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위기와 ‘호모 아카데미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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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위기와 ‘호모 아카데미쿠스’
  • 정대성 부산대·서양현대사
  • 승인 2019.12.14 14:3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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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오늘날 우리 대학의 현주소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배움의 호기심 가득한 청년들이 꿈으로 빚어내는 젊은 공동체이자, 학문의 열정과 비판적 지성이 불꽃 튀는 진리의 상아탑인가. 다시 말해 대학은 ‘공부하는 인간’, 즉 진정한 ‘호모 아카데미쿠스’의 산실인가. 대답은 아쉽게도 아니다 쪽으로 기운다. 사실 우리처럼 ‘공부하는 인간’이 많은 사회도 없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입학까지도 모자라 대학 내내 ‘공부’에 매달리고, 직장에 들어가서도 자기 계발이나 승진의 이름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공부’는 우리 삶에 편재하는 불멸의 존재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진정한’ 공부와는 담을 쌓고 있다. 진리 탐구의 장으로 불리던 대학은 ‘대학의 죽음’을 한탄하는 현장이 되고 ‘학벌 사회’의 기원이자 거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통탄의 과정은 ‘대학의 기업화’와 나란히 어깨를 걸었다. 우리는 대학 정신의 붕괴와 대학의 기업화가 한반도를 넘어 세계 곳곳에서 횡행하는 보편적 현상임을 선연히 목도하고 있다.

사실 대학은 취업공장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학문과 진리를 논하던 열띤 젊음과 민주주의의 보루로서 대학이라는 지성의 상아탑은 이제 바벨탑 같은 스펙을 쌓고 또 쌓아 치열한 구직의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한 직업학교, 더 적나라하게 ‘예비실업자 양성소’로 탈바꿈했다. 대학 자체의 운영이 진리나 지성의 이름과는 정반대로, 효율성의 원리로 작동하는 ‘이윤공장’으로 전락했음이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에서 노동 군중이 거대한 기계 공장 속으로 빨려 들어갔듯, 지금 학문공장으로서의 대학은 경제 논리로만 움직이는 다양한 영역의 부품으로 편입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자본 지상주의’의 신도로 학생들을 양성하고 있다. 그 속에서 교수 역시 최상의 경제적 효율성을 학문의 이름으로 짜내도록 강제 당하는 ‘노예적 지식인’이자 ‘지식 자본주의자’로 변모해가고 있다. 그 거대하고 살벌한 경쟁과 도태의 소용돌이는, 주위도 자신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지옥’을 닮아가고 있다. 지성과 연대의 공동체인 대학이 효율과 경쟁의 아마겟돈으로 추락한 것이다.

근본적인 질문이 거기서 나온다. 대학의 자율성과 공공성 및 교육 이상의 회복을 위한 방안 모색은 이제 불가능한 것일까. 대학은 진리의 상아탑, 지성의 전당 같은 거창함은 고사하고, 인간다운 배움 및 학문의 공동체라는 길도 포기하고 성과와 경쟁의 무한 효율성을 정언명령으로 삼는 ‘자본의 제국’에 투항해야 하는가. 진정 그래야 하는가. 아니라면 대학은 어디를 향하고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바로 이 질문을 출발점으로 삼아 우리는 대학 현실을 냉정히 진단하고, 대학 ‘안팎’(In & Out)을 넘나들며 새로운 대학과 ‘대학지성’을 꿈꾸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학의 모습이 아무리 충격적이고 추악하더라도, 대학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청춘의 놀터이자 지성의 해방구이기 때문이다. 대학 너머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학문공동체이자 비판적 지성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대학은 비판적 지성과 열정,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기록을 분명한 역사로 남겨두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대학은 가장 견고한 ‘민주화의 진원지이자 요새’였다. 1960년 4·19혁명에서 시작해 79년 부마항쟁을 거쳐 헌정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의 깃발을 곧추세운 87년 6월항쟁까지, 대학은 민주주의를 꿈꾸며 광장과 거리의 함성으로 전진해나간 우리 현대사에 빛나는 민주화의 견고한 성채였다. 또한 지난날 대학은 ‘비판적 정신과 문화’의 산실이었다. 진리와 정의의 열정으로 불타는 지성과 젊음의 삶터였던 대학 속에서 사회적 불의와 병폐를 질타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움터 나온 역사가 생생히 살아 있다. 이는 우리가 다시 피우고 그려낼 ‘새로운 대학문화’의 청사진을 담는 ‘희망의 붓질’에서 중요한 자산이다. 이러한 노력과 시도는 이른바 헬조선에서 벌레화로 상징되는 청년의 삶이 다시금 존엄으로, 인간다움으로 열려가는 희망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직 희망과 그 희망을 위한 열망은 꺾일 수 없기 때문이므로!

더불어 새로운 대학문화의 창출은 전임교수와 강사 등 직급으로 위계화 되지 않는 총체로서의 연구자들이 경제적 노예화의 길을 벗어나려는 노력 위에서만 성취할 수 있다. ‘학문’은 본디 세상 속으로 질문을 던지고 배움을 실천하는 것이지, 지식과 정보의 유리성에 스스로를 유폐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경제적 노예화는 야만의 길이지,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학문의 길이 아니다. 이렇게 역행하는 공부길 위에서 ‘자본주의 종교’ 속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그 모든 불행과 불안이 대학(과) 세상 속으로 쏟아지며 대학이 위기에 처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저서 『호모 아카데미쿠스』에서 68혁명을 돌아보며, ‘대학의 위기’에서 출발하는 저항의 분출이 일상이나 관습 및 통상적 시대인식과의 단절을 일으키고, 개인이나 집단의 입장표명 및 기대와 요구를 야기하고 투사하는 ‘결정적 사건’으로 폭발했다고 갈파한다. 68혁명기는 대학의 위기가 전 사회적인 변혁의 희망과 열망으로 증폭된 놀라운 시절이었다. 우리가 대학의 위기를 말하기에 충분하다면, 이제 희망을 노래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더 나은 삶과 사회를 지향하는 학문공동체라는 꿈은 꺾일 수 없기 때문이므로. 대학이 진정한 ‘호모 아카데미쿠스’의 거처라는 희망과 그 희망을 위한 열망은 아직 거기 남았으므로!


정대성 부산대·서양현대사

부산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빌레펠트대학에서 68혁명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산대 역사교육과 교수로 있으며 저서로 『Der Kampf gegen das Presse-Imperium: Die Anti-Springer-Kampagne der 68er-Bewegung』, 『68혁명 상상력이 빚은 저항의 역사』, 『철학, 혁명을 말하다: 68혁명 50주년』(공저), 『1968년: 저항과 체제 비판의 역동성』(공저)이 있으며, 역서로는 『68운동: 독일, 서유럽, 미국』과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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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흠 2019-12-18 12:24:25
정말 공감가는 글입니다. 대학생의 신분으로 글을 읽으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전과는 달리, 명확한 목표 의식을 토대로 배움의 의지를 가지고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드물어졌습니다. 이에 더불어 학생들에게 정성어리고 열띤 강의를 해주시던, 교육에 대한 열의를 지니신 교수님들의 수도 적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상황이 맞물려 현 시대의 대학 강의실에서는 학구열이 넘치는, 가르침과 배움의 열띤 현장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이런 시기일 수록, 더욱이 훌륭한 지도자이신, 학생들을 배움의 길로 이끌어주실 교수님들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배움에 열의가 없고 학구열이 낮은 학생들에게 영감, 감명을 주고 이를 이끌어 내주시는 훌륭한 교수님들의 역할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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