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버시와 공공성: 개인과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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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버시와 공공성: 개인과 시민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4.19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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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삶의 지혜 50강>_ 김선욱 숭실대 교수의 「프라이버시와 공공성: 개인과 시민」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여섯 번째 시리즈 ‘삶의 지혜’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어떻게 해야 보람 있고 성숙한 삶의 실현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는 이번 시리즈는 주로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객관적인 사실, 또 보다 넓은 사고와 관점에서 처세와 이존(以存)을 보다 확실한 삶의 사실에 이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됐으며 전체 50회로 구성되어 있다. 50강 김선욱 교수(숭실대 철학과)의 강연 중 주요 대목을 발췌·요약해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김선욱 교수는 “프라이버시의 규범성을 이해하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다고 분명히 밝힌다. 즉 “프라이버시에는 ‘보호’라고 하는 규범의식이 연관돼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근거는 무엇인지”, 그리고 “프라이버시와 대척점에 있는 공적 영역에서 요청되는 공공성이라는 이념이 프라이버시와 어떤 규범적 연관성을 갖는지” 들여다보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를 위해 이론적으로는 “공/사 개념을 가장 섬세하게 다루고 있는 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저서에 대한 “주석적인 접근”을 통해 “공/사 개념에 담긴 의미들”을 이해하고, 보다 현실적으로는 미국 법에서 개인 프라이버시를 다루는 세 차원—공간, 자기결정, 정보—과 같이 “프라이버시의 여러 영역들”을 검토한 다음 그것들과 연관되어 있는 규범성을 집중하여 살펴본다.

▲ 지난 3월 28일, 김선욱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삶의 지혜>’의 50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비공개 녹화로 진행됐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나누는 구분은 인간의 삶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공/사 이분법은 개념과 의미에서는 명료하게 구분이 되지만, 실제의 삶의 공간에서는 공/사 영역을 명료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더욱이 현대 사회에 와서는 이 구분이 더 모호해서 그 경계가 불분명하게 여겨지는 경우도 많다. 현대 사회의 분화와 소수자 문제에 대한 감수성 증가로 인해 공/사 구분과 관련한 문제의식이 더욱 섬세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라이버시(privacy)’의 사전적 의미는 사생활과, 사생활이 침해받지 않을 권리라는 서로 다른 층위의 의미를 동시에 지칭한다. 전자는 개인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보호하는 측면을 강조하며, 후자는 개인 정보를 공개 혹은 비공개할 선택적 권리를 의미한다고 하여, 전자보다 후자가 더 적극적 개념이다. 더욱이 후자에는 가치가 개입되어 있다. 사생활은 ‘침해되지 말아야 할’ 혹은 ‘보호되어야 할’ 무엇으로 간주되며, 이런 생각은 현대에 소중히 여겨지는 가치로 간주된다. 이 가치를 담은 개념이 프라이버시인 셈이다.

1. 한나 아렌트의 공/사 개념

공/사 구분과 인간의 조건(condition)

공/사 개념을 가장 섬세하게 다루고 있는 학자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이며, 그의 주저인 『인간의 조건』 제2장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은 백미이다. 공/사 구분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기 전에 아렌트는 인간의 삶이 어떤 조건 가운데 놓여 있는지(conditioned)를 분석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자연 환경과 인간이 만든 인위적 환경 가운데 놓여 있다. 인간이 하는 활동의 경우도 다른 사람이 반드시 현존해야만 가능한 활동이 있는가 하면, 타인의 현존을 필연적으로 요청하지 않는 활동도 있다. 타인의 지속적인 현존을 요청하는 종류의 활동은 행위(action)라고 부르며, 노동(labor)과 같은 활동은 타인의 현존을 요청하는 활동이 아니다. 전자의 활동은 공적 특성을, 후자는 사적 특성을 갖는 활동이다.

사람들이 함께하는 방식도 협업이나 분업을 이루기 위한 함께함의 방식도 있고, 타인의 현존 자체가 소중히 여겨지는 함께함의 방식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타자들이 대체 가능한 모습으로 함께하며 후자의 경우에 타자들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 즉 인간의 복수성(the human plurality)의 사실이 중요하다. 이 두 경우의 함께함 가운데 전자를 ‘사회적(social)’이라 부르고, 후자를 ‘정치적(political)’이라고 부른다.

‘정치적’이란 말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를 의미하는 폴리스(polis)에서 온 말이다. ‘정치적 동물(σῳον πολιτικον)’은 로마 시대에 ‘사회적 동물(animal socialis)’로 번역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political과 social은 같은 뜻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나, 고대 그리스의 polis와 로마 시대의 societas는 그 성격이 다르다.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삶, 인간에게만 가능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가 그리스인들에게는 폴리스(polis)였고 그 회집의 특징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가정과 폴리스

서양의 공/사 개념을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찾을 때 사적 영역은 친밀성의 영역인 가족과 가정경제의 영역인 가정을 모두 포함하는데, 가족과 가정 사이에는 확고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틴어 privat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사적’이란 말의 의미는 ‘내 것’이라는 의미를 넘어 가정경제의 분야를 포괄한다. politikos의 번역어로 사용된 라틴어 socialis는 폴리스(polis)가 했던 역할을 일부 포함한다. 양자는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조직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작동 방식과 인간 결속의 성격이 다르다. 사회적 영역은 전적으로 사적 영역도 아니고 전적으로 공적인 영역도 아니다. 이 영역은 근대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공/사의 구분은 곧 공간적인 상상력과 만난다. 공적인 것은 공적인 공간으로 상상된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의 오이코스와 폴리스처럼 명료하게 구분될 수 있는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처럼 그 공간이 개념적으로 명료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폴리스의 영역으로 들어오려는 자는 가정을 소유하고 있어야 했다. 사적 영역인 오이코스가 폴리스 진입의 조건인 이유는 거기서 인간의 욕구와 필요가 충족되기 때문이다. 폴리스는 자유의 영역이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하므로, 폴리스 참가의 자격이 있는 자는 가정의 우두머리로서 생명과 관련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라야만 했다. 그래야만 공적 영역에서 평등한 자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것의 등장과 공/사 개념의 변화

오늘날 프라이버시는 친밀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며, 사적 영역은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영역으로 간주된다. 아렌트는 이런 의미의 변화가 사회적인 것의 등장과 더불어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 사회적인 것은 원래 사적인 성격의 것이 공적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사적이지 않지만 공적인 것도 아니다. 고대에는 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동일시되었지만, 근대에 들어와 사회가 발달하면서 프라이버시의 영역은 사회적 영역과 오히려 더 날카로운 대립적 관계를 형성한다. 사적 영역을 형성하던 가정경제와 친밀한 가족은 서로 분리가 되어, 친밀성은 프라이버시의 영역에 남겨진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가정경제의 문제이던 것이 근대에 들어와 사회적인 것으로 등장하면서 공적인 성격을 덧입게 되었다. 이로써 생명의 과정(life process)과 관련된 일이 공적 영역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사회는 생명 과정 자체를 공적으로 조직화한 것이며, 여기서 생존과 관련된 활동이 공적 영역의 핵심 과제가 된다.

사회적인 것은 사적인 것과 동일하게 자연에 기반을 둔다는 특성을 가지지만, 역사를 통해 사회적 영역이 근대에 급속도로 성장한 배경에는 생산성의 획기적인 발달과 노동의 분업화 등이 있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조직화 원리는 프라이버시의 영역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모두 공적 영역의 조건하에서 유래한 것이다.

공적인 것의 특징들

공적인 것은 모두에게 들리고 보인다. 공공성은 곧 공개성과 연결된다. 공적 영역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세계(the world) 자체를 의미하며, 이는 사적으로 소유된 장소와 구별된다. 친밀성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마음의 열정(the passions of the heart), 정신의 사유(the thoughts of the mind), 그리고 감각의 즐거움(the delights of the senses) 등이다. 인간 삶의 이런 부분은 불확실하고 그림자로 덮여 있다. 이런 것들이 공적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변형되어 탈사사화되며, 탈개인화되어야 한다.

사적인 삶의 친밀성의 영역은 근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잘 드러나는데, 이 영역에서는 주관적 정동(emotions)과 사적 감정(feelings)이 강화되고 풍요로워진다. 사적 영역은 어두움, 그림자와 같은 비유가 어울리는 영역이다. 우리의 감정이 현실 속에서 실재가 되려면 공적 영역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이 순간은 빛이 비추이는 순간이다. 사적인 것이 공적인 빛을 잘 감당한다고 해서 그것이 공적인 것으로 변모하는 것은 아니다. 사적인 것에는 사적인 매력이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지만 여전히 사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사적인 것의 특징들

사적인 것은 공적인 특징들의 부재로 설명될 수 있다. 공적인 삶은 타인이 보고 들을 수 있도록 자기를 드러내는 삶이고, 공통적인 것을 매개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삶이며, 인간의 수명보다도 더 긴 수명을 가진 항구적인 무엇을 이룰 가능성을 가진 삶이다. 사적인 삶에는 이런 것들이 없다. privatus에 들어 있는 ‘박탈’의 의미가 이런 것이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은 깊은 관계 속에 있다. 특히 사유재산을 중심으로 보면 이 두 영역의 연관성은 선명하게 나타난다. 고대의 경우에는 재산은 공적 영역으로 들어가게 하는 일종의 자격이자 온전한 시민권의 전제조건이었다. 이런 점에서 사적 영역은 공적 영역의 기초였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사적 영역 안에 있던 사유재산의 부분은 공적 관심사가 되고, 친밀성의 영역은 도드라지게 남게 되어 개인의 내적 주관성의 영역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사적 영역은 사회적 영역과 친밀성의 영역으로 해체된 것이다.

프라이버시의 관점에서 볼 때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보이고 들려야 할 것과 숨겨져야 할 것의 구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의 영역에 숨겨져야 할 것은 인간 실존의 신체적 부분, 그리고 생명 유지의 과정 자체에서 필요한 것들 및 그와 연관된 것들이다. 그런데 과거에는 노동하는 자들과 여성들의 존재는 신체의 기능과 생존의 영역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숨길 필요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근대와 더불어 노동이 자유로워지면서 노동은 가정에 숨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2. 친밀성의 프라이버시

하버마스의 공적 영역 개념과 여성주의 비판

『공론장의 구조변동: 부르주아 사회의 한 범주에 관한 연구』에서 하버마스는 ‘공적’(혹은 ‘공공’, public)이라는 말의 의미를 용례에 따라 크게 셋으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모두에게 공개되어 열려 있다는 의미로, 공공장소(public places)와 같은 말에서 사용된다. 둘째는 국가관련 기관에 대한 형용사로서 사용되는 경우로, 모든 법적 구성원의 공공복리와 연관되며 공공건물(public buildings)이라는 표현에서 사용된다. 셋째는 공적 만찬(public reception)과 같은 경우로, 국가를 대표하는 인물이 대표 자격으로 행위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이런 용례에서 하버마스는 ‘공적’이라는 개념의 핵심이 “여론 참가자로서의 공중(대중, public)”이라고 지적한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공론장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은 명료하다. 그가 말한 부르주아적 공론장은 처음부터 보편성의 형식으로 주장될 수 없거나 혹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모든 주제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용했던 점을 감추고 있다는 비판이다. 계몽적이고 이론적 특성을 가진 공중(public)은, 보편적인 것을 다루는 담론에 숙달되지 않거나 그럴 수 없었던 사람들의 모든 이해관심을 단순한 의견으로만 치부하게 된다. 게다가 공적 영역과 시장 및 가족 영역을 구조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후자의 영역에 ‘사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공적 토론에는 부적절한 주제로 간주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때 여성 담론과 특수성에 대한 여성의 관심은 간과되고 진리, 객관성, 이성 등이 남성성과 연계되는 가운데 남성적 특수성은 보편성과 어울려 가장행렬을 하게 된다. 결국 하버마스 논의의 범주적 한계는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로 이어지고, 이는 곧 그의 공적/사적 영역 논의의 한계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친밀성과 프라이버시

친밀성의 영역으로 이해되는 프라이버시는 ‘가족이라는 집단적 사생활’로 규정된 프라이버시이다. 이때의 프라이버시 권리는 가족에 귀속되며, 각 개인 구성원에게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 안에서 개인은 사생활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족 중심의 프라이버시 개념은 두 가지 방식으로 여성들을 실망시킨다고 킴리카(Will Kymlica)는 정리한다. 첫째는 그런 프라이버시 개념은 가학적 남편 혹은 아버지로부터 위협을 받는 여성들에게 보호를 제공하지 못하며, 둘째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비자발적 방식의 사생활을 여성에게 요구한다는 점이다. 정당한 사적인 삶을 원하는 여성은 집단적 단위로서의 가족이라는 프라이버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프라이버시를 요구한다. 이런 이유에서 프라이버시의 문제는 이제 친밀성을 중심으로 한 가족 중심의 관점이 아니라, 고독한 개인의 관점에서 보도록 그 초점이 좁혀지게 된다.

3. 개인의 프라이버시

미국 법에서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문제를 크게 세 부문으로 나누는 관점이 많이 활용된다. 첫째는 공간 프라이버시로, 물리적 공간을 중심으로 한 부문이다. 이는 개인의 물리적 고립이 가능하며 원하지 않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둘째는 자기결정 프라이버시로, 개인의 선택 자율성 혹은 자유로운 결정권과 관련된 부문이다. 셋째는 정보 프라이버시로, 개인정보와 관련된 부문인데 개인의 정보 공개와 관련된 문제가 핵심이다.

공간의 프라이버시

여기서 말하는 공간은 물리적 공간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프라이버시가 보호되기 위해서는 벽보다도 법이 더 필요하다. 프라이버시는 시선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이런 시대에 프라이버시는 사진에서 벗어날 권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개인에 대한 것은 물리적 모습만이 아니라 각종 정보를 통해서도 노출이 되므로 프라이버시는 오늘날에는 물리적인 벽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금하는 법을 통해 보호될 수 있는 것이다.

몸을 가진 개인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연관되는 물리적 공간은 모든 인간에게 필요하다. 이 프라이버시 공간에는 개인의 삶의 형식이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개인의 자아 성찰과 사유가 이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공간이란 반드시 물리적 공간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타인의 집적거림을 통해 생각은 곧 중지될 수 있고, 몸을 부적절하게 다룸으로써 사유를 방해받게 하는 전체주의의 경험을 알게 된 현대인들에게는 자기 성찰과 사유라는 가장 내면적 인간의 활동이 물리적 공간을 요구하거나, 혹은 고립된 공간과 같은 효과를 지닌 상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공간의 프라이버시는 중요하다.

자기결정의 프라이버시

이진우 교수는 프라이버시가 중요한 이유가 자유의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자유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다. 자유주의적 자기결정권으로서의 자유에 프라이버시의 가치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정보기술의 발전과 사회의 투명성 요구로 인해 개인이 남의 눈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희박해진 현대 사회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이 교수는 우리가 속한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목적은 “개인의 자유”, 즉 “모든 시민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영위할 수 있는 정치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프라이버시의 영역이 간섭받지 않은 상태로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호되는 자유를 자유주의적 자기결정권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프라이버시를 보호받는 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놓고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자유는 그런 것만이 아니다. 벌린(Isaiah Berlin)이 적극적 자유라고 명명한, 자아를 실현하는 자유가 있다. 또 필립 페팃(Philip Pettit)이 말한 것처럼, 지배를 받지 않는 가운데서 시민 스스로가 자신의 권리를 향유하는 자유가 있다. 프라이버시의 상황은 이미 그런 프라이버시가 어떻게 보장되는가에 따라 그것이 형성해줄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

개인 정보의 프라이버시

정보 프라이버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서 접근해볼 수 있다. 그 첫째는 정보를 중심으로 한 프라이버시와 표현의 자유의 충돌로 야기된 문제 영역이다. 두 번째는 개인의 정보를 정부가 취득하고 관리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정보 프라이버시에 대해서는 헌법적 권리의 인정 여부에 관해 논란이 있다. 만일 정보 프라이버시가 헌법상의 권리로 인정이 된다면, 어떠한 바람직한 목적을 위해서라도 그것의 침해는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원리가 인권에 대해서는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만일 단지 헌법상 이익의 관점에서만 다루어질 뿐이라면, 개인 정보 수집과 같은 행위는 그 필요가 인정될 때 침해될 수 있다고 판단될 것이다.

개인 정보에 대해 프라이버시 침해 여부를 판단하는 데는 비밀성의 관점과 접근성의 관점이 구분된다. 전자는 일단 개인 정보가 공개되면 그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며 사적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보는 관점이다. 후자는 정보 전파의 관점에 주목하며, 개인 정보가 전파되고 이용되는 방식에 따라 침해 여부가 판단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으로, 정보 전파 및 이용의 방식을 제어함으로써 프라이버시의 보호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4. 프라이버시와 공공성

프라이버시 개념은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 변화에 따라 다른 함의(connotation)와 함께 사용되어왔다. 프라이버시는 인간의 조건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공적 혹은 정치적 삶이라는 인간의 다른 조건과도 연결되어 있다. 특히 정보 프라이버시에 대한 논의는 프라이버시와 공공성의 연결점을 명료히 보여준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가장 사적인 영역인 프라이버시가 가장 정치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전체주의적 지배는 사람들 사이의 모든 공간을 파괴하며 서로를 압박하게 만들어 고립(isolation)이 생산적인 잠재력을 갖지 못하도록 말살시킨다. 또 논리만 작용하는 정신 활동이 사유로 전환될 수 있는 기회를 소멸시킨다. 독재 체제는 공적, 정치적 영역을 파괴함으로써 존속을 도보한다. 그런데 전체주의 체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의 사생활도 파괴하려 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아렌트는 이 능력을 탄생성(natality)이라고 불렀다. 새로운 시작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인간의 자유이다. 자유는 마음속의 자유, 내면의 자유에서 시작하여 정치적 자유에까지 도달한다. 인간이 무에서 탄생한 존재라는 사실이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보증한다. 인간의 탄생이 프라이버시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듯, 프라이버시의 고독 속에서 자아가 형성되고 사유가 작용하며 자유의 씨앗이 잉태된다. 이런 점에서 프라이버시는 인간의 공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이다. 이런 프라이버시의 영역이 보호될 수 있는 것은 법을 통해서이다. 정보 프라이버시와 같은 섬세한 문제를 다룰 때 공적 시선은 더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오늘날의 프라이버시 영역은 공적 영역의 적절한 작용을 통해서만 제대로 보호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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