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부친 숙량흘(叔梁紇)이 무지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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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부친 숙량흘(叔梁紇)이 무지개라고?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0.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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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13)_ 공자의 부친 숙량흘(叔梁紇)이 무지개라고?
▲ 백이와 숙제 고사는 사마천의 『사기』 열전 권 61 백이열전에 전한다
▲ 백이와 숙제 고사는 사마천의 『사기』 열전 권 61 백이열전에 전한다

주학연(朱學淵)이라는 중국학자는 몽골인들이 고구려를 숙량합(肅良合)으로 불렀으며, 明代의 『등단필구(登壇必究)』도 부록 「몽고역어(蒙古譯語)」에서 쇄롱혁(瑣瓏革)으로 옮겨적고 있는데, 이를 현대 몽골어에서는 Solongho(솔롱고)라고 하며, 원래는 ‘무지개’라는 뜻이라고 한다. 나아가 주씨는 춘추시대에 처음 등장하는 朝鮮이라는 국명의 유래와 관련하여, 아침 朝는 하늘을, 고울 鮮은 선명함을 뜻하므로 “선명한 하늘빛”이라는 朝鮮의 의미는 무지개라는 원래의 의미를 대체한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는 또 국명 역시 부락명이 되기도 하며, 부락의 구성원 중의 누군가는 숙량합을 인명으로 사용했음을 18세기에 간행된 『팔기만주씨족통보(八旗滿洲氏族通譜)』에 등장하는 인명 살랑아(薩郞阿), 색릉아(索凌阿)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이 둘은 모두 숙량합의 또 다른 전사형태이며, 심지어 공자의 부친 숙량흘(叔梁紇)도 숙량합(肅良合) 즉 무지개였다. 나는 朝鮮의 의미를 무지개로 보는 것도 그렇지만, 공자 아버지의 이름이 무지개라는 점에 대해서는 더더욱 반대다.    
 
몽골인들이 고려나 고려인을 가리켜 솔랑카(Solangqa) 내지 솔랑가스(Solanggas>Solonggos)라고 부를 때 이 말은 한반도 전체가 아니라 압록강을 중심으로 한 북부 지방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무지개라기보다 황서랑(黃鼠郞)이라는 들짐승을 뜻하는 것이었다. 솔롱고스는 솔롱고의 복수형으로 솔론(~솔랑) 즉 애호(艾虎) 혹은 황서랑이라 불리는 족제비과 짐승을 잡아 그 모피를 시장에 내다 파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는 부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Solangqa와 Solangga에서 보는 –qa와 –ga는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로 우리말 오랑캐, 아자개 등에서 보는 –캐와 –개가 또 다른 이표기다.

▲ 유학의 비조 공자 초상화
▲ 유학의 비조 공자 초상화

大聖 孔子의 부친 숙량흘(叔梁紇, ? ~ 기원전 548)은 춘추시대 노(魯)나라 곡부(曲阜) 창평향(昌平鄕) 추읍(鄒邑, 혹은 鄹邑)의 하급무사였다. 숙량흘이라는 이름에서 ‘叔’은 형제간의 항렬을 나타낸 것으로 통상 ‘字’로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숙량흘은 자성(子姓)에 氏가 공(孔)이며, 이름은 흘(紇)이고, 숙량(叔梁)은 字이다. 그는 노(魯)나라 양공(襄公) 시절 추읍(郰邑, 혹은 鄹邑)의 대부(大夫)였기 때문에 추인흘(郰人紇), 추숙흘(鄹叔紇)이라고도 불렸다. 추읍 사람 紇, 추읍의 삼남 紇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렸을 것이다.
 
숙량흘은 시씨(施氏) 여인을 아내(본부인)로 맞이해 딸 아홉을 낳았고, 아들은 보지 못했다. 대신 그의 첩(妾)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이 맹피(孟皮)요, 자(字)를 백니(伯尼)라 했다. 공자의 서형(庶兄)이 되는 인물이다. 서장자(庶長子)는 이름 앞에 맹(孟)을 붙인다. 이후 숙량흘은 안징재(顔徵在)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아 그녀와의 사이에서 공자를 낳았다. 그의 나이 60대 후반이던 기원전 551년 추읍(鄒邑)에서 일어난 일로 공자는 숙량흘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난 것이다. 알다시피 공자의 이름인 휘(諱)는 구(丘)이고, 자는 중니(仲尼)다. 孔子라는 호칭에서 子는 성인을 뜻하는 존칭 접미사다.
 
공자는 열아홉 살 때 송나라 병관씨(幷官氏)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일 년이 지난 뒤 아들을 보았는데 이름이 백어(伯魚)다. 적장자(嫡長子)는 이름 앞에 伯을 붙인다. 백어가 태어날 때 노나라 임금 소공(昭公)이 잉어 한 마리를 공자에게 선물로 보냈고, 공자는 임금이 잉어를 하사한 것에 감읍하여 아들 이름을 리(鯉, 잉어 리)라고 짓고 字를 백어(伯魚)라 하였다. 백어(伯魚)는 오십 세를 일기로 아버지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맨이름만으로 불렸다. 공자의 부친은 숙량흘, 조부는 백하(伯夏), 증조부는 방숙(防叔)이었다. 우리나라 고려 태조도 그 성명이 王建이라고 하지만, 부친은 룡건(龍建)이고, 조부는 작제건(作帝建)이었다. 마치 ‘建’이 돌림자로 쓰인듯하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甄萱)의 아버지는 농사꾼 아자개(阿慈介)였다. 『이제가기(李磾家記)』에 의하면 아자개의 부친은 각간(角干) 김작진(金酌珍)으로 제21대 풍월주이자 문무왕의 비인 자의왕후의 아버지 파진간(波珍干) 선품공(善品公)의 서자다. 그렇다면 견훤은 김씨여야 한다. 그런데 이칭이 진훤(眞萱)이고 휘가 리훤(李萱)이라는 기록을 접하고 나면 뭐가 뭔지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다. 甄萱-眞萱-李萱에서 첫 글자를 무시한다면 개인의 특징을 보이는 실제 이름은 훤(萱)이어야 마땅하다. 萱의 훈은 망우초, 넘나물, 의남초(宜男草), 근심풀이풀로도 불리는 원추리다. 원추리라는 이름은 훤초(萱草)의 와전이지 싶다. 공자의 아들 이름이 잉어인 마당에 원추리라는 이름이 없으란 법 없다. 그렇다면 견훤은 질그릇 화분 속의 원추리꽃, 진훤은 참 원추리, 리훤은 자두색 원추리꽃으로 보아, 이 셋을 합한 이미지가 우리가 이름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견훤의 의미라 하겠다. 
 
모든 명칭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한자는 특히나 뜻글자이므로 더더욱 그러하다. 공자 부친의 이름으로 알려진 叔梁紇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叔이 형제 서열 3위를 알려주는 표식으로 梁(들보 량)과 함께 쓰여 字로 기능하고 이름이 紇인 경우와 梁紇이 이름인 경우를 상정해볼 수 있다. 전자는 집안의 들보같이 든든한 삼남 흘이로, 후자는 삼남 량흘이(꺽다리 혹은 들보)로 해석이 가능하다. 문제는 사람의 이름으로 쓰인 紇이다. “질 낮은 비단”이라는 뜻의 이 말은 인명(예: 숙량흘)이나 종족 명칭(예: 回紇)에 사용되는데, 흥미롭게도 숙량흘과 동시대 같은 지역에서 함께 산 중요 인물들의 이름으로 紇이 많이 쓰였다.
 
장무중(臧武仲, ? ~ ?)은 중국 춘추 시대 노나라의 정치가로 성은 희(姬)고, 씨는 장손(臧孫) 혹 장(臧)이며, 이름은 흘(紇)이다. 그러므로 장손흘(臧孫紇)이나 장흘(臧紇)이라고도 한다. 무중(武仲)은 시호다.
 
계무자(季武子, ?~기원전 535년) 역시 희성(姬姓)의 계손씨(季孫氏)로 이름은 숙(宿)이다. <國語>에는 이름이 숙(夙, 일찍 숙)으로, 계문자 계손행보(季文子 季孫行父)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다. 宿과 夙은 소리값이 같다. 계무자에게는 嫡子가 없고 대신 庶長子 공서(公鉏)와 작은 서자 계손흘(季孫紇)이 있었다. 슬기롭기로 이름이 높아 성인(聖人)으로 불렸으나, 삼환의 후계자 분쟁에 개입했다가 제나라로 망명했다.

▲ 수양산에서 고사리 뜯는 백이와 숙제_송대(宋代) 화가 이당(李唐)의 채미도(采纏圖)
▲ 수양산에서 고사리 뜯는 백이와 숙제_송대(宋代) 화가 이당(李唐)의 채미도(采纏圖)

말 나온 김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자면 이 둘은 商나라 말기 고죽국(孤竹國)에 살았던 형제지간으로 공히 子姓의 묵태씨(墨胎氏)다. 부친은 고죽국의 후작 아미(亞微) 묵태초(墨胎初[mo tao chu)다. 백이의 휘(諱)는 允, 字는 公信이다. 伯夷에서 伯은 첫째 자식을 가리키고, 夷는 죽은 뒤에 붙인 시호에 해당한다. 숙제의 숙은 셋째 아들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동생인 숙제의 휘는 치(致)/지(智), 字는 공달(公達)이며 시호가 齊다. 伯仲叔季 항렬에 따른 작명을 고려한다면, 백이와 숙제 사이에 둘째 아들 아빙후 풍이 있었으므로 그의 시호는 ‘仲*’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어지러운 세상 어렵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백이와 숙제 형제의 고사는 삶을 수용하는 인내심을 갖게 할지도 모르겠다. 고죽의 영주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형제는 서로 양보하며 끝까지 영주의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이 무렵 상나라의 서쪽에는 훗날 서주 문왕이 되는 희창이 죽고 그의 아들 희발(후일의 서주 무왕)이 군대를 모아 상나라에 반역을 도모했다. 희발의 부하 강태공이 뜻을 같이하는 제후들을 모아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이때 백이와 숙제가 무왕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아직 장사도 지내지 않았는데 전쟁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효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나라는 상나라의 신하 국가이다. 어찌 신하가 임금을 주살하려는 것을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희발이 대노하여 백이와 숙제를 죽이려 했으나, 강태공이 이들 형제가 의로운 사람들이라 하여 죽음을 면했다. 백이와 숙제는 상나라가 망한 뒤에도 상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버릴 수 없으며, 고죽군 영주로 받는 녹봉 역시 받을 수 없다면서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이때 왕미자라는 사람이 수양산에 찾아와 형제를 나무랐다.

“그대들은 주나라의 녹을 받을 수 없다더니 주나라의 산에서 나는 고사리는 어찌 먹는단 말인가?”

이에 두 사람은 고사리마저 먹지 않았고, 마침내 굶어 죽고 만다. 이후 이들은 충절과 의리의 대명사로 기억된다.

사람은 참 복잡하게 산다. 이름도 예사로 짓지 않고, 사람 관계도 그물망처럼 촘촘하다. 살아가는 명분이나 의리 또한 단순한 듯 단순하지 않다. 이렇게 사는 인간의 마음속은 아방궁 미로보다 더 복잡하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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