 그런데 이 시는 종이로 만든 시집에서 옮겨 적은 것이 아니다. 출판사 창비가 “세상의 모든 시, 당신을 위한 시 한 편, 날마다 시요일”을 내세워 앱으로 서비스하는 회원제 구독 플랫폼 ‘시요일’의 스마트폰 화면이 그 출처다.

시요일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규모를 갖춘 시 감상 앱이다. 출판사에서 전송권을 확보한 한국의 현대시 등 4만 3천여 편을 수록했다. 출판사는 앱 서비스 개시 3년 만에 누적 이용자 4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창립 3주년을 맞은 지난 4월에는 기념 이벤트로 1년 무제한 이용권을 90% 할인했다. 종이책 같은 정가 판매가 아니라 디지털 구독 서비스이기에 가능한 할인이다. 이번에는 단순한 할인 마케팅이 아니라 3주년의 의미와 함께 코로나19로 개학이 연기되어 어려움을 겪는 교육 현장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의도를 담았다.

▲ 시 전문 앱 _시요일_ 화면 (창비 제공)
▲ 시 전문 앱 _시요일_ 화면 (창비 제공)

시요일이 제공하는 콘텐츠 메뉴를 보면, 우선 매일 좋은 시를 배달(푸시)하는 ‘오늘의 시’가 있다. 인상적인 시구를 보여주고, 터치하면 시의 전문과 출전이 나타난다. 시인의 목소리로 시를 들려주는 낭송도 있다. 슬프거나 외로울 때와 같이 여러 상황별로 맞춤해 읽는 ‘테마별 추천 시’는 일종의 시 큐레이션이다. 시인들이 직접 엄선하여 추천하는 시는 읽기 욕구를 자극한다. 이용자가 고른 시를 모아 나만의 시집을 만들어 공유하는 기능은 덤이다. 기성 시인의 시를 감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 시를 창작하여 남기는 ‘시작(詩作) 일기’ 코너도 있다. 풍부한 읽을거리를 위해 재미있게 웹툰처럼 만든 ‘시툰’, 시에 대한 안내, 그림이나 영화 관련 산문도 연재한다.

시요일 서비스에서 무엇보다 훌륭한 기능은 아무래도 검색일 것이다. 통합 검색 창에 입력하면 시의 제목이나 본문에 있는 단어를 곧바로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대중문화에서 가장 빈번한 말인 ‘사랑’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제목으로 345편, 본문에서는 4,055편의 시가 순식간에 검색된다. 데이터베이스가 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번에는 ‘어머니’로 검색해보면 제목으로 191편의 시, 본문에서는 2,579편의 시가 줄줄이 뜬다. 시인의 이름이나 제목 가나다순, 출간일순, 조회수순 등으로 재정렬이 가능하다. 원하는 시를 쉽게 찾는 태그 검색 기능도 있다. 감정(이를테면 #사랑, #그리움/기다림 등), 주제별, 시간, 소재 등 다양한 분류로 읽고 싶은 시를 찾는 데 편리한 길잡이 구실을 한다.

시요일의 구독료 책정은 독특하다. 기존에는 월정액 이용만 제공하던 것이 이제는 1개월 이용권(5,000원), 그 반값인 월 2,500원 수준의 1년 이용권(30,000원), 1년 이용권과 계간지 결합 상품(시요일 + 계간지 창작과비평 배송)을 정가(136,000원)에서 대폭 할인한 4만 원에 제공하는 패키지도 있다. 다른 사람에게 시요일 이용권을 선물할 수도 있는데, 이메일 등 연락처만 알려주면 선물 메시지와 함께 디지털 이용권이 전달된다. 종이책 시집이라면 불가능한 다양한 가격 책정과 기능이 디지털의 유연한 변화와 연결성을 보여준다.

▲ 시요일-앱(대표)
▲ 시요일-앱

창비는 아직은 돈이 되지 않는 이 사업을 창비의 시집 목록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모두 7개 출판사가 참여하여 협업한다. 더 많은 시를 찾아볼 수 있는 플랫폼이 될수록 그 가치와 영향력이 커질 것이고, 여기에 많은 출판사가 참여하는 것이 시 문화의 저변 확산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시를 읽다가 마음에 드는 시집을 종이책으로 구입하는 경우도 있다. 절판된 경우가 아니라면 종이책 시집 판매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책의 적이라는 스마트폰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책이나 읽기 콘텐츠를 독자에게 전달할 것인가. 시요일은 그 대안들 중에서도 맨 앞줄에 서는 주목할 만한 묘책이다. 시를 일상 가까이 끌어당겨 앱 하나로 수만 편의 시를 품에서 꺼내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대학생을 비롯해 젊은 세대가 책보다는 영상과 게임, 오락 콘텐츠로 탈주하는 것을 스마트폰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오히려 스마트폰을 활용하여 지성과 감성이 풍부한 지식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종이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대처하는 출판 비즈니스의 미래 문제이면서, 동시에 다매체 비대면(언택트) 교육의 역할이 커지는 환경에서 대학 공동체 교수-학습 모델의 화두이기도 하다. 


백원근 서평위원/책과사회연구소 대표·출판평론가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로 한국출판학회 부회장 겸 출판정책연구회장, 일본출판학회 정회원이다. 대학에서 출판문화론 등을 강의한다.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화체육관광부 규제개혁위원, 서울도서관 네트워크 위원장, 경기도 지역서점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한국출판산업사』를 썼고, 옮긴 책으로 『서점은 죽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책』, 『책의 소리를 들어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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