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길의 명소, 최근 떠오르는 천주교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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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길의 명소, 최근 떠오르는 천주교 성지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0.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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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이야기]_충남 당진 신리성지, 솔뫼성지

들 한가운데 구릉이 엎디었다. 그 부드러운 등허리를 밟고 탑이 서 있다. 그 옆으로 긴 주랑이 말 없는 사람들의 행렬처럼 구릉을 향해 걸어 들어간다. 탑으로부터 구릉을 타고 내려와 넓게 펼쳐진 앞뜰에는 모든 일을 마친 이의 휴식처럼 경당들이 앉아 있다. 신리 성지다.

▲ 신리성지. 신리는 조선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교우촌이었고,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처였고, 내포 천주교의 거점이었다.
▲ 신리성지. 신리는 조선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교우촌이었고,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처였고, 내포 천주교의 거점이었다.

충남 서부에서 가장 높은 산은 가야산이다. 해발 700미터가 조금 안 된다. 산 앞뒤의 열 고을을 통칭 내포(內浦)라 하는데 예산, 당진, 서산, 홍성 등을 일컫는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땅이 기름지고 넓어서, 또한 소금과 물고기가 많아서, 수려한 맛도 기묘한 경치도 없지만,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은 곳이다’라고 했다. 넓고 기름진 땅은 내포평야다. 대개 예산군과 당진시에 걸쳐있어 예당평야라고 부른다. 당진의 동남쪽 삽교천 변에 내포 혹은 예당평야를 가진 합덕읍이 있다. 들은 특별히 합덕들이라 부르기도 한다. 1972년 합덕들의 작은 마을에서 과수원을 개발하기 위해 무덤 40여 기를 파묘했다. 그곳에서 묵주가 쏟아져 나왔다. 주워 모은 묵주가 한 됫박이 넘었다. 발견된 시신 중 32구는 목이 없었다. 그 작은 마을이 합덕읍 신리다. ‘천주교를 믿다가 몰살당한 마을’ 또는 ‘천주교 하던 사람의 묘마다 목이 없는 시신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 신리성지 순교자 기념관. 내포의 들을 상징하는 낮은 구릉 위에 2층 규모의 탑이 서 있으며 내부는 미술관이다.
▲ 신리성지 순교자 기념관. 내부는 미술관에는 다블뤼 주교 등 다섯 성인의 영정과 신리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다.
▲ 신리성지 순교자 기념관. 내포의 들을 상징하는 낮은 구릉 위에 2층 규모의 탑이 서 있으며 내부는 미술관이다.
▲ 순교자 기념관의 십자가.

조선시대에는 밀물 때면 삽교천으로 배가 드나들었다. 그 배를 타고 많은 것들이 들고 났다. 서양 선교사들도 삽교천 물줄기를 타고 합덕의 신리로 들어왔다. 1865년부터는 조선 천주교 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주교가 신리에서 살았다. 그 즈음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신자였다. 신리는 조선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교우촌이었고,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처였고, 내포 천주교의 거점이었다. 다블뤼 주교는 신리에서 한국 교회사를 위한 비망록, 한국 순교사를 위한 비망기, 한불사전 등을 썼고 그가 남긴 기록은 한국의 103위 성인을 탄생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로 순교했고 신리 교우촌은 몰살당했다. 그때 순교한 이들의 유적지가 신리 성지다.

▲ 신리 성지의 1만평 대지에 순교 성인들의 이름을 딴 경당들이 들어서 있다.
▲ 신리 성지의 1만평 대지에 순교 성인들의 이름을 딴 경당들이 들어서 있다.

사람들은 신리 성지를 ‘한국의 카타콤바’라고 부른다. 구릉 위의 탑은 순교자들을 위한 기념관이다. 구릉은 내포의 들을 상징한다고 한다. 주랑은 구릉의 내부로 이어진다. 내부 지하는 순교 미술관으로 다블뤼 주교 등 다섯 성인의 영정과 신리 기록화 13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림은 이종상 화백의 작품으로 맑은 동양화다. 어두컴컴한 내부 공간은 무덤을 연상시키지만 음습한 무거움은 없다. 신리성지는 맑고, 밝고, 낮고, 고요하고, 평화롭고, 평온하다. 이 봄날 가만 엎드려 폭폭 숨 쉬는 사방의 평야들 마냥.

▲ 합덕들. 성지 사방이 들이다.
▲ 신리 성지 내 성당.
▲ 솔뫼성지 입구. 성지는 현재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 신부 유적’으로 국가 지정 문화재 사적 제529호다.

합덕읍의 북쪽, 내포평야의 한복판에 송산리가 있다. 사람들은 예부터 솔뫼라 부른다. 주변으로 꼬챙이들, 보암들, 중부들이 낮고 평평한데 그 가운데 소나무 빽빽한 구릉성 야산이 봉긋해 소나무 산, 솔뫼다. 솔뫼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이 태어났다. 그의 가문이 내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0대 선조인 김의현이 아산 현감을 역임하면서다. 충청병마절도사를 지낸 9대 선조 김의직은 임진왜란의 전훈으로 토지를 얻게 되었고, 사헌부감찰과 통훈대부를 지낸 8대 선조 김수완 때부터 김대건의 가문은 솔뫼에 살았다. 1784년경 김대건의 백조부 김종현과 조부 김택현이 천주교에 입교했고, 이듬해 증조부 김진후가 입교하면서 가문 전체가 천주교에 귀의했다. 1821년 8월 21일 김대건이 태어났을 때는 증조부 김진후와 종조부 김종한이 이미 순교한 뒤였다. 가세는 기울었고, 박해는 끝나지 않았다. 조부는 어린 손자를 데리고 솔뫼를 떠났다. 김대건이 7세 무렵이다. 이후 아버지 김제준이 1839년 기해박해로 참수되었고, 당고모인 김 데레사가 1840년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 집안에서만 11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서울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언도받고 순교했다. 25세였다. 그는 1949년 한국 성직자들의 주보성인이 되었고 1984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생가. 2004년 고증을 통해 안채를 복원했으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기념한 동상이 있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생가. 2004년 고증을 통해 안채를 복원했으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기념한 동상이 있다.

만 평이 넘는 솔뫼에 굼실굼실 차갑게 솟은 소나무들이 가득하다. 200년이 넘은 소나무가 80여 그루, 300년 이상 된 소나무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 전체가 현재 솔뫼 성지다. 솔숲의 가장자리를 따라 김대건 신부의 생가, 성당과 야외성당, 성모경당, 기념관 등이 자리한다. 생가는 오래전 사라졌지만 고증을 통해 2004년 복원했다. 마당에는 2014년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 때 이곳을 다녀간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이 동상으로 앉아 있다. 마루에는 김대건의 초상이 걸려 있다. 기념관에는 그의 아래턱 뼈, 시신의 머리를 감쌌던 베와 그 베에 묻어난 머리카락, 그리고 무덤을 덮었던 횡대 조각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친필 서한과 일기, 직접 그린 조선전도, 초상화, 유골을 바탕으로 복원된 흉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서한은 라틴어로 쓰여 있는데 지면을 여백 없이 빼곡하게 메운 작은 글씨가 매우 아름답다.

▲ 솔뫼 성지 십자가의 길.
▲ 성지 가장 안쪽 솔숲에 김대건 신부의 성상이 자리한다. 옆에는 1946년 세워진 순교복자비가 있다.
▲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의 집.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다운 아담한 기도처다.

기념관 옆에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의 집’이라는 작은 성당이 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몹시 아름다운 아담한 기도처로 세상의 모든 매듭진 일들을 풀게 해달라고, 풀겠다고, 기도를 바치는 곳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3주년을 맞아 2017년에 지은 것이라 한다. 두 분 수녀님이 기도를 하고 계신다. 영원과 같은 기도다. 아름다움은 무신론자를 기도하게 만든다. 또한 고통도.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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