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자가 왜 한글 운동을 하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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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자가 왜 한글 운동을 하냐고요?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0.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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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에세이]
▲ 한글문화연대 스무돌 잔치
▲ 한글문화연대 스무돌 잔치

한글 운동을 시작한 뒤 많이 받은 질문이 정치학자가 어떻게 한글 운동을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이었다. 신기한가 보다. 근데 왜 신기할까? 정치학자는 정치를 하는 것이 당연하고 한글 운동은 한글 학자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실제로 국어학자들 중에는 한글 운동에 관심이 없거나 오히려 한글 사랑에 적대적인 이들도 적지 않다.
 
그래도 궁금한 사람이 많은 듯하니 이 기회에 알려 드리겠다. 내가 우리말이나 한글 사랑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냥 타고난 것이다. 예전의 인기 코미디언 김병조씨가 한문을 좋아해 지금도 고향에서 명심보감 가르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내가 왜 대학을 국어학과로 가지 않고 외교학과로 갔느냐고 물어보신다면 그냥 합격선에 맞추느라 그랬다고 말씀 드리겠다. 또 외교라는 말이 좀 멋있어 보였다는 말도 덧붙인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나는 고등학교 시절 별다른 목표나 사명감이 없었다. 다들 그러지 않았나? 몇몇 별종들 빼고는 말이다.
 
중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였다. 선생님 한 분이 갑자기 한자 시험을 보겠다는 것이었다. 어느 선생님이었는지는 생각 안나고 하여간 정규 시험이 아니라 그 선생님이 독단으로 그냥 본 시험이었다.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영광의 45점을 받았다. 50점 만점 아니고 100점 만점이었다. 공부 1등 하던(깨알 내 자랑!) 아이가 한자 시험은 엉망이었다. 그만큼 나는 한자 외우기가 싫었던가 보다. 또 중학교(고등학교?) 시절 집에서 형 친구 하나가 내게 옥편 찾는 법을 가르쳐 준다면서 이리저리 설명을 하는데, 나는 도무지 알고 싶지 않아서 그저 건성으로 "예예" 하고 말았다. 김병조씨였다면 아마 매우 재미있어 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옥편을 어떻게 찾는지 정확하게 모른다. 부수별로 찾는다는 것 밖에 모르고, 실제로 찾아본 일도 있었는지 없었는지 가물가물하다. 그만큼 필요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 중 한분이 황금박쥐였다. 황 금박쥐 아니고 황금박쥐. 그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한글 전용이 옳다고 말하자 학생 하나가 그러면 감상과 감상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고 물었다. 이럴 때 이 두 감상의 다른 한자를 각각 쓰는 일은 한글 전용론자도 당연하다는 듯 하는 일인데, 나는 결코 하지 않는다. 하나는 그저 느끼는 거고 다른 하나는 비평을 가하는 차이란다. 발음도 장음과 단음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뒤의 감상이라는 말은 실제로 쓰이는 일을 본 적이 없다. 어쨌거나 그 선생님은 정의의 사도 황금박쥐답게 “그런 질문은 가장 수준 낮은 질문이다.”라고 일갈하셨다. 동감이다. 대학교 땐가 누나와 그런 말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동음이의어는 어떻게 하느냐는 누나의 주장에 “정사를 돌본다.” 할 때 그 정사를 누가 남녀가 같이 죽는 거라 생각하겠느냐고 내가 반문했다. 대학교 때부터 든다는 보기가 그런 거라니...싹이 노랗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 생각을 남들에게 말하는 것은 삼갔다. 괜히 논쟁하는 것이 싫고 나를 드러내기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한자를 섞어 쓰는 것이 대세였고 한글 전용 주장은 마치 독립 운동처럼 유별나게 느껴졌기(적어도 나한테는)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참 뒤에 동창생들과 얘기하다 우연히 듣기를, 내가 그때 이미 그런 소리들을 했다는 것이었다. 삼간다고 해도 나도 모르게 삐져나왔겠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박사 논문을 번역해서 책으로 내게 되었는데 그때 잊고 있던 우리말 사랑 병이 도져서 모든 글을 한글로만 적었다. 그때까지도 국한문 혼용이 대세였는데 점차 한자를 적게 쓰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뒤 어느 선배 교수가 책을 편집한다고 하여 한글 전용 논문을 주었더니 수고롭게도 국한문 혼용으로 알아서 바꾸어 놓았던 적도 있었다. 그 뒤 다른 저서 원고를 동료 학자에게 한 번 읽어봐 달라고 주었더니 주요 용어들 뒤에 원어를 병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대세였거든. 그래서 조금은 따랐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뭐 한글 전용 투사도 아니고 조금은 대세를 따라주자, 뭐 이런 것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 뒤 몇 년이 흘렀다. 1998년이었던 것 같다. 어느날 학술 서적을 읽는데 엉망진창이었다. 이제 국한문 혼용은 거의 사라졌지만 로마자 즉 영문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여 한글과 영문자가 엉망으로 섞여 있었다. 학술지의 논문들도 그 모양이었다. 당시는 논문이나 학술서에 여러 가지 글자가 섞이고 각주 형식도 제대로 지키지지 않을 때였다. 표준화가 막 시작될 때였다. 그 책을 보니 이제 바야흐로 국한문 혼용 시대가 지나고 국영문 혼용 시대가 온 것 같았다. 잊고 있던 끼가 발동했다고나 할까? 뭔가 갑자기 문을 박차고 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라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지 혼자 발동하였다. 그래서 즉시 이런 저런 글들을 모아 ‘한글과 문화’라는 소식지를 몇 번 만들어 여기저기 보냈다.
 

▲ 한글문화연대로고
▲ 한글문화연대로고

그랬더니, 어라, 생각지도 않았던 반응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한겨례 신문의 최인호 당시 부장이 걸맞지 않은 과장 보도를 해주었고(다 그렇게 과장 보도하는 거라 믿는다), 마침 방송인 정재환이 펴낸 방송용어 순화 책자도 알게 되어 연락하고... 이리 저리 하여 사람을 모아 한글문화연대라는 것을 만들었다. 만들면서도 이 단체가 오래 갈 것인지 무엇을 꼭 해야 할 것인지 등등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냥 만들고 만나고 주장하고 뿌리고 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했다. 역시 즐기는 자는 당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렇게 내 한글 운동은 시작되었다. 궁금증이 풀렸기를 바란다. 이젠 궁금해 하는 사람도 별로 없겠지만 말이다.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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