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시조 尉仇台, 몽골 칸 오고타이, 金太祖 阿骨打는 同名의 자이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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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시조 尉仇台, 몽골 칸 오고타이, 金太祖 阿骨打는 同名의 자이언트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0.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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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15)_백제 시조 尉仇台, 몽골 칸 오고타이, 金太祖 阿骨打는 同名의 자이언트

“None of your sauce.” “건방진 소리 하지마라. 시건방지게 굴지마라”.

위의 말은 “너의 소스나 신경 쓰지, 남의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라”는 빈정끼 섞인 영어 격언이다. 사실 우리는 내 눈의 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에 박힌 가시만 흉을 보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골자는 같지만 문화 차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표현으로 우리나라는 장맛이 좋아야 음식 맛이 좋다고 한다. 유럽인들에게는 소스 맛이 곧 고기 맛을 좌우한다. 그래서 “Hunger is the best sauce.” 시장이 최고의 소스, 즉 최고의 반찬이라고 한다.
 
동유럽 쪽에 가보니 타타르 소스(Tatar Sauce)라는 게 있다. 주재료가 마요네즈, 케이퍼, 거킨이라는 이름의 작은 초절임용 오이인 이 소스의 원조는 프랑스로 주로 대합이나 굴 같은 해산물 튀김 요리에 얹어 먹는다. 나라와 민족마다 이름난 소스가 있는데 폴란드 사람들은 Sos tartarski라는 이름의 소스를 애용한다. 타타르는 종족 이름이다. 현재 국가로서의 타타르는 러시아 연방에 속하는 자치 공화국(The Republic of Tatarstan)의 하나로 수도는 카잔(Kazan)이다. Tatarstan은 종족명 Tatar와 ‘국가’라는 의미의 페르시아 접미사 –stan의 합성어다.

▲ 타타르 소스는 대개 튀김 요리와 함께 서빙된다
▲ 타타르 소스는 대개 튀김 요리와 함께 서빙된다

Pax Mongolica 시기 이전 몽골 초원의 지배자는 타타르(Tatar 또는 Tartar)족이었다. 옛날부터 이들의 이름은 세상에서 유명했고, 그들로부터 수많은 지파들이 갈라져 나왔다. 타타르라는 이름은 퀼테긴 비문에 처음 등장하는데, 주로 투르코-몽골계의 半 유목국가들이 지배하던 Tartary라고 알려진 북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의 카스피해와 우랄산맥과 태평양 사이 광활한 대륙에 살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들이 한창 흥성할 때, 주변의 종족들은 그 위세에 편승할 요량으로 자신들을 타타르라고 불렀다. 이는 몽골이 잘 나가자 다른 종족들이 일제히 자신들도 몽골이라고 신분을 세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유럽인들에게 몽골인이 타타르로 알려져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내가 타타르를 언급하는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다.
 
백제의 시조는 누구일까? 온조(溫祚)라고 배웠다. 온조는 비류와 형제지간으로 주몽(朱蒙)과 소서노(召西奴)의 자식이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목숨의 위태로움을 느껴 남으로 달아나 졸본에 당도한 뒤 졸본부여왕의 딸과 결혼해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三國史記』는 전한다. 그리고 고구려를 건국했다. 소서노는 비류국왕 송양(松讓)의 딸이거나 연타발(延陀勃)의 여식이라고 한다. 주몽과 혼인하기 전 북부여왕 解夫婁의 庶孫 우태(優台)와 결혼해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사서의 기록이 상이하거나 명확하지 않아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
 
문제는 중국 측의 기록이 우리 사서의 내용과 다르다는 것이다. 통고(通考)는 “백제는 후한 말 부여의 왕 구태(仇台)의 후예”라고 전한다. 또 위서(魏書)도 “백제국은 그 선조가 부여국으로부터 나왔다. 그 나라 백성들은 대대로 한 지역에 토착하여 사는데 지대가 낮고 습한 곳들이 많아 모두들 산에서 산다.... 延興 2년(472)에 그 나라 왕 여경(餘慶, 개로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황제에게 아뢰기를 ‘신이 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있어 승냥이와 이리 같은 흉악한 놈들에게 길이 막혀....변방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어서 천자가 계신 조정만 멀리서 바라보며 그지없이 달려가고픈 마음을 달래고 있다”고 했다. 이 때 개로왕이 보낸 사절단이 “제 독단으로 임명한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弗俟侯), 장사 여례(長史 餘禮)와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司馬 張茂) 등을 삼가 보내어 파도에 배를 띄워 검푸른 바다에서 길을 찾아 나서도록 하였다”한즉, 백제의 위치가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한반도 서남지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 듯도 하다. 그러나 이번 글은 백제의 위치나 풍토에 관한 것이 아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출신에 대한 것도 아니다.
 
분명 온조로부터 시작되는 백제의 선조가 부여왕이라는 중국사서 기록에 대한 의심을 해소하고자 함이다. 통고와 마찬가지로 後周書도 “백제는 마한에 속했던 나라요, 부여의 별종이다. 仇台라는 자가 帶方에 나라를 처음으로 세웠다”면서 백제의 시조를 부여인 구태라고 전하고 있다. 北史 百濟傳 역시 “부여왕 東明의 후손에 구태라는 자가 있어 仁愛가 도타웠는데 대방의 옛 땅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탁(公孫度)이 자기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으며 마침내 東夷 가운데서 강국이 되었다”며 백제의 시원을 부여왕 동명의 후손 구태로 보고 있다. 隋書의 기록은 간명하나 단정적이다. “백제는 부여왕 동명의 후예다”.

▲ 스웨덴 수퍼마켓 판매대에 놓인 폴란드산 타르타르 소스
▲ 스웨덴 수퍼마켓 판매대에 놓인 폴란드산 타르타르 소스

부여왕 동명의 후예라는 구태는 누구일까? “백제는 원래 부여의 별종으로 마한의 옛 땅에 해당한다. 그 후손에 위구태(尉仇台)라는 자가 있었는데, 고구려에 의해 격파 당하고 百家로써 바다를 건넜기 때문에 백제라 부르게 되었으며 동북쪽으로 신라에 이른다“는 당회요(唐會要)의 정보가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遼東太守 公孫度(150~204)은 후한 말 혼란기의 인물로 유주 요동군 양평현 사람이다. 189년(고구려 고국천왕 시기) 동탁의 중랑장으로 동향인인 서영의 천거로 동북방 변방 요동태수가 되었다. 고구려 고국천왕의 대가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과 공조하여 부산적(富山賊)을 무찌르기도 하였으나 고구려와는 자주 다투었고, 선비 역시 견제하기 위해 부여의 왕 위구태에게 집안사람을 시집보내 우호를 맺었다. 197년 고국천왕 사후 발기가 동생 산상왕과의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나 연노가(涓奴加)와 함께 하호 3만 명을 이끌고 귀순하였다. 발기는 공손탁에게서 3만 명을 지원받아 고구려로 쳐들어갔지만 동생 계수에게 패하고 자살하였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동생 산상왕과의 세력다툼에서 밀린 발기가 연노가와 함께 3만 명의 하호(下戶)를 이끌고 요동태수 공손탁에게 귀순한다. 그리고 3만 명의 지원군을 얻어 고구려로 쳐들어갔지만, 동생 계수에게 패해 자살하고 만다. 위구태는 고구려에 의해 격파 당하고 百家로써 바다를 건넜기 때문에 백제라 부르게 되었다.
 
위의 역사 기록들이 시공간적으로 일맥상통하려면, (동)부여왕(즉 졸본부여?) 위구태와 요동태수 공손탁의 둘째딸 또는 宗女와의 혼인(189~204 사이) 이후 197년 고구려 왕자 발기의 귀순과 이후 고구려 침공과 실패 그리고 자살이라는 일련의 역사적 사건의 전개과정에 위구태가 발기를 도와 고구려와 싸우다 패배하고 백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새로운 땅에 나라를 세운 것이 백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요서의 晉平郡 진평현이 백제의 治所라는 기록이 납득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백제의 모태는 부여의 별종인 졸본부여였다. 북부여에서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위기상황에 처한 주몽(동명)이 호위무사 몇 명과 함께 필사적으로 달아나 기존의 부족집단을 접수했을 것이다. 아니면 졸본 땅에 완전 새로운 도읍을 정하고 국가경영을 시작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부여족이기에 왕성을 부여씨로 삼았고, 聖王은 수도를 熊津에서 泗沘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했던 것이다.  
 
백제가 입국 원년에 처음으로 한 일이 동명왕의 사당을 세운 것이었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 “백제는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도읍(固麻城)에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삼국사기》 잡지 제사조)
 
이름에는 의미가 있다. 의미를 발견하기 어려운 한자 이름은 십중팔구 음차어일 가능성이 크다. 백제의 시조라는 尉仇台라는 이름은 어떤 소리를 차용한 것이고, 원음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가?

▲ 몽골제국 제2대 칸 오고타이
▲ 몽골제국 제2대 칸 오고타이

우리가 칭기스 칸의 셋째 아들로 알고 있는 우구데이 또는 오고타이를 한자로는 와활태(窩闊台)로 표기한다. 이 이름의 정확한 어원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벨러 켐프시(Béla Kempf)는 우구데이가 위구르를 의미하는 *oygur에서 비롯되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우구데이의 이름은 *oygur-DAi → *oygudai → ögüdei → ögödei의 순서로 변화했다. 이고르 드 라케빌츠는 13세기와 14세기 문헌들을 살펴볼 때, 우구데이의 이름의 정확한 당대표기는 ögödei 또는 öködei며, ögedei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상하겠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오고타이의 형인 차가타이는 찰합태(察合台)로 借字표기하는데, 이름 말미의 –tai(台)는 남성형 어미다. 고로 Ogodei, Ogadei, Ugedei, Occadai, Ogedai, Ogodey, Ogdai 등으로 전사되는 오고타이는 오고라는 남자, Chagadai, Jagadai, Chaghadai, Chagatai, Tsagaday로 음역되는 차가타이는 차가라는 남자를 지칭한다. Chagatai에서 chaga는 버섯(fungus)을 가리키는 러시아어로 알고 있는데, 기실 이 말은 우랄산맥 서쪽 카마강(the Kama River) 유역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의 언어인 Komi-Permyak어 어휘 чага의 音譯語다. 따라서 차가타이는 버섯돌이다. Chaga가 Chagan에서 끝소리 n이 탈락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몽골어 Chagan은 ‘white’, ‘pure’, ‘rich’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경우 차가타이는 “White boy”다. 몽골어 agu나 achu는 ‘great’, ‘vast’라는 뜻을 지닌다. 금나라 시조 아골타(阿骨打)는 “건장한 사내아이”라서 Agudai라고 이름 붙였을 것이다. 오고타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름짓기는 의외로 단순하다. 그리고 내게 있어 역사 공부의 즐거움은 사람들의 단순함에 바탕을 둔 상상에 있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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